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틀면, 이곳은 - 도쿄의 감각을 만드는 공간과 음악 브랜딩
도쿄다반사 지음 / 컴인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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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도쿄의 주요 카페, 공간 음악을 소개한다. 굉장히 스타일리시하다. 디자인도 그렇고, 내용도 마찬가지다. 추천사에 음악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책에서 음악이 들리고, 커피향이 나는 것 같다. 그만큼 감각적으로 잘 만든 책이다.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을 갈 수 없는 지금, 자꾸 이런 책을 찾게 되는 것은 확실히 아쉬운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서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든다.


 나도 도쿄에 종종 출장을 간 적이 있지만, 여러 가지 모습이 혼재한 곳이다. 그것이 바로 이 도시의 매력이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들이 진보초에 공존하는 것처럼, 도쿄를 구성하는 23구의 행정 구역이나 도쿄의 대표적인 번화가들도 과거부터 현재까지 각 시대의 요소들이 중첩되어 고유한 지역의 특색을 보여줍니다.” - p13 


 우선 저자가 추천하는 첫 번째 음악은 피치카토 원의〈NONSTOP TO TOKYO〉다. 확실히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다. 이 밴드의 곡을 30년에 걸쳐서 발표한 고니시 야스하루의 음악도 좋았다. 일본 퓨전 밴드 중에 카시오페아, T-Square 를 제외하고는 잘 몰랐는데, 피치카토 원의 음악은 또 다른 편안함이었다. 저자는 그의 매력에 빠져서 에세이뿐만 아니라 그가 추천하는 음반, 영화 등을 즐겨 찾아서 볼 정도였다.


 언젠가 편하게 도쿄의 거리를 걸으면서 다시 한 번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롯폰기와 아오야마의 주변 거리는 주일 미군과 외국 공관들을 위한 상점과 음식점 등이 생기면서 이국적인 분위기, 새로운 콘셉트의 공간이 등장했다. 그러면서 유명 연예인, 뮤지션 등 예술인들이 이 거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바로 ‘시티팝’이라고 한다. 

 최근 뮤지션 김현철도 시티팝으로 구성된 앨범을 내서 많은 각광을 받았다. 시티팝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저자의 설명이다. 


 “시티팝의 무대는 바로 ‘도쿄’입니다. 그것도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와 함께 변모한 ‘새로운 도쿄’의 분위기를 담고 있어요.” 


 시티팝을 들으면, 확실히 유쾌한 기분이 든다. 도시의 네오사인, 화려한 조명 등이 연상된다. 저자가 추천한 1979년 Mariya Takeuchi의 앨범〈Dream Of You〉도 펑키하면서 상쾌하다. 1977년 Taeko Ohnuki의 앨범〈Sunshower〉도 마찬가지다. 70년 대 말, 80년대의 도시 분위기를 마음껏 느낄 수 있다. 


 히비야 공원도 저자가 추천하는 곳이다. 1903년에 개장했는데 도쿄 최초의 서양식 근대 공원이라고 한다. 이 공원이 위치한 마루노우치에는 초고층 빌딩들이 많기 때문에 분주한 평일보다는 주말에 느긋하게 걷기에 좋은 지역이다. 나도 예전에 이곳에 미팅을 간 적이 있는데 확실히 대도심의 면모를 보여주는 곳이다. 무엇보다 100년이 넘은 레스토랑인 ‘마츠모토로’는 카레와 커피를 마시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1층은 통유리창으로 야외 테라스석도 있어서 숲속에서 식사를 하는 기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글만 읽어도 상상이 되고, 가고 싶은 기분이 든다. 카레를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시티팝까지 들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히비야 공원의 매력은 바로 야외 음악당이다. 저자는 이곳에서 카시오페아의 데뷔 20주년 공연을 관람했다. 석양이 드리워지는 저녁 시간 가족 단위의 관광객, 자유롭게 맥주와 도시락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저자가 묘사한 광경이 나의 눈앞에도 펼쳐지는 것 같다. 


 “히비야 공원은 앞의 구 개 공원에 비해 크기가 작음에도(약 5만 평) 야외 음악당이 2개나 있습니다. 먼저 대음악당은 1923년 완공한, 도쿄에서도 유서 깊은 야외 공연장이에요.” - p41


 킷사텐이라는 카페도 인상적이다. 일종의 음악다방 같은 곳으로 역사가 길다. 커피는 기본이고, 손님을 살피는 마스터의 세심함이 인상적이라고 한다. 손님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주기도 한다. 

