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사기 - 우석훈의 국가발 사기 감시 프로젝트
우석훈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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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청년이라면, 우석훈 경제학자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가 쓴 저서의 1권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당연히 그의 대표작은 <88만원 세대>이지만, 나는 우석훈이라는 이름을 <문화로 먹고살기>라는 책으로 처음 만났다. 그 때는 내가 첫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문예창작과를 졸업해서 '문화'라는 컨텐츠로 먹고 사는 것이 어려운 것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때였다.


선택할 수 있는 기로는 과감하게 인생을 던져서 작가에 도전해보거나, 자본이 조금 있다면 책방 서점, 나처럼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문화 직업은 사서 또는 출판사 직원이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출판사 직원이 되었다.(응??)


책이 좋아서 직업을 선택했는데, 책의 표지만 보고 판매 부수를 판단하는 MD보다는 컨텐츠를 다루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돈과 사랑, 속으면서 시작하는 것.

<국가의 사기>의 첫 챕터의 제목이다. 사랑과 돈, 삶의 두 자기 중요한 축은 속는 것부터 출발한다는 이야기로 사회경제학을 풀어낸 이야기인데, 어쩌면 내 직업도 '책'에 대한 사랑으로 적은 연봉을 합리화하며 스스로를 속인 것 아닐까?(우겨봄ㅋㅋㅋㅋㅋ) 이 책의 내용처럼 경제학적으로 풀어내자면. 물론 세상에 경제학으로 해석되지 않는 부분이 더 많고, 나는 지금의 삶을 만족하지만.


왜 개인은 맨날 속는가?

: 국가라는 이름에 가려진 진실


핀란드는 2017년 1월 1일부터 보편적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새로운 실험을 진행하고 있고, 일본, 미국과 함께 독일이 최저임금을 올리는 흐름으로 돌입했다. 독일의 경제가 좋아져서 최저임금제를 전격적으로 도입한 것일까? 현재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 3만 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이 늘어난 만큼 개인의 행복 또한 늘어났을까?


요즘 출간되는 많은 책들은 '개인의 행복'에 주목한다. 이제 이 국가가 나를 책임지지 못할 것이라는 실망, 앞으로 더 나아지지 않을거라는 자포자기, 그러니 나는 당장 '소확행'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라는 심리. 나 또한 이 시대의 청년이자 노동자로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왜?라는 의문이 들지는 않나? 나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역할은 무엇이고, 국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과연 국가는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가난한 사람들만 손해 보는 저축은행 사태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고, 외국계 대부업체들이 활개 치고 다니는 일이 좀 줄어들까?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정부가 벌인 충격적인 국가의 모습을 목도했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아도 경제적인 이득이라는 빌미로 많은 국가 자산을 민간 기업에 넘기기도 했고, 아무런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이 국가의 재산을 탐하기도 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정치적으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통해 합리적인 경제적 발전을 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정치, 경제 등 국가가 만들어가는 모든 것들은 국민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안전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이기에 “국가는 무엇이고,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왜 실패하게 되는가? 이 부분을 반드시 점검해야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과연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5만 달러로 갈 수 있는 국가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가?




#1. 경제가 이념이 되어버린 기이한 현상


많은 한국의 보수가 건국이념이라고 생각하는 자유시장경제는 기묘하게 분화되었다. 자유 쪽은 반북 보수가 되었고, 시장경제 쪽은 경제 보수가 되었다. 정치인들이 선거구호처럼 외치는 경제 용어는 사실 정치적 이념의 용어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자유시장경제라는 표현도 이제는 모호해지고 허접해졌지만, 이념이 나쁜 것은 아닌데 한국 보수의 이념에는 혐오만이 담겨있다.


경제를 이념처럼 신봉하는 동안, 흔히 서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삶은 현실적으로 방치되었다. 불법만 아니라면 다단계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이고 여기에 제약을 가하는 것은 경제 자유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고 방치해두었다. 인위적으로 이자율에 상한선을 두는 것 역시 시장경제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국가는 믿었다. 마찬가지로 전세든 월세든 시장에서 알아서 하면 다 될 것이고, 전세가 오르면 다주택자들이 집 더 많이 사서 임대시장에 진출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에서는 다주택 소유자를 투기꾼으로 보지 않고, 국가의 여력이 부족한 공공임대사업을 기꺼이 도와주는 정책 파트너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경제가 이념, 그것도 극도로 높은 수준의 이념이 되어버린 나라에서 이념만 부여잡고 있는 국가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있다.




