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하루키의 초기작들은 확실히 스무 살 무렵의 감성을 어필한다. 
젊은 시절의 어설픈 치기같은 것들이,
그 속에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테면 처음 인생의 쓴맛을 알았다는 식의 비애감이라든가,
혹은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식의 가벼운 체념같은 것들. 

 
2, 

종종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우물에 대해, 생각한다.
... 물론 이 말도 하루키 소설 속에 나오는 말이긴 하지만. 

살다가 어느 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 우물에 빠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길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거나,
혹은 문득 뒤를 돌아보는 그 순간일 지도......

아주 낯 선 거리,
낯 선 사람들 사이에서 흔적도 없이,
그 우물 속으로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불가해한 우연들의 연속일 수도 있고.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단지 사실이라는 이유로, 믿어야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가진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준비도 없이 맞닥뜨리게 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간에 마찬가지다...

우물이나 늪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함정이라거나,
혹은 필연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냥, 운명이라고들 많이 이야기한다. 

 
3,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다.

맹목적인 고독을 감내하며
안으로, 안으로 무턱대고 파들어가던 그 시절.
어쩌면 생에 가장 순수하고
또 무모했던 시간들이었을지 모를 순간들...

그러니까 만약 순수라는 것이,  
자신에게 온전히 100퍼센트 몰두할 수 있는
그런 순간을 말하는 것이라면...

누구에게나,
그처럼 어리석을 정도로 순수했던 시간들이
존재했을 거라는 말이다.  

하지만, 또 만약
그런 순간들을 순수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내, 그 순수를 훼손당하는 셈이다. 

자신의 욕망에 정직하고,
자신의 고독에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면서 
자신에게 온전하게 100퍼센트 몰두할 수 있는 순간들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4,

그러니까 나는, 또 생각한다.

어쩌면...
나를, 잃어버리는 그 순간이,
바로 우물과 마주치는 그 순간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는,
우리가 받은 상처의 분량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순수가 얼마나 훼손당하고
얼마나 세상과 교묘하게 타협하는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다시 그 도저한 고독속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를 세상에 내어주는지...

알지 못한다.

 
5,

그러니까, 그런 순간들...
오로지 순수하게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면,

그건... 단지 꿈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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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네 혹시... 담배 연기의 무게를 어떻게 재는줄 아나?
먼저 저울을 준비해서 담배의 무게를 재.
그리고 담배를 피우면서 재를 저울에 털어넣는거지.
마지막으로 담배를 다 피운 후
꽁초를 저울 위에 올려놓고 다시 무게를 재는거야...

처음에 쟀던 담배의 무게에서 
나중에 잰 꽁초와 재의 무게를 빼고 남은것이 
바로 연기의 무게인 셈이지.

                               ... 영화 '스모크' 中에서...


2,

1996년... 그 해에 나는 고 3이었다. 그리고 여름 내내 귀를 앓았다.
바다가 한 가득 귓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눈과 코를 막고 욕조 속에 깊숙이 파묻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누군가 두 손으로 내 귀를 막고 있는 것 처럼... 세상 전체가 웅웅웅 거렸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부모님도... 웅웅웅웅....
  

병원에서도 딱히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는데
세수를 하다가 물이 들어간 것 같다고 하면서도...
그 현상이 근 보름이나 지속되는 이유에 대해선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내린 최종 결론이 바로... 고 3병이라는 것이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라나...

... 바보같은 의사들... 이라고 당시엔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의외로 고마운 면도 없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가능하면 편안하게 마음을 가지라는 의사의 충고 덕에
나는 그야말로 릴렉스하게 고 3 여름방학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릴렉스해지라고 의사가 그러는데... 어쩌겠는가.
릴렉스해져야지. 릴렉스......
 

덕분에 고 3 주제에 느긋하게 비디오도 몇 편 볼 수 있었는데...
그 때, 내 영화의 선택 기준은 첫째도, 둘째도 자막이었다. 
애써 소리를 들으려고 하면 더욱 심하게 귀가 울렸으니
스트레스성이라는 진단이 그리 틀린 것만도 아니었던 것같다.


3,

'스모크'는 그 때, 봤던 영화들 중 하나였다.
하필이면, 비디오 가게의 후미진 구석에 박혀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했던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아마도 심각하게 영화를 고르는 일이 귀찮아서였을 것이다.

인기있는 영화들은 이미 다 대여가 된 상태였고
그렇다고 딱히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나름대로 이유 비슷한 것들은 있었다. 
하나는 중학교 때 야한 영화인줄 알고 빌려봤다가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영상 때문에 감동 먹었던
영화 피아노의 주인공 하비 케이틀이 출연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조이 럭 클럽'이라는 영화로
중국계 미국여성들의 일상을 섬세하게 잡아냈던
웨인 왕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

4,

세상에는...
결코 말해질 수 없는 진실들이 있기 마련이다. 
혹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마치 연기의 무게처럼...
  

......

하나부터 열까지 명확하고 
정의로운 진실만이 살아남으며
또 시험문제처럼 정답만 존재한다면

장담하건대, 그것은 진짜 세상이 아니다.
 

폴 오스터의 1992년작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진실도 정답도 아니다...
그냥... 인생일 뿐.

사라진 후에나, 겨우...
그 흔적만이라도 그러모을 수 있는...... 

 
5,

아마도 이 영화가, 그 해 여름에 본, 마지막 영화였을 것이다.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귀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씻은듯 말끔하게.....

나는 다시 학교 수업을 듣고, 영어 단어를 외우고, 정석을 풀었다. 
그리고  계절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수능을 보는 날이었다.

아침 추위가 유난히 매서운 날이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내가 사용하던 방석과, 도시락, 보온물병...
그리고 수험표를 두 손에 꼭 그러쥐고 수험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달 뒤, 나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정답이었는지는,
... 잘 모르겠다.



6,

1997년... 봄.

솜사탕처럼 부풀어오른 캠퍼스의 화사함 속에서
나는 내내, 내가 떠나온 좁고 어두운 시간 속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독서실 한 구석자리, 그 비좁은 어둠 속에서
눈만 감으면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고 3 여름방학
그 묵직했던 시간들이,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진 후에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그 시간들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그 오롯한 어둠 속에서 얼마나 편안함을 느꼈었는지를...  


7,

여담이지만, 웨인 왕 감독의 작품은
이 때까지가... 최고였다는 생각이 든다. 

'조이럭클럭'과 '스모크' 이후.
그의 영화 속에서는
무뚝뚝한 인간애나 썰렁한 농담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헐리우드가 좋아하는 가족 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가,
이후, 그가 선택한 안전한 방향이었다.  

혹자는, 그것이 헐리우드의 메이저영화사 속에서
산전수전 겪으며 일해온 감독의 최종 귀착지라고도 하지만...

...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로...
그것이 그에게는 인생의 정답이었을지도...

다만 생각해 볼 뿐이다.
내게는 과연, 그런 모범답안을 뿌리칠 용기가 있을까...
일상의 아주 작고, 느리고, 소소한 기쁨들을 지켜낼 수 있는, 

그런 힘이 있을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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