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서프라이즈'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얽힌 비화를 다뤘다.

사실 그 전까지는 앨리스에 1도 관심이 없었지만, tv를 보며 몇 해 전이 출간 150주년이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렇게 나는 이 작품에 급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알라딘에서 그동안 왜 그렇게 앨리스 관련 상품을 만들어냈는지도 그때 알게 되었다..)

 

원체 유명한 동화라 시중에 나온 번역본도 엄청나게 많다.

초판본과 유사한 디자인으로 나온 판본도 몇 있고.

해서 며칠 동안 몇 권 골라서 앞부분을 원문과 대조해봤는데, 그렇게 어렵게 쓰인 글이 아님에도 생각보다 번역이 제각각이어서 놀랐다.

그동안은 주로 믿을 만하다 싶은 출판사의 책을 몇 권 골라 비교했지만, 이 작품의 경우 메이저 출판사에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아 마이너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도 많이 뒤져보게 되었다.

 

아래에서는 굳이 출판사를 거론하지 않고 작품 앞부분에서 번역이 상이한 문장 2개만 다루기로 한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 글 쓰기가 더 귀찮아진다...)

 

 

1.

Ah, cruel Three! In such an hour,
Beneath such dreamy weather,
To beg a tale of breath too weak
To stir the tiniest feather!

Yet what can one poor voice avail
Against three tongues together?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서문격으로 실린 시이다.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게 된 배경이 나온다.

여기서 주로 해석이 갈린 것은 'breath'의 주체이다.

즉 ⓐ아이들이 약한 숨소리로 이야기를 구걸했다는 해석과, ⓑ약한 숨소리를 가진 '나'에게 아이들이 이야기를 구걸했다는 해석으로 나뉜다.

breath는 누구의 숨결인 것일까.

문장을 보면 beg A of B 구조로 돼 있는데, 이는 A를 B에게 바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breath라는 '대상'에게 이야기를 구걸했다는 것인데, 아이들이 이야기를 구걸하는 대상은 '나'이므로 결국 breath는 '나'의 은유가 되는 것이다.

얼핏 생각해보면 약한 숨소리는 아이들을 의미할 것 같지만, 앞 문장에 나오는 "cruel Three!", 그리고 뒷 문장에 나오는 "one poor voice" 같은 구절들을 봤을 때 이야기를 즉석에서 지어내야 하는 작가 자신의 난처함을 강조하기 위해 쓴 표현이 아닌가 싶다.

 

2.

So she was considering in her own mind (as well as she could, for the hot day
made her feel very sleepy and stupid
), whether the pleasure of making a
daisy-chain would be worth the trouble of getting up and picking the daisies,

 

번역본들을 보면 크게 ⓐ더워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는 뉘앙스와 ⓑ더워서 움직이는 게(일어나서 꽃을 딸지 말지) 고민되었다는 뉘앙스로 갈린다.

여기서는 두 가지 해석 모두 가능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후자 편에 서고싶은데, 이유는 언급한 문장의 앞 내용 때문이다.

앞부분에서 앨리스는 할 일 없이 언니 옆에 앉아 있으려니 심심해 죽을 것 같다고 한다.

언니의 그림책을 흘깃 봤지만, 거기에는 그림도 대화도 없어 당최 왜 읽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당연히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찾아나서야 마땅하다.

그런데 윗 문장에서 그녀는 일어나서 꽃을 꺾는 수고로움과 화관을 만드는 즐거움을 저울질한다.

왜 심심해 죽겠는데 꽃 꺾는 게 뭐 대수라고 그걸 고민하고 앉았을까?

(거기다 그녀는 'trouble'이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도대체 왜?

더워서 졸리고 멍해지니까 귀찮아서 그런 것 아닐까?