#2. 국민들의 과도한 무관심 속 그들만의 전쟁, 클랜 현상


나는 사실 클랜 현상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는데(경알못), 난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가장 화가 났다. 전형적인 클랜 현상의 역사는 '한전'이다. 보수 정권이 자리잡으면서 '한국전력'이라는 공기업은 민영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국민들의 무관심 속 국가 관료들은 그들만의 전쟁이 일어난다. 민영화를 할 것이라면, 외국에서 투자할 만하게 그럴 듯한 것들을 매각하자! 그래서 포항제철이 매각되고 포스코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한국전력은 그 과정 중에 있다. 한 마디로 공기업도 아니고, 그렇다고 민영화가 된 것도 아니다.


클랜 현상은 조선 시대의 패권 세력과의 갈등으로 비교할 수 있는데, 씨족 혹은 파벌을 의미한다. 같은 클랜 아래에서는 서로 돕고 먹여 살리기도 하지만, 조금 독특하고 이기적인 의미의 공동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아주 대담하고 과감하게-


- MB의 삽질, '물'에 바쳐진 22조원

- 존재 자체가 사기인 선분양과 분양권

- 영원할 기업의 탄생, 버스 준공영제

- 보수 정부 9년간 급성장한 산업, 다단계


사실 평소에 경제에 아주 관심이 많은 편도 아니고, 잘 아는 편도 아니어서 나는 우석훈 경제학자가 하는 <국가의 사기>라는 이야기가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가 당황스럽다고 표현한 이유는 이런 대담한 '국가의 사기'행위를 몰랐던 게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사기가 사기 행위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침묵하며 당해왔다는 점에서 당황스러웠다.


나는 작년에 2달 정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지내며 봉사활동을 했다. 그 곳에서 지내며 만난 사람들은 프놈펜의 정부가 부패했고, 그래서 살기가 어렵고 발전하기 어려운 나라라고 표현했다. 정부가 부패하면 국민들이 살기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 때, 우리나라도 그 못지않게 부패해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외국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우리 나라는 부패해있고, 그래서 지금 국민들이 살기어렵고 행복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이게 기가 막힌 사기인 것이다.


진짜 사기는 당하는 사람도 사기인 줄 모르는 게 진짜 사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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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꼭 필요한 기본 요리 백과 - 뭐 해 먹지 고민될 때 찾아보는 요안나의 집밥 레시피
이혜영 지음 / 나무수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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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요리책과 달리 제철요리가 풍부해서 자주 활용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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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힘 - 영원한 세일즈맨 윤석금이 말한다
윤석금 지음 / 리더스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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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회사마다 추구하는 경영의 방침이 있고, 핵심 가치가 존재하는데 윤석금 회장은 웅진이라는 기업의 존재 이유, 웅진이 추구하는 핵심가치가 ‘사람의 힘’이라고 말한다. 내가 다녔던 회사들 중에서는 '사회기여', '직원이 행복한 회사' 등등의 방침을 주장(?)하곤 했는데 사실 대부분은 '사람'을 그렇게 귀이 여기지 않았다. 당연히 '나'라는 한 개인이 없어도 회사는 존재할 수 없고, 쉽게 대체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인 우리는 '나' 하나를 귀이 여겨주고, 가치있게 믿어주는 오너를 만나고 싶다.


하지만, 진심어린 경영 방침이 '사람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그냥 나온 말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통해 구사회생을 했거나, 귀한 도움을 받아 본 사람이 그 고마움을 가장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윤석금 회장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2012년 기업회생에 들어가며 상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었을 때도 그것을 이겨내고 재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람의 힘이라고 단언한다. 웅진은 세일즈를 기반으로 탄생한 기업이어서 세일즈 인력들이 제 역량을 발휘하느냐가 회사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기업을 경영하며 A-Z까지 쉬운 일이 하나도 없겠지만, 최일선에서 고객을 직접 만나는 일은 어렵고,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그 회사의 얼굴을 대표하고, 그 회사의 모습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 사회생활을 할 때, B2C는 아니었지만 B2B영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또한 내가 회사의 얼굴이자 대표로 세일즈를 하며 마주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만 늘 쉽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세일즈를 하는 사람이 회사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존재해야만 내가 대표로써 내 기업의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가치를 창출하는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오너의 마음가짐이야말로 '경영'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진짜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왜냐하면 어떤 기업이건 기업의 존재 이유, 존재가치, 존재 목적 모두 사람을 위하고 사람으로 인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가끔 “조직의 명령이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하고 군림하는 리더들이 있다.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는 이런 리더십이 통했지만, 지금은 개인의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다. 오늘날처럼 변화의 방향과 속도를 예측하기 힘든 시대에는 여러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조직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


