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A Streetcar Named Desire" 연극을 보고 왔다.

실제 배우들의 공연이 아니고, 'NT Live'라고 하여 영국 국립극장(National Theatre)이 연극을 촬영해 전 세계 공연장과 영화관에 생중계 또는 앙코르 상영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역시 나는 영상보다 글을 좋아해서인지 극을 보면 볼수록 글로 읽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히 집에 와서 책을 검색해봤는데, 민음사 책 소개 중 다음 내용이 유독 눈에 띄었다.


B사
스텔라 시중을 드는 것이 기뻐서 그래요, 블랑쉬. 더 가정적인 기분이 되거든요.

민음사
스텔라 난 언니 시중을 들고 싶어. 그러면 친정에 있는 기분이야.

 

이 부분에 유난히 관심이 간 것은 아까 본 연극의 자막에서도 B사처럼 '가정적'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당 부분의 원문을 찾아봤다.

 

Stella I like to wait on you, Blanche. It makes it seem more like home.

 

과연 'home'이 '가정'의 의미로 쓰였을까 '친정'의 뜻으로 쓰였을까.

두 의미가 명백히 다르기 때문에 두 번역 중 하나는 틀린 것이라 할 수 있다.

해당 대사를 구글에 검색해 본 결과 해외 사이트에서 이런 글들을 찾을 수 있었다.

 

Stella has two lines that illustrate her past in Belle Reve: ⓐ'I like to wait on you, Blanche. It makes it seem more like home.' AND ⓑ'You never did give me a chance to say much, Blanche. So I just got in the habit of being quiet around you.'

(출처: https://www.theatrefolk.com/spotlights/analysis-and-exercise-a-streetcar-named-desire)

(졸역: "스텔라의 대사 중 두 군데가 벨 리브에서의 과거를 설명해준다. ⓐ(문제가 된 대사)와 ⓑ'언니는 내가 말을 많이 할 기회를 절대 안 줬지. 그래서 난 언니 곁에서는 조용히 있는 습관이 들었어.')

 

참고로 '벨 리브'는 두 자매가 어린 시절 살던 곳이다.

 

When Blanche first arrives at Stella's flat, in scene one, the conversation alludes to Blanche's overbearing nature (when the women were girls). "You never did give me a chance to say much, Blanche." Here, readers can assume that Blanche was very controlling, spoke a lot (probably even for Stella), and Stella clearly accepted it. 

In scene five, Stella states her liking of wanting on Blanche: "I like to wait on you, Blanche. It makes it seem more like home." Here, it seems as though Stella accepted her role as Blanche's "servant." She, Stella, probably accepted the fact that she lived in Blanche's shadow.

(출처: http://www.enotes.com/homework-help/there-anything-this-scene-which-suggests-462595)

* 여기서 중간에 나오는 'wanting'은 'waiting'의 오타로 보인다. 따라서 아래 졸역도 후자에 맞춰 하였다.

(졸역: 장면 1에서 블랑시가 처음 스텔라의 flat에 도착했을 때의 대사를 보면 (두 자매가 어렸을 당시) 블랑시의 독재적인 성격이 넌지시 드러난다. ⓑ. 여기서 독자는 블랑시가 매우 독단적이고 말이 많았으며, 스텔라는 분명 이를 받아들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장면 5에서 스텔라는 블랑시의 시중을 드는 걸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 여기서 스텔라는 블랑시의 "시중"으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아마도 블랑시의 그늘 아래서 살았단 사실을 인정한 것 같다.)

 

즉 두 글 모두 문제가 된 저 대사가 벨 리브에 살던 어린 시절 블랑시와 스텔라의 관계가 어땠는지를 암시하는 부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민음사 판처럼 벨 리브를 떠올릴 수 있는 단어로 옮기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B사나 오늘 내가 본 연극에서처럼 '가정'이라고 번역할 경우 그런 암시를 느낄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게 얼핏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행간의 의미를 이해하고 번역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 한 줄의 번역문만 봐도 번역의 질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내가 특히 문학 번역에 있어 프로 번역가보다 전공자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좋은 번역을 알린답시고 과제도 안 하고 이 늦은 시간까지 이 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참..

(심지어 다른 메이저 출판사에서는 별로 출간되지도 않았다. 그러모아봤자 아래 열거한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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