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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의 산책
구로 시로 지음, 오세웅 옮김 / 북애비뉴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지저분한 강가 자갈길에서 남자아이들이 돌멩이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어대는 어린 소녀.
그녀는 귀신, 유령, 사신, 제대로 불러주는 별명이 없다.
강을 가로질러 놓인 좁은 다리, 수로교가 보인다.
그 다리만 건너면 금방 집인데,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죽고 싶다. 왠지 개똥 옆에서 당장이라도 죽고 싶다.
해가 서서히 지고 있다. 어두워지면 죽자. 그렇게 결심했다.
소녀가 보기에 아저씨는 특이한 사람이다.
혹시 다른 사람과는 달리 소녀에게 친절하게 대해줄지도 모른다.
소녀를 바라보며 저토록 자상한 웃음을 보여주는 사람은 처음이다.
소녀는 자석에 당기듯 피곤한 모습의 그림자에 빨려들어간다.
"볼래?"
아저씨가 가래가 섞인 듯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이라고 아저씨는 말하지 않았다.
소녀는 놀라운 광경에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다.
사람이, 도저히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눈꺼풀이 크게 벌어진 채 빙글빙글 검은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얼굴도 점차 자줏빛으로 변해갔다.
우스꽝스런 움직임으로 손발을 버둥거리고 있다. 재밌는 춤같기도 했다.
아저씨가 "볼래?" 라고 했던 게 이런 모습을 말하는 걸까.
소녀는 책가방에서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꺼냈다.
수로교 밑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한 한 남자를 목격한 어린소녀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이 책은,
엄마인 미사코가 죽은 지 일년도 되지 않을때부터 이상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치아키와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인기 괴담 소설가 타쿠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괴담 소설이다.
제 1회 일본 괴담 문학상 장편부분 대상 수상작답게 이 책의 분위기는 어두운 책표지와 첫 장면에 등장한 어린 소녀처럼 시종일관 우울하고 어둡기만 하다.
타쿠로는 치아키가 그려대는 으스스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그림을 좋아한다. 아내인 미사코의 할머니가 어렸을때 유령이나 요괴따위를 봤었다는 이야기를 기억해내고 치아키가 그런것들을 보는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화가였던 미사코의 재능을 이어받아서 치아키의 그림 재능을 소설가답게 타쿠로는 존중해준다.
유치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림만 그려대는 치아키와 하루종일 집안에서 소설만 쓰는 타쿠로. 그리고 시퍼런 여자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치아키.
어느날 한 밤중에 머리나 식히러 산책을 갈려는 타쿠로를 치아키가 따라나서고 두 사람은 강가로 산책을 간다. 수로교 위에서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는 치아키. 그 다음날 밤 11시. 치아키가 아빠에게 산책을 가자고 조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시작된 밤 11시의 산책.
타쿠로의 담당인 쿠스노키가 갑자기 종적을 감추고 젊고 아름다운 미키라는 아가씨가 그의 후임으로 들어온다. 이때부터 치아키의 광기어린 행동은 더 심해지기 시작한다. 타쿠로는 엄마없이 치아키를 혼자 키우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하며 미키와의 결혼을 생각해보게 된다. 이런 타쿠로의 마음을 눈치라도 챘는지 엄마가 화났다고 말하는 치아키.
유치원에서도 시퍼런 여자의 얼굴을 그려대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며 걱정을 하던 치아키의 유치원 선생님이 어느날 집으로 찾아와 치아키의 치료를 권한다. 그리고 돌아갈려고 하는데 그날따라 치아키가 배웅을 한다고 나서고 그 다음날 선생님이 육교를 건너다 떨어져 죽었다는 연락이 온다. 그리고 계속되는 죽음들. 치아키의 집주변에서 노인들과 노숙자들의 자살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저주받은 마을, 저주받은 집.
미키와의 결혼 이후에도 계속되는 치아키의 이상한 행동들과 죽음들.
이 일련의 사건들의 배후에는 미사코와 의문의 여자가 관련되어 있었다.
오싹한 결말 읽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주는 풀린 것 일까. 타쿠로와 미키, 치아키는 그 저주에서 결국 해방된 것 일까.
책을 보는 내내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서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여러번 받았다.
치아키가 나를 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을것만 같았다.
혼자서는 보고 싶지 않은 책이였다.
괴담 소설다운 소설이라고나 할까.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 불우한 어린 소녀, 그리고 노숙자들과 노인들.
이들은 모두 사회에서 버림받은 소외된 사람들이다.
그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도시 괴담.
마을의 중간을 가로지르며 흘러가는 그 문제의 강이 단절된 현대 사회의 일면을 보여 준 것은 아닐까.
소외된 자들의 분노와 슬픔들이 모여 강의 밑바닥에 침식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유령이나 요괴들보다 사람이 가장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 소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