선택은 각자의 몫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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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양장) - 개정증보판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건 뭐... 차라리 이방인이 나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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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30th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표지는 참 구매욕 당기게 바꿔놨다.
내용은 - 리미티드 에디션들이 거의 그래왔듯이 - 기존 판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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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난꾸러기

                       보들레르

  그것은 새해의 폭발이었다. 무수한 사륜마차가 가로지르고, 장난감과 봉봉과자가 번쩍거리고, 탐욕과 절망이 들끓는 진흙과 눈의 혼돈, 가장 완강한 고독자의 뇌수마저 어지럽히려고 마련된 대도시의 공인된 착란.

  이 소동과 난장판의 한가운데서, 나귀 한 마리가 채찍으로 무장한 어느 무뢰한에게 시달리며 굳세게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나귀가 보도의 모퉁이를 막 돌려 할 때, 장갑이 끼워지고 에나멜 칠로 번들거리고, 넥타이로 끔찍하게 목이 조여, 완전 신품 양복 속에 감금당한 멋쟁이 신사 하나가 이 누추한 짐승 앞에 정중하게 절을 하고는, 모자를 벗어들고 말했다. "아름답고 복된 새해를 기원합니다!" 그러고는 내 알 바 없는 떨거지들 쪽으로 득의만만하게 고개를 돌렸다. 제 만족감에 그들이 칭찬이라도 얹어주기를 앙망하는 듯이.

  나귀는 이 멋쟁이 장난꾸러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그래서 제 의무가 부르는 곳으로 계속해서 열심히 달려갔다.

  나로 말하자면, 프랑스의 모든 재기를 고스란히 한몸에 끌어모은 것만 같았던 이 으리으리한 바보를 보며 측량할 수 없는 분노에 돌연 사로잡혔다.

 

- <파리의 우울>(황현산 역) 中

 


  새해 첫날의 난잡함, 어느 무뢰한을 태운 나귀, 나귀에게 절하는 신사, 그리고 그에게 분노를 느끼는 화자. 별 생각 없이 시를 읽다 보면 마지막에 화자가 분노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이 사뭇 뜬금없게 다가온다. 도대체 화자는 신사에게 왜 화가 난 걸까.

 

  사실 화자는 신사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불쾌한 상태이다. 눈처럼 희어야 할 새해 첫날은 이미 물질 만능 주의라는 진흙에 더럽혀진 지 오래고, 어리석은 대중은 이러한 혼란을 '공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방이 온통 이러하니 아무리 '가장 완강한 고독자'일지라도 머리가 지끈지끈할 수밖에.

 

  이런 화자의 상황은 새해의 난장판 한가운데서 마주친 나귀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나귀는 비록 무뢰한에게 예속된 '누추한' 짐승이지만, 자기 도리를 알고 묵묵히 길을 걸어간다는 점에서 등에 올라탄 무뢰한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화자로서는 굳세게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나귀에게 더욱 눈길이 갔을 것이다.

 

  하지만 감상에 젖을 겨를도 없이 화자는 '장난꾸러기'의 방해를 받는다. '내 알 바 없는 떨거지들'에게는 그가 한껏 멋을 낸 '신사'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화자의 눈에는 신품 양복에 감금당한 '으리으리한 바보'요, 나귀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노예일 뿐이다. 그런 그가 안 그래도 시달리고 있는 나귀를 대놓고 조롱하며 만족해 하고 있으니, 화자로서는 어찌 울화가 치밀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화자는 신사의 재롱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귀의 의연함을 보며 끝내 화를 삭혔을지도 모른다. 결국엔 그 모든 것 역시 화자가 사랑하는 파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파리는 '치욕의 수도'이지만, 동시에 '지옥의 매력으로 끊임없이 나를 회춘시키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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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 Streetcar Named Desire" 연극을 보고 왔다.

실제 배우들의 공연이 아니고, 'NT Live'라고 하여 영국 국립극장(National Theatre)이 연극을 촬영해 전 세계 공연장과 영화관에 생중계 또는 앙코르 상영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역시 나는 영상보다 글을 좋아해서인지 극을 보면 볼수록 글로 읽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히 집에 와서 책을 검색해봤는데, 민음사 책 소개 중 다음 내용이 유독 눈에 띄었다.


