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꾸러기
보들레르
그것은 새해의 폭발이었다. 무수한 사륜마차가 가로지르고, 장난감과 봉봉과자가 번쩍거리고, 탐욕과 절망이 들끓는 진흙과 눈의 혼돈, 가장 완강한 고독자의 뇌수마저 어지럽히려고 마련된 대도시의 공인된 착란.
이 소동과 난장판의 한가운데서, 나귀 한 마리가 채찍으로 무장한 어느 무뢰한에게 시달리며 굳세게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나귀가 보도의 모퉁이를 막 돌려 할 때, 장갑이 끼워지고 에나멜 칠로 번들거리고, 넥타이로 끔찍하게 목이 조여, 완전 신품 양복 속에 감금당한 멋쟁이 신사 하나가 이 누추한 짐승 앞에 정중하게 절을 하고는, 모자를 벗어들고 말했다. "아름답고 복된 새해를 기원합니다!" 그러고는 내 알 바 없는 떨거지들 쪽으로 득의만만하게 고개를 돌렸다. 제 만족감에 그들이 칭찬이라도 얹어주기를 앙망하는 듯이.
나귀는 이 멋쟁이 장난꾸러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그래서 제 의무가 부르는 곳으로 계속해서 열심히 달려갔다.
나로 말하자면, 프랑스의 모든 재기를 고스란히 한몸에 끌어모은 것만 같았던 이 으리으리한 바보를 보며 측량할 수 없는 분노에 돌연 사로잡혔다.
- <파리의 우울>(황현산 역) 中
새해 첫날의 난잡함, 어느 무뢰한을 태운 나귀, 나귀에게 절하는 신사, 그리고 그에게 분노를 느끼는 화자. 별 생각 없이 시를 읽다 보면 마지막에 화자가 분노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이 사뭇 뜬금없게 다가온다. 도대체 화자는 신사에게 왜 화가 난 걸까.
사실 화자는 신사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불쾌한 상태이다. 눈처럼 희어야 할 새해 첫날은 이미 물질 만능 주의라는 진흙에 더럽혀진 지 오래고, 어리석은 대중은 이러한 혼란을 '공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방이 온통 이러하니 아무리 '가장 완강한 고독자'일지라도 머리가 지끈지끈할 수밖에.
이런 화자의 상황은 새해의 난장판 한가운데서 마주친 나귀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나귀는 비록 무뢰한에게 예속된 '누추한' 짐승이지만, 자기 도리를 알고 묵묵히 길을 걸어간다는 점에서 등에 올라탄 무뢰한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화자로서는 굳세게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나귀에게 더욱 눈길이 갔을 것이다.
하지만 감상에 젖을 겨를도 없이 화자는 '장난꾸러기'의 방해를 받는다. '내 알 바 없는 떨거지들'에게는 그가 한껏 멋을 낸 '신사'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화자의 눈에는 신품 양복에 감금당한 '으리으리한 바보'요, 나귀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노예일 뿐이다. 그런 그가 안 그래도 시달리고 있는 나귀를 대놓고 조롱하며 만족해 하고 있으니, 화자로서는 어찌 울화가 치밀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화자는 신사의 재롱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귀의 의연함을 보며 끝내 화를 삭혔을지도 모른다. 결국엔 그 모든 것 역시 화자가 사랑하는 파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파리는 '치욕의 수도'이지만, 동시에 '지옥의 매력으로 끊임없이 나를 회춘시키는' 곳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