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 - 힘겨운 삶에 지친 이들을 위한 철학 처방전
오카다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책세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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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지금까지 인문학, 철학 책을 별로 읽어 본 기억이 없다. 대학생 때 허세스러운 마음으로 산 책이 여러 권있는데 <실존주의> 이런 책들은 사실 지금 읽어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은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나 인문학이 아니라, 지금 현실을 살기 위한 쉬운 철학서들이 많이 나오면서 나도 조금씩 철학이라는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나는 이 책을 소개하는 이 문구가 굉장히 마음을 끌었다.

'어차피 죽을 존재임에도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유한하게 주어진 우리 삶의 의미는 뭘까?

‘어차피 죽을 존재인 우리가 고통을 받으면서도 살려고 하는 데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나도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쇼펜하우어처럼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어떤 의미'가 필요했다. 그것도 평범한 의미가 아니라 특별하고 멋진 의미 말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사람, 매사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죄악감과 불안을 느끼는 사람,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마음의 응어리를 안고 있는 사람, 누가 봐도 부러워할 인생을 살고 있음에도 공허함과 무의미함에 힘들어하는 사람…

우리 주변에 마음 한 구석에 한 움큼 질문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수 없이 질문하고 있는 중이다. '아둥바둥 살아내는 지금 이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말은 아마도 나 스스로에게 '어떻게 살아야 의미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이 아니었을까?

이 책은 여러 챕터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그 중에서 내가 궁금해했고, 내게 의미있게 다가온 부분을 중심으로 순서를 바꾸어 읽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3가지 챕터이다.

5장_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6장_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철학
7장_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서

 

 18세기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자서전 《고백》을 보면, 루소는 자신을 낳다 죽은 어머니의 부재 속와 죄책감 속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부터 거짓말과 도둑질을 일삼았는데, 이는 스스로 혼자서는 살아남을 길이 없는 연약한 존재로서 누군가의 마음에 들도록 자신의 진심을 억제하고 자신을 꾸미는 과정에서 보인 행동이었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루소와 비슷하게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후 새어머니의 학대를 받으며 암울한 성장기를 보내다가 날치기를 하다 잡혀와 자신과 상담하게 된 소년을 떠올린다.

어려서부터 애정과 돌봄을 받지 못하고 인간관계에서 아픔을 겪은 나머지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받는 일을 피하고자 하는 ‘회피형’이라 불리는 애착 스타일을 발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사람이 되지 않았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고통과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일종의 자기방어이지만 이 또한 살아가기 위한 방어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다. 아마 누군가를, 혹은 자기 자신을 떠올리게 될 수도 있다. 누군가와 만남을 기뻐하고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만, 애착을 가지면 이별할 때 오히려 힘들어진다는 것이 두려워 마음 어딘가에서 거리를 두어 사람을 대하게 되고, 헤어질 때는 냉정하게 잊어버린다. 그것은 이러한 사람이 은혜를 몰라서가 아니다.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상처 입지 않는 방법을 습득하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유행처럼 '애착'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어린 아이를 양육할 때 '애착'이 부족해 성숙한 인간이 되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는 어른들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부모가 된 우리 세대가 '스스로 애착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세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애정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채워주고 싶은 마음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세대는 서로에게 조금 냉담하다. 우리도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습득한 방법일 것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 또한 아버지를 일찍 여읜데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성장 과정에서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해 결핍감을 느꼈다. 자신에게 부재했던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자신을 보호해주고 이끌어주길 끊임없이 원해 존경하던 교수인  마르틴 하이데거와 연인이 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가정이 있는데다, 나치에 협력하게 되며 아렌트와 이별하게 되고, 유대계로 독일 태생의 아렌트는 유대인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전후 아렌트는 스승 하이데거를 자신의 명성을 걸고 옹호하게 되는데 이는 하이데거가 아렌트에게 현실에서 가질 수 없던 이상화된 아버지로,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친 셈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대부분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의 원동력' 애정과 관심을 받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강한 척하지 않고 자신을 열어 보여 상대의 관심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에 보면 타인의 애정없이 혼자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어지간한 자기애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한다ㅋㅋ)