일방적으로 지시만 하는 리더 밑에서 어떻게 조직원의 창의력과 조직의 경쟁력이 자랄 수 있겠는가. 리더가 새로운 의견이나 정보를 무시한 채 자신의 경험만을 결정의 잣대로 삼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훌륭한 리더는 아랫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의견과 정보를 접하고, 그것을 자신의 경험과 종합해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다. _p.277 〈마음을 얻는 리더, 생각을 나누는 리더〉



나는 최근 일방적인 지시만 하는 리더의 밑에서 창의력을 상실한 채 근무를 해봤다. 그렇게 해야겠다고 마음 먹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방적인 지시와 압박이 능률을 올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그것이 아랫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느껴져서 마음이 많이 상했었다. 조직의 지속 가능성은 조직원의 창의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강압적인 분위기, 강압적인 야근 문화처럼 구시대적인 경영 방침은 능률을 절대 올릴 수 없다. 그래서 열린 마음, 오픈된 마인드로 다양한 의견과 정보를 수렴할 수 있고 최선의 결정과 최선의 책임을 지는 것이 오너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난 이 책의 소개 문구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마음에 드는 문구가 있었다.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 속에서만 진정한 발전이 있다!"


경기가 어려워짐에 따라 기업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으로써는 실패를 용인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마케터로서 51%가능성라도 있다면 시도해 보는 것이 마케터의 자세라고 배웠기에 이러한 기업적 분위기라면 창의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기에 기업이 어려운 시기에서도 서로 믿고 의지하며 성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도 그의 기업이, 그의 기업 철학이 유지되어 직원들이 존경하는 오너로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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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 - 힘겨운 삶에 지친 이들을 위한 철학 처방전
오카다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책세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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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지금까지 인문학, 철학 책을 별로 읽어 본 기억이 없다. 대학생 때 허세스러운 마음으로 산 책이 여러 권있는데 <실존주의> 이런 책들은 사실 지금 읽어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은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나 인문학이 아니라, 지금 현실을 살기 위한 쉬운 철학서들이 많이 나오면서 나도 조금씩 철학이라는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나는 이 책을 소개하는 이 문구가 굉장히 마음을 끌었다.

'어차피 죽을 존재임에도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유한하게 주어진 우리 삶의 의미는 뭘까?

‘어차피 죽을 존재인 우리가 고통을 받으면서도 살려고 하는 데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나도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쇼펜하우어처럼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어떤 의미'가 필요했다. 그것도 평범한 의미가 아니라 특별하고 멋진 의미 말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사람, 매사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죄악감과 불안을 느끼는 사람,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마음의 응어리를 안고 있는 사람, 누가 봐도 부러워할 인생을 살고 있음에도 공허함과 무의미함에 힘들어하는 사람…

우리 주변에 마음 한 구석에 한 움큼 질문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수 없이 질문하고 있는 중이다. '아둥바둥 살아내는 지금 이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말은 아마도 나 스스로에게 '어떻게 살아야 의미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이 아니었을까?

이 책은 여러 챕터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그 중에서 내가 궁금해했고, 내게 의미있게 다가온 부분을 중심으로 순서를 바꾸어 읽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3가지 챕터이다.

5장_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6장_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철학
7장_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서

 

 18세기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자서전 《고백》을 보면, 루소는 자신을 낳다 죽은 어머니의 부재 속와 죄책감 속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부터 거짓말과 도둑질을 일삼았는데, 이는 스스로 혼자서는 살아남을 길이 없는 연약한 존재로서 누군가의 마음에 들도록 자신의 진심을 억제하고 자신을 꾸미는 과정에서 보인 행동이었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루소와 비슷하게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후 새어머니의 학대를 받으며 암울한 성장기를 보내다가 날치기를 하다 잡혀와 자신과 상담하게 된 소년을 떠올린다.