 저자는 이곳의 매력이 “커피 맛, 편안한 분위기, 내성적이지만 세심한 마스터 그리고 이것을 수용하고 따라주는 감각 있는 손님들”이라고 말한다.


 이뿐만 아니라 가이엔마에의 J-COOK, 미나미아오야마의 츠타 커피점, 시부야의 사테이 하토, 긴자의 웨스트 등 동네 친화적이면서 편한 공간, 카페 등을 만날 수 있다. 도쿄에 가면 적어도 스타벅스 보다는 이런 오래된 공간에 가서 음악을 듣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외에도 저자가 추천하는 카페, 재즈바, 공간 등은 너무나 많다. 저자의 오랜 공력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다양한 공간과 추천 앨범도 같이 소개한다. 추천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으면 책의 매력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의 전작인《도쿄의 라이프스타일 기획자들》도 한 번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코로나19로 답답한 지금, 더군다나 4단계로 격상된 지금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피서는 이렇다. 집에서 에어컨이나 선풍기 틀고,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마신다. 시티팝 또는 카시오페아와 같은 퓨전 재즈의 음악을 듣고, 이 책을 읽는 것이다. 


 - 한 줄 요약 : 도쿄의 카페, 재즈바, 공원 등 다양한 공간과 시간, 음악을 알고 느낄 수 있다.

 - 생각과 실행 : 인생을 즐기는 좋은 방법은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찾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공간, 그리고 음악, 시간은 무엇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 이번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으로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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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국제 이슈 -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개정판 최소한의 지식 시리즈
이수민.양성모.연유진 지음 / 꿈결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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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평소에 나라 밖 소식에 관심이 없던 이들도 복잡다단한 세계의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적었다.” 


《최소한의 국제이슈》는 개정판이다. 2018년에 출간된 이래로 새롭게 변화된 사항이 많기 때문에 그러한 내용을 책에 담았다. 대표적으로 코로나19, 비트코인, 이상기후 등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국제이슈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과거에 우리나라는 세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흥선 대원군이 1871년에 전국 200여 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외세의 침략에 맞서서 나라의 대문을 걸어 잠그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비극은 시작 된지도 모른다. 일본에서의 메이지 유신을 통한 사회대변화는 이보다 3년 앞서 시작되었다.


 150여 년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그리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가 결집되어서 지금 이 순간이 되었다. 전 세계 GDP 순위는 10위다. 인구는 26위이고, 영토크기는 109위다. 이 좁은 땅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한류는 전 세계의 문화적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거기에는 도전과 변화를 즐기는 민족성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 경제에 관심이 많다. 직장인뿐만 아니라 가정주부도 안테나를 곤두세우고 있다. 수많은 정보들이 동네 카페(인터넷)나 SNS 등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이러한 빠른 정보력 때문인지 백신 접종률도 으뜸이다.(물론 충분치 않은 백신이 아쉽지만 말이다.)


 반면, 문제도 있다. 잘못된 정보도 너무 많다. 검증되지 않은 내용들이 공유되면서 마치 진실인양 왜곡된다. 그러한 것들이 수많은 불행을 양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뉴스를 제대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여러 가지 국제이슈를 쉽게 설명한다. 단편적인 기사를 읽더라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면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자본이 작동하는 방식, 2부는 21세기가 마주친 사회의 면목들, 3부는 미래를 지켜라 이다. 


 1부는 사람들이 관심 있는 돈에 대한 이야기다.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내용도 있다. 2부는 주요 사회적 이슈인데 코로나19를 비롯해서 고령화, 난민 등에 대한 이슈를 다룬다. 3부 미래는 테러, 기상이변 등에 대한 것이다. 


 처음의 주제는 묵직한 ‘금융 위기’로 시작한다. 무엇보다 저자의 설명방식이 쉽고 재미있다. 이중에서 유럽중앙은행이 500유로 지폐를 없앤 배경이 흥미롭다. 사람들이 은행에 예금을 하면 오히려 보관료를 지불하는 마이너스 금리 상황이라서, 현금을 집에 쌓아두었다고 한다. 500유로는 한 장에 거의 60만원이 넘는 고액권이다. 1억 원도 고작 150장이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500유로를 없앴다고 한다. 일본도 마이너스 금리로 인해서, 금고 판매량이 증가했다. 여전히 많은 일본 가정에서는 현금을 금고에 보관해두고 있다.