B사
스텔라 시중을 드는 것이 기뻐서 그래요, 블랑쉬. 더 가정적인 기분이 되거든요.

민음사
스텔라 난 언니 시중을 들고 싶어. 그러면 친정에 있는 기분이야.

 

이 부분에 유난히 관심이 간 것은 아까 본 연극의 자막에서도 B사처럼 '가정적'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당 부분의 원문을 찾아봤다.

 

Stella I like to wait on you, Blanche. It makes it seem more like home.

 

과연 'home'이 '가정'의 의미로 쓰였을까 '친정'의 뜻으로 쓰였을까.

두 의미가 명백히 다르기 때문에 두 번역 중 하나는 틀린 것이라 할 수 있다.

해당 대사를 구글에 검색해 본 결과 해외 사이트에서 이런 글들을 찾을 수 있었다.

 

Stella has two lines that illustrate her past in Belle Reve: ⓐ'I like to wait on you, Blanche. It makes it seem more like home.' AND ⓑ'You never did give me a chance to say much, Blanche. So I just got in the habit of being quiet around you.'

(출처: https://www.theatrefolk.com/spotlights/analysis-and-exercise-a-streetcar-named-desire)

(졸역: "스텔라의 대사 중 두 군데가 벨 리브에서의 과거를 설명해준다. ⓐ(문제가 된 대사)와 ⓑ'언니는 내가 말을 많이 할 기회를 절대 안 줬지. 그래서 난 언니 곁에서는 조용히 있는 습관이 들었어.')

 

참고로 '벨 리브'는 두 자매가 어린 시절 살던 곳이다.

 

When Blanche first arrives at Stella's flat, in scene one, the conversation alludes to Blanche's overbearing nature (when the women were girls). "You never did give me a chance to say much, Blanche." Here, readers can assume that Blanche was very controlling, spoke a lot (probably even for Stella), and Stella clearly accepted it. 

In scene five, Stella states her liking of wanting on Blanche: "I like to wait on you, Blanche. It makes it seem more like home." Here, it seems as though Stella accepted her role as Blanche's "servant." She, Stella, probably accepted the fact that she lived in Blanche's shadow.

(출처: http://www.enotes.com/homework-help/there-anything-this-scene-which-suggests-462595)

* 여기서 중간에 나오는 'wanting'은 'waiting'의 오타로 보인다. 따라서 아래 졸역도 후자에 맞춰 하였다.

(졸역: 장면 1에서 블랑시가 처음 스텔라의 flat에 도착했을 때의 대사를 보면 (두 자매가 어렸을 당시) 블랑시의 독재적인 성격이 넌지시 드러난다. ⓑ. 여기서 독자는 블랑시가 매우 독단적이고 말이 많았으며, 스텔라는 분명 이를 받아들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장면 5에서 스텔라는 블랑시의 시중을 드는 걸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 여기서 스텔라는 블랑시의 "시중"으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아마도 블랑시의 그늘 아래서 살았단 사실을 인정한 것 같다.)

 

즉 두 글 모두 문제가 된 저 대사가 벨 리브에 살던 어린 시절 블랑시와 스텔라의 관계가 어땠는지를 암시하는 부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민음사 판처럼 벨 리브를 떠올릴 수 있는 단어로 옮기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B사나 오늘 내가 본 연극에서처럼 '가정'이라고 번역할 경우 그런 암시를 느낄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게 얼핏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행간의 의미를 이해하고 번역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 한 줄의 번역문만 봐도 번역의 질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내가 특히 문학 번역에 있어 프로 번역가보다 전공자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좋은 번역을 알린답시고 과제도 안 하고 이 늦은 시간까지 이 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참..

(심지어 다른 메이저 출판사에서는 별로 출간되지도 않았다. 그러모아봤자 아래 열거한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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