어려서부터 애정과 돌봄을 받지 못하고 인간관계에서 아픔을 겪은 나머지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받는 일을 피하고자 하는 ‘회피형’이라 불리는 애착 스타일을 발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사람이 되지 않았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고통과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일종의 자기방어이지만 이 또한 살아가기 위한 방어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다. 아마 누군가를, 혹은 자기 자신을 떠올리게 될 수도 있다. 누군가와 만남을 기뻐하고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만, 애착을 가지면 이별할 때 오히려 힘들어진다는 것이 두려워 마음 어딘가에서 거리를 두어 사람을 대하게 되고, 헤어질 때는 냉정하게 잊어버린다. 그것은 이러한 사람이 은혜를 몰라서가 아니다.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상처 입지 않는 방법을 습득하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유행처럼 '애착'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어린 아이를 양육할 때 '애착'이 부족해 성숙한 인간이 되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는 어른들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부모가 된 우리 세대가 '스스로 애착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세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애정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채워주고 싶은 마음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세대는 서로에게 조금 냉담하다. 우리도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습득한 방법일 것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 또한 아버지를 일찍 여읜데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성장 과정에서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해 결핍감을 느꼈다. 자신에게 부재했던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자신을 보호해주고 이끌어주길 끊임없이 원해 존경하던 교수인  마르틴 하이데거와 연인이 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가정이 있는데다, 나치에 협력하게 되며 아렌트와 이별하게 되고, 유대계로 독일 태생의 아렌트는 유대인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전후 아렌트는 스승 하이데거를 자신의 명성을 걸고 옹호하게 되는데 이는 하이데거가 아렌트에게 현실에서 가질 수 없던 이상화된 아버지로,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친 셈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대부분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의 원동력' 애정과 관심을 받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강한 척하지 않고 자신을 열어 보여 상대의 관심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에 보면 타인의 애정없이 혼자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어지간한 자기애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한다ㅋㅋ)

 

미국의 '부두군 철학자'로 유명한 에릭 호퍼의 삶을 통해 극히 심각한 고통을 안고 있던 존재가 어떻게 그 고통을 극복하고 희망을 발견해나가는지 알 수 있다. 에릭 호퍼는 다섯 살 때 어머니가 그를 안은 채 계단에서 넘어지는 사고를 당해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에릭은 시력과 기억을 잃어 아버지로부터 '백치 자식'이라 불렸다. 어머니를 잃은 충격이 어린 영혼을 고통에 밀어넣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열다섯 살때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하고 책읽기에 몰두하지만 열여덟 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가난과 방랑의 생활이 시작된다. 배고픔과 노동에도 그는 자신이 타락할 것을 경계하였고 그에게 어울리는 인생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가 의지하던 모든 사람들이 사망하게 되고 결국 호퍼는 깊은 허무에 음독자살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친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를 떠났을 때 호퍼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고 기쁨이 그 안에서 되살아났다. 자살 직전까지 자신을 내몰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경지였을까.

어려서 부모를 잃은 사람 중에는 종종 향수처럼 죽음에 대한 바람이 자리 잡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도 실제 죽을 뻔한 경험을 하면 삶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야 인간은 산다는 것에 기쁨과 관심을 되찾게 된다.

그렇다면 호터는 왜 오랫동안 세상을 등지고 자신을 멸시하듯 살았을까?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삶을 불행 끝으로 밀어넣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어린 시절에 느낀 자기 부정의 감정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부모의 긍정적인 애정이 시련을 극복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되새긴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주체적인 본성이다. 살고 싶다는 근본적인 욕구를 잃어버린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쁨을 주는 존재가 없어진 경우, 다른 하나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인생을 강요받는 경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희망을 되찾으려면 무참하게 부서진 현실에 매달리기보다 끝난 사태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필요하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필요 이상으로 고통을 오래 끌지 않고 안정과 희망을 되찾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프랑클은 강제수용소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현실에 자신을 책망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을 전쟁터에서 살아남게 해준 것은 자신의 유한성을 뛰어넘는 신의 존재를 느끼고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마음에 위로가 된 것은 자신의 슬픔을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친구, 인간이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해 매우 고통스러운 시련에 부닥치는 건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마치 뭔가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내게 뭔가를 요구하는 듯한, 마치 뭔가가 결정되어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어"