 사실 제로금리는 양적완화를 통해서 시중에 돈을 풀고, 사람들의 소비를 유도하면서 경기를 살리기 위한 정책이다. 그런데 소비심리가 너무 악화되면 은행에 예금만 하고 돈이 풀리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은행에 돈을 넣으면 보관료를 내는 마이너스 금리까지 생긴 것이다.


 “양적완화, 제로와 마이너스 금리, 고액권 폐지 등 각국 중앙은행들이 내놓은 기상천외한 정책들 덕분일까? 세계경제는 2016년을 고비로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 p30 


 이제 문제는 ‘출구전략’을 어떻게 구사하느냐다. 사람들은 연일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 언제쯤 본격적으로 금리를 올리냐가 가장 큰 관심사다. 


 요새 이슈가 되는 ‘환율 전쟁’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많은 나라들이 자국 돈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경쟁한다. 외환시장에 자국의 돈을 많이 공급하는 방법이다. 

 인위적으로 많이 가치를 떨어진다는 것은 상대방의 통화대비 환율이 오르기 때문에, 수출 경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서 $1에 1,000원이 환율이 올라서 1,500원이 된다면 수출 제품을 원화로 환산하면 환율로만 1.5배를 번 셈이다. 


 미국은 이러한 나라를 ‘환율 조작국’으로 분류하고 그 기준이 있다.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2018년 7월을 기해서 중국산 수입품에 대해서 25퍼센트의 관세를 매겼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자유무역에 대한 회의론으로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서려고 하지만, 과연 그것이 해답일지 의문시된다. 이미 세계는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저자도 이점에 대해서 같은 질문을 한다.


 “결국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는 곧 보호무역주의가 가져올 결과물을 보며 빈곤층 급증의 책임을 무역 상대국에 돌리는 것이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p60 


 블록체인의 위력도 앞으로 더 커질 것 같다. 비트코인은 블록체인의 기술을 사용하는데, 이는 복제가 불가능하고, 은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미국 국내총생산의 21퍼센트가 중개 업무를 수행하는 신용 산업에 기반하며 이 일들이 모두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서 자동화될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블록체인은 기존의 관행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저자는 비티코인이 돈이라기보다는 상품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그만큼 규정이 애매한 화폐(?)다. 그래도 이를 단순히 네덜란드의 튤립 거품에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나는 주로 경제부문에 관심이 있어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읽었지만 다른 사회, 역사 문제도 꽤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다. 무엇보다 저자의 쉬운 설명으로 그동안 막연했던 개념들이 잘 잡혔다. 국제 정치, 역사, 사회, 경제 이슈 등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이뿐만 아니라, ‘최소한 ~ ’ 시리즈는 과학, 인문학, 경제 법칙 등 다양하다. 


 - 한 줄 요약 : 중요한 국제이슈에 대해서 쉽게 설명한 책이다. 

 - 생각과 실행 : 세상의 변화를 아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뉴스를 가볍게 볼 것이 아니라, 좀 더 깊게 파고 들어서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그래야 나만의 인사이트를 가질 수 있다. 


 * 이번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으로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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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나침반 역사 속의 위인들 - 외교관의 눈으로 보고 역사학도의 발로 쓴 역사, 리더십 지침서
이강국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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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 저자는 최치원 선생, 서희 장군, 김윤후 장군,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정약용 선생, 김구 주석, 이승만 박사를 다룬다. 이중에서 승장 김윤후는 잘 몰랐던 인물이고,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김구 선생은 아마 한국 사람들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 선생을 존경한다.


 이승만 박사가 여기에 포함된 것은 다소 의외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저자는 공과 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이 책에 그를 포함시켰다고 한다. 시작은 괜찮았지만 끝이 좋지 않은 인물이다. 또한 그에 앞서 김구 선생을 소개함으로써 현대사의 인물에 대해서 공정성을 보이려고 했다. 