 

미국의 '부두군 철학자'로 유명한 에릭 호퍼의 삶을 통해 극히 심각한 고통을 안고 있던 존재가 어떻게 그 고통을 극복하고 희망을 발견해나가는지 알 수 있다. 에릭 호퍼는 다섯 살 때 어머니가 그를 안은 채 계단에서 넘어지는 사고를 당해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에릭은 시력과 기억을 잃어 아버지로부터 '백치 자식'이라 불렸다. 어머니를 잃은 충격이 어린 영혼을 고통에 밀어넣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열다섯 살때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하고 책읽기에 몰두하지만 열여덟 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가난과 방랑의 생활이 시작된다. 배고픔과 노동에도 그는 자신이 타락할 것을 경계하였고 그에게 어울리는 인생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가 의지하던 모든 사람들이 사망하게 되고 결국 호퍼는 깊은 허무에 음독자살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친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를 떠났을 때 호퍼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고 기쁨이 그 안에서 되살아났다. 자살 직전까지 자신을 내몰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경지였을까.

어려서 부모를 잃은 사람 중에는 종종 향수처럼 죽음에 대한 바람이 자리 잡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도 실제 죽을 뻔한 경험을 하면 삶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야 인간은 산다는 것에 기쁨과 관심을 되찾게 된다.

그렇다면 호터는 왜 오랫동안 세상을 등지고 자신을 멸시하듯 살았을까?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삶을 불행 끝으로 밀어넣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어린 시절에 느낀 자기 부정의 감정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부모의 긍정적인 애정이 시련을 극복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되새긴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주체적인 본성이다. 살고 싶다는 근본적인 욕구를 잃어버린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쁨을 주는 존재가 없어진 경우, 다른 하나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인생을 강요받는 경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희망을 되찾으려면 무참하게 부서진 현실에 매달리기보다 끝난 사태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필요하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필요 이상으로 고통을 오래 끌지 않고 안정과 희망을 되찾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프랑클은 강제수용소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현실에 자신을 책망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을 전쟁터에서 살아남게 해준 것은 자신의 유한성을 뛰어넘는 신의 존재를 느끼고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마음에 위로가 된 것은 자신의 슬픔을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친구, 인간이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해 매우 고통스러운 시련에 부닥치는 건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마치 뭔가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내게 뭔가를 요구하는 듯한, 마치 뭔가가 결정되어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어"

커다란 시련을 극복하고 삶을 개척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운명을 수용하는 자세와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런 사람들은 기나긴 고난 속에서도 희망과 의미를 발견하고 작은 기쁨을 원동력으로 삼아 삶을 이어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약한 인간이 고난을 딛고 살아가려면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찾아야 하는데, 그 대상이 부양할 가족인 경우가 많고 때로는 돌볼 반려동물인 경우도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빈둥지증후군에 시달린데다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입어 절망하던 중 버려진 강아지를 데려다 키우며 삶의 의욕을 되찾은 초로의 여성, 중증 지적장애를 지닌 딸을 부양하기 위해 글을 쓰다가 성공적인 작가가 된 펄 벅,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조카 로사를 돌보며 부모 역할을 하면서 창작 의욕을 북돋울 수 있었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일화가 그 근거로 볼 수 있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여러 사람이 얽혀 있는 일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
결국 처음의 이 질문에는 사람마다 다르게 정의내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단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불편하고, 오히려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살거야. 나에겐 관계가 없어도 외롭지 않아.'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받는 일을 피하고자 하는 ‘회피형’일 수도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안전기지'가 필요하다. '이 사람에게는 내 마음, 내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줘도 버리지 않을 거야' 라고 느끼는 안전한 곳. 그 곳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고, 친구라면 가장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많을 수록 좋겠지. 하지만 단 한 곳이어도 상관없다. 그 한 곳으로 인하여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가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안전기지가 되어주고 싶다.

나도 이제 그만 웅크리고 마음을 열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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