커다란 시련을 극복하고 삶을 개척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운명을 수용하는 자세와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런 사람들은 기나긴 고난 속에서도 희망과 의미를 발견하고 작은 기쁨을 원동력으로 삼아 삶을 이어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약한 인간이 고난을 딛고 살아가려면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찾아야 하는데, 그 대상이 부양할 가족인 경우가 많고 때로는 돌볼 반려동물인 경우도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빈둥지증후군에 시달린데다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입어 절망하던 중 버려진 강아지를 데려다 키우며 삶의 의욕을 되찾은 초로의 여성, 중증 지적장애를 지닌 딸을 부양하기 위해 글을 쓰다가 성공적인 작가가 된 펄 벅,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조카 로사를 돌보며 부모 역할을 하면서 창작 의욕을 북돋울 수 있었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일화가 그 근거로 볼 수 있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여러 사람이 얽혀 있는 일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
결국 처음의 이 질문에는 사람마다 다르게 정의내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단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불편하고, 오히려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살거야. 나에겐 관계가 없어도 외롭지 않아.'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받는 일을 피하고자 하는 ‘회피형’일 수도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안전기지'가 필요하다. '이 사람에게는 내 마음, 내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줘도 버리지 않을 거야' 라고 느끼는 안전한 곳. 그 곳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고, 친구라면 가장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많을 수록 좋겠지. 하지만 단 한 곳이어도 상관없다. 그 한 곳으로 인하여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가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안전기지가 되어주고 싶다.

나도 이제 그만 웅크리고 마음을 열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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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되었습니다 - 영화 [희생부활자] 원작 소설
박하익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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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미래, 어느 날부터인가 눈빛이 흐릿하고 말이 느린 사람들이 나타난다. 소매치기에게 찔려 죽은 뒤 7년만에 돌아온 주부, 실종된 날의 차림새 그대로 10년 만에 돌아온 아이 등 이들은 모두 억울하게 죽은 살인 사건의 피해자들이다. 살아생전의 모습 그대로 돌아온 피해자들은 자신을 살해한 가해자를 찾아 직접 죽인 후에 소멸한다. 사람들은 이들을 ‘환세자(RV, Resurrected Victim)’라고 부르고, 설명할 수 없는 이 괴현상에 두려워하는 한편 억울한 죽음의 진실이 밝혀진다는 점에서 희망을 갖는다. 


하지만 7년 전 소매치기의 칼에 찔려 죽은 어머니 명숙은 다른 RV들과는 다르다. 그녀는 자신을 죽인 소매치기가 아닌 자신의 아들을 향해 공격 반응을 보인다. RV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소멸하지 않은 RV를 실험체로 얻으려는 국정원과 CIA는 자신을 죽인 자에게만 반응을 보이는 명숙이 진홍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서진홍을 사건의 진범으로 의심한다. 그들은 서진홍과 최명숙을 구속하고 두 사람에게 각종 심리 검사와 대질 심문을 행한다. 한편 명숙을 찌른 진범이 그 과정에서 잡혀 들어오고, 마침내 세 사람은 한 자리에서 마주한다.


살인범이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심판은 무엇일까?


'죄와 벌'에 대한 생각은 평소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때때로 조두순 사건이나 수십 명을 살해한 것이 분명한데 그것에 비해 형량을 비교적 적게 받는다고 생각할 때 울분이 터지고 분노하게 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에게 어떤 댓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최근 들었던 팟캐스트 '크라임'에서 베트남전에서 전쟁 후유증을 앓는 사람이 망상에 시달리다 연대장의 어머니를 죽였는데 국가가 그를 보살피지 않아서 이런 일이 야기되었고, 그래서 그에게 내려진 7-10년형이 적절하다는 멘트를 들었다.


우린 무엇을 위하여 '처벌'을 하는 것일까?


과연, 피해자 유족들은 그렇게 생각할까? 최고 형벌의 선, 그것이 무엇일까?


이 책은 그 부분에서 시작한다. 어린아들을 살해당한 박종호박사는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고통스러워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괴로워 할 건 내가 아니잖아. 죄를 지은 장본인이지. 최고의 형벌은 죄인에게 사랑을 깨닫게 하는거야. 피해자를 향한 불타는 사랑 말이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피해자라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피해자의 입장에서 똑같이 겪어내는 것. 완벽한 징벌이자 잔혹판 징벌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시스템.


그래서 살인범에게 피해자와 유족의 기억을 심어주는 것.

참신한 아이디어이고, 기발한 스토리. 하지만 실제로 가능할까?


정말 피해자의 고통을 이식해주었을 때, 범죄자들은 공감하고 교화될 수 있을까? 그 상실된 죄책감이 모든 상황을 돌이킬 수 있을까?

괴로워 할 건 내가 아니잖아. 죄를 지은 장본인이지. 최고의 형벌은 죄인에게 사랑을 깨닫게 하는거야. 피해자를 향한 불타는 사랑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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