 

 “장기 독재를 꾀하면서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은 씻지 못할 커다란 과오로서 비난받아 마땅하고 재발되지 않도록 계속 교훈과 경계로 삼아야 한다.” - p537


 저자는 외교관 출신이다. 주로 중국에 오랫동안 머물렀기 때문에 기존에《상하이 자유무역시험구》,《서안 실크로드 역사문화 기행》등 중국 관련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 


 대한민국의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을 소개해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 책을 선택했다.


 고운 최치원 선생(857년 ~ ?)은 그야말로 똑똑한 인재다.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당나라의 장안으로 유학 후 벼슬자리까지 했다. 그가 지은〈토황소격문〉(881년)은 지금도 명문장으로 남아있다. 반란군 황소가 이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한 신라의 국운을 위해서〈시무십여조〉의 개혁안도 올렸다. 아쉽게도 이 개혁안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당시 신라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새로 알게 된 것은 그의 어린 시절이다. 그는 고작 12살의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고, 온갖 험한 여정을 겪은 후 장안에 도착했다. 6년 동안 불철주야로 공부한 끝에 진사시 ‘빈공과’(외국 유학생을 위한 시험)에 장원급제했다. 이후 이부에서 치른 신언서판 시험(풍채와 용모, 말솜씨, 글씨, 판단력) 시험에도 합격했다. 876년 그는 20세의 나이에 현위가 되었다. 현위는 종9품의 관직이다. 이어서 고변이라는 절도사 밑에서 종6품 ‘도통순관’(군령을 작성하는 업무)에까지 지위가 상승했다. 

 

 그는 17년 만에 신라로 돌아와서 6두품으로 최고인 ‘아찬’의 관직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신라 말기, 왕권의 약화와 귀족의 세력 강화로 뜻을 펼치지 못하고 42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은거했다. 그가 만약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났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훨씬 더 풍성해졌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유학자와 문인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쌍계사의 〈진감선사 대공탑비〉로 그의 비문이 남아있다. 즉, 그는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에 대한 풍류를 모두 제시했다. 


 서희 장군(942년 ~ 998년)에 대해서도 이번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업적을 되새기게 되었다.

 거란은 송을 공격하기 전에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고려에 대한 대공세에 나섰다. 그들은 80만 명의 대군을 데려왔다고 주장했다. 이는 나중에 과장된 것이라고 판명되었다. 

 어쨌든 이에 겁먹은 대신들은 항복하거나 땅을 떼어주고 강화를 요청하는 할지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서희는 반대했다. 처음부터 너무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만큼 상대방의 요구 수준도 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 항전 후 협상책’을 제시했다. 당시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있던 서희 장군은 거란족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냉정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서희는 외교관으로 담판을 짓기 위해서 적의 장수 소손녕과 독대했다. 소손녕 장군은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오히려 거란의 땅을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이 때는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서경에 도읍하였다. 만일 국경 문제를 논한다면 요 동경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범해 왔다고 말하는가?”


 서희 장군은 홀로 적진에 가서 담대하고 용기있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협상을 했다. 쌍방이 모두 윈윈할 수 있도록 가장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했다. 고려는 요 나라와 국교를 맺고 이들의 국호를 사용하기로 했지만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압록강 이남에 여진족들을 몰아내는데 명분을 얻고, 고구려의 후손임을 인정받았다. 덕분에 압록강 이남의 강동 6주를 차지한 고려는 이후 거란과의 2차, 3차 전쟁 때도 이를 충분히 활용하여 격퇴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2009년 외교통상부에서 그를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1호’로 선정했을까?


 이어서 고려를 침략한 몽골과의 항쟁도 40여 년간 지속되었다. 결국은 6차 항쟁 후 몽골에 패배했으나, 우리 선조들은 끈질기게 몽골을 괴롭혔다. 그리고 전투 중에서 승장 김윤후가 이끈 처인성의 승리와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의 사살(1232년)은 적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사나운 몽골군을 말이다. 


 “고려와 몽골 간의 6차에 걸친 전쟁 중에 몽골군 총사령관이 사살되면서 패퇴하여 철수한 것은 2차 전쟁이 유일하다.” - p115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복습했다. 특히 해전사 연구의 세계적인 대가 헐버트는 한산대첩을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라고 묘사할 정도였다. 


 서희 장군, 김윤후 장군, 이순신 장군은 나라가 전쟁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서 헌신했다. 최치원 선생은 망해가는 나라를 염려하여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은거했고, 다산 정약용 선생은 정치적 모함으로 귀양을 갔으나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김구 선생은 분열된 나라를 위해서 온몸을 바쳐 희생했다. 유일하게 왕 중에서 이름을 올린 세종대왕은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이승만 박사는 뛰어난 업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6.25 전쟁 발발 시 거짓으로 국민을 속이고, 먼저 도망간 것에 대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조선시대 선조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나침반 역할을 한 인물들을 잘 살펴볼 수 있었다.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내용이 알차고, 이해하기 쉽게 잘 쓰여 있다. 


 - 한 줄 요약 : 우리나라의 주요 위인들을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 생각과 실행 :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사람은 위인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위인은 누구일지 생각해본다. 과연 국민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까? 


 * 이번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으로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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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하) - 중세의‘압도적 선구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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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권의 시작은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동맹군과의 전쟁 후를 다룬다. 동맹의 중심에 있던 밀라노 측에 남은 자치도시는 알레산드리아, 피아첸차, 브레시아, 볼로냐까지 4개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완전히 백기를 들지 않았다. 그들은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5천 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남은 병력은 여전히 1만 3천 명이나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여전히 자치도시(코무네)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들은 강력한 황제의 권한에 도전했고, 봉건시대의 지방자치권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이는 황제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북부 이탈리아까지 포함한 자신의 제국, 즉 신성로마제국을 정치, 외교, 군사, 사법, 경제까지 아울러 황제에게 최종 결정권이 있는, 법에 근거한 중앙집권국가로 바꾸겠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 p26 


 프리드리히 황제는 반 황제 연합군 중의 하나인 브레시아 지역을 공격했으나, 몇 개월의 성공방전을 치르고 함락하지 못했다. 그가 승리를 하지 못하자 교황청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고 믿는 교황 그레고리는 프리드리히 2세를 2번이나 파문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그가 ‘이단’이라는 것이다. 사실 프리드리히 황제는 이슬람인과도 잘 어울렸고, 이들을 자신의 호위병사로 두었다. 이슬람인도 자신을 보호해주는 황제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충성을 다했다. 이는 그가 어릴 적 시칠리아 섬에서 많은 아랍인들을 만나면서 편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뛰어난 외교술과 이슬람인과의 친화력을 잘 활용한 것이 바로 6번째 십자군 원정이었다. 그는 무력보다는 외교를 통해서 예루살렘을 다시 그리스도교의 품에 안겨주었다. 이는 그전에 수많은 왕들이 하지 못했던 일이다. 참고로 7번째 십자가 원정을 간 프랑스의 루이왕은 왕을 포함해서 전군 2만 5천명이 포로가 되고,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그만큼 십자가 원정은 힘든 여정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6번째 십자군 원정을 가는 도중에 두 번째 파문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그를 수행하던 템플, 병원, 튜턴 기사단은 교황의 말을 따르지 않고 황제와 함께 했다. 


 “프리드리히가 이끌고 출발한 제6차 십자군은 군을 이끄는 황제부터 그를 따르는 베라르도 이하 참가자 전원이 파문당하는 기묘한 십자군이 되었다.” - p110 


 이런 표면적으로 ‘이단’이라는 것 외에 파문을 한 더 큰 이유는 자신에게 불손하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교황의 밑에 있다고 믿었던 것이 그 당시 중세시대 사고방식이었다. 황제는 현세를 책임지지만, 교황은 더 중요한 내세를 책임지기 때문에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절대 굴하지 않았다. 세 번째 파문을 당했을 때는 반박문을 써서 전국에 마을에 모두 돌려서 사람들이 직접 보도록 했다. 이쯤 되니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추기경들도 교황이 너무 심하게 권한을 남용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프리드리히 황제가 45세, 그레고리 교황이 70세가 되었을 때다.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보기에는 프리드리히는 완벽한 이단자고, 그런 그를 배척하는 일은 공의회에서 토론할 가치가 있는 의제다.” - p57 


 프리드리히는 북부 이탈리아 일부 자치도시 코무네의 반란, 교황과의 갈등에 의한 세 번째 파문 등으로 어려움에 쳐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 때의 프리드리히를 ‘교향악의 지휘자’로 묘사할 정도로 이 황제는 안과 밖을 모두 잘 조율했다. 


 우선 자신의 아들과 심복들도 북부 독일과 남부 이탈리아를 관리, 감독했다. 이어서 영국과 프랑스와 동맹을 통해서 외부의 침략을 막았다. 또한 술탄인 알 카밀이 죽자, 그의 아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예루살렘의 통치를 10년 더 연장시켰다. 그의 뛰어난 외교술과 용인술이 또 한 번 빛을 발한 순간이다. 


 그는 결코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자신의 정적들의 목줄을 죄었다. 황제는 교황이 그를 축출하기 위해서 소집한 공인회를 무산시켰다. 거기에 참석하기로 한 성직자들을 모두 바다에서 납치한 것이다. 이를 멜로리아 해전이라고 한다. 이어서 그는 대담하게도 교황이 다스리는 영지에 군대를 이끌고 접근했다. 실제 공격을 한 것은 아니지만 위협이 되기에 충분했다. 궁지에 몰린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황제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교황 인토켄티우스 4세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에 대한 반발심을 갖고 있었고, 그와 미팅을 잡은 뒤에 도망쳤다. 그리고 프랑스로 망명을 갔다. 


 교황과의 끊임없는 갈등을 통해서 그가 얻으려고 한 것은 하나였다. 성직자들은 영혼의 구제에 충실하면 되고, 세속 통치자들은 현재의 육신의 구제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각자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고, 서로 간섭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한 마디로 교황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대한 반발이다. 


 그가 추구한 것은 결국 법치에 기반한 평화로운 국가의 건설이었다. 그래서 국립학교를 세우고, 법률을 재정비하고,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을 포용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서 암흑의 중세기는 종말을 고하고, 르네상스 시대로 더 빨리 이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황제 프리드리히가 목표로 한 것은 법에 근거한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운 국가의 건설이다. 거기에는 성직자보다 ‘배움’이 없는 제후를 비롯한 일반 세속인들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 p156 

 

 그는 신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관심이 더 컸던 황제다. 시오노 나나미 작가가 왜 프리드리히 2세에 매력을 느꼈는지 알 것 같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양의 과거 통치자 중에서 과연 이렇게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람이 있었을까? 우리나라에는 세종대왕 정도이지 않을까? 


 이 책은 서양 역사, 리더십 등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다.  


 - 한 줄 요약 : 프리드리히 2세의 교황과 갈등, 신성로마제국의 강력한 통치, 법률화 등 업적을 다룬다. 

 - 생각과 실행 : 프리드리히 2세는 법치에 대한 열의, 자신이 믿는 소신을 지키는 용기, 공정함, 지적 탐구심 등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다. 무엇보다 무력보다는 주로 외교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마음, 그리고 다양한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서 마음을 끌어들였다. 기존의 잘못된 관습에 도전하는 그의 열정도 배울 만 하다. 


 * 이번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으로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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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상) - 중세의‘화려한 반역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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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오노 나나미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가 그것이다. 이미 그녀는 1982년《바다의 도시 이야기》, 1992년부터《로마인 이야기》로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명성이 높다. 그녀는 겉모습은 일본인이지만, 마음과 영혼은 이탈리아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오랜 시간 이탈리아에서 거주 중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작가가 오래 전부터 쓰고 싶었던 주제라고 한다. 마치 마음의 빚처럼 남아 있다가 드디어 집필에 들어갔다. 무려 45년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특히 이 책은 중세 말부터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시기를 다루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황제 프리드리히 2세야말로, 중세에 살면서 르네상스의 문을 연 사람들이다.” - p27 


 저자가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서 쓴 계기도 흥미롭다. “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냥 마음이 가는 남자라.”는 것이 이유다. 아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저자를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다. 


 저자가 처음 역사에 대한 글을 쓴 것은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르네상스 시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8세기경의 로마에 대한 이야기로 점프했다가, 다시 중세 시대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저자가 밝힌 바와 같이 그녀가 쓰는 중세 시대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라고 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독일 국왕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아버지 하인리히 6세가 돌연 사망한 것이었다. 서른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였다. 사인은 말라리아였다고 한다. 

 그의 부인, 즉 프리드리히 2세의 어머니, 콘스탄체는 노르만 왕조의 유일한 후계자로 시칠리아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둘이 결혼하면서 하인리히 6세가 자연스럽게 시칠리아 왕국도 통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황제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콘스탄체는 어떻게든 황위를 지켜서 아들에게 물려줘야했다. 이 때 그녀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새로 즉위한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에서 왕위를 인정해주면 독일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녀는 애초부터 거친 독일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아이가 따뜻한 이탈리아 남부에서 성장하기를 원했다. 


 마침내 프리드리히는 1198년 5월 17일, 시칠리아 왕이 된다. 불과 세 살의 나이에 말이다. 그리고 그가 네 살이 될 때 그의 어머니 콘스탄체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마흔의 나이에 유일한 아이를 임신하고, 마흔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또 한 번 중요한 결정을 했다. 그의 후견인으로 로마의 교황 노켄티우스 3세를 정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녀는 시칠리아 왕국을 교황의 영유지로 기꺼이 인정하고 내놓았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우선 든든한 후견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 교황만큼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교황의 그림자는 그에게 큰 힘을 줬다. 물론 프리드리히는 이를 별로 반기지 않았다.


 시칠리아의 왕국, 섬에서 자유분방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그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문화를 익혔다. 당시 시칠리아 왕국에는 선대 황제가 데리고 온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이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프리드리히를 차지하려고 했다. 


 “두 파 모두 아직 미성년인 프리드리히를 수중에 넣어 섭정이 됨으로써 시칠리아 왕국 전체로 세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 p41 


 프리드리히는 결코 만만치 않은 아이였다. 10여 년간 혼자 공부하면서 다방면의 학문을 익혔다. 무술실력도 갈고 닦아서 보통 이상의 수준이 되었다. 무엇보다 왕으로서 권위를 제대로 보여줘서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줬다. 


 로마 교황은 점점 야생마처럼 변해가는 프리드리히를 견제하기 위해서 정략결혼도 시키고, 서른세 살의 베라르도 대주교를 열여섯 살의 프리드리히 곁에 뒀다. 하지만 모두 통하지 않았다. 열 살 많은 그의 부인은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고, 특히 그녀가 스페인에서 지참금(?)으로 데려온 5백 명의 기사는 큰 힘이 되었다. 베라르도 대주교도 그의 평생 파트너가 되었다.


 그는 독일에 있던 라이벌 작센공 오토와 대결하고 각 봉건 영주들의 충성심을 확인해야 했다. 단 10명의 시종을 데리고, 시칠리아에서 이탈리아를 건너서 독일까지 건너간 그의 용맹함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반황제파에 의한 납치극에서도 벗어났고, 목숨을 건 여정을 했다. 


 그의 저돌적인 여행은 성공했다.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는 십자군 원정에서 용맹을 떨쳤다. 다른 제후들은 그에게서 할아버지의 용맹한 모습을 본 것 같다. 


 “그들은 눈앞에 나타난 열일곱 살이 22년 전 십자군 원정 중 오리엔트에서 죽은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직계임을 새삼 떠올렸다.” - p72 


 1권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의 6차 십자군 원정, 그레고리 9세 교황과의 대결, 그리고 2차례의 파문, 반 황제파인 북부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동맹군과의 전투를 다룬다. 


 이 모든 대결을 승리로 이끈 프리드리히 2세는 명실공이 최고의 황제로 군림한다. 그가 마흔을 넘었을 때다. 알프스를 경계로 북부 지역, 즉 독일, 남부 지역 이탈리아를 모두 손아귀에 쥐었다. 로마 교황이 제일 우려하던 상황이 결국 벌어졌다. 지나친 황제의 권한 강화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최초의 국립대학인 나폴리 대학, 그리고 법치국가 실현 등 다양한 치적을 쌓았다. 특히 그는 어릴 적부터 다문화, 다언어를 접하면서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집권제를 통해서 봉건제도를 무너뜨렸다. 중세시대를 끝낸 배경에는 그의 이와 같은 사고 방식 덕분이었다. 


 - 한 줄 요약 :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2세의 어린 시절, 중년 시절을 다룬다.

 - 생각과 실행 : 프리드리히 2세는 대담하고 용감하면서,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가졌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로마 교황과 갈등이 있었지만 이를 슬기롭게 헤쳐 나갔다. 왕권이 약했던 중세 시대를 벗어나서,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법치주의 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학문과 예술에도 높은 관심을 보여서 신성로마제국의 전성기를 마련했다. 특히 그동안 적대적이던 아랍권과 평화를 유지하고, 본인도 아랍어를 능수능란하게 하면서 호감을 살 수 있었다. 


 * 이번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으로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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