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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제 - 중국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다 ㅣ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요시카와 고지로 지음, 장원철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1년 4월
평점 :
최초의 통일 제국 진나라가 10여년 만에 허망하게 몰락한 후 유방이 숙적인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웠다. 그 후로 한 나라 4대 황제의 후손인 한 무제(기원전 141년 ~ 87년)는 한 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려 54년의 치세였다.
“무제가 천자 자리에 있은 것은 54년에 걸친 기간이었지만, 이는 오히려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오랜 재위 기간, 무제의 일관된 정책은 내재된 여러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 p8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추상적인 이야기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자했다. 사실 무제가 이룬 업적은 선대 황제, 문제와 경제의 백성을 위한 치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국고는 돈으로 넘쳤고, 백성들도 태평성가를 부를 정도였다. 이때를 ‘문경지치’라고 하고, 중국의 요순시대에 필적한다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무제의 아버지 경제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불과 16세의 나이에 황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할머니인 두 태후, 고모인 관도 장공주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치지 못했다. 특히 무제는 고모의 딸과 혼인을 하면서 진 황후의 간섭도 무시 못했다.
두 황후와 가장 큰 마찰은 바로 ‘유학’이었다. 한 무제는 공자가 제창하는 ‘이상주의’ 학문인 유학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두 황후는 노자의 사상을 신봉했고, 한 나라의 초기부터 이 사상을 믿어왔기 때문에 유학자에 대한 반감이 컸다. 한 나라를 세운 유방조차도 유학자의 갓에 오줌을 눌 정도로 이들을 푸대접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총명한 한 무제는 유학이 바로서면 황권도 강화될 수 있다고 여겼다. 유학은 본시 과거의 선례를 본받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예전 ‘주나라’ 시대로 돌아가서 왕이 중심이 되는 이상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마침내 두 태후는 그가 스물두 살이 될 때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유학자들을 직접 등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남방의 복건으로 원정을 보내면서, 본격적인 영토 확장 정책을 시행했다. 외척 세력도 스스로 무너지면서 자신의 뜻을 펼치게 되었다.
그는 위자부라는 가희를 만난 후 세 명의 황녀를 두었고, 그녀의 동생 ‘위청’을 등용했다. 위청은 성공한 인재 발탁이었다.
“이 청년이야말로 훗날 수차례에 걸친 흉노 정벌의 총지휘관이 되어서, 무제가 통치하는 한 제국의 위력을 북방에 떨치게 되는 대장군 위청, 바로 그였던 것이다.” - p44
반면 본처인 진 황후는 몰락의 길로 빠져들다가 한 무제 즉위 12년째인 원광 5년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무제의 나이로 치자면 스물여덟 살에서 서른여덟 살에 이르는 기간에, 위청은 일곱 차례나 장성을 넘어 흉노를 공격했고, 매번 승리를 거두었다.” - p91
기원전 128년에서 117년까지, 무제가 스물아홉에서 마흔 살에 이를 때, 연호는 원삭과 원수로 불렸다. 이 때는 그는 근친 세력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화려한 치세를 펼쳤다. 스물아홉에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 위자부가 황자를 출산했고, 정식으로 황후가 되었다.
앞서 언급한 위자부의 동생 위청은 흉노를 정벌하면서 한나라의 위세를 떨쳤다. 사실 흉노의 세력은 중원이 혼란기에 빠지면서 거침없이 커져갔다. 심지어 초대 황제 유방이 사망한 후 그의 부인 여황후가 정권을 잡았을 때, 흉노의 왕, 묵돌선우는 같이 외로움을 나누자는 무례한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이들을 공격하기에 흉노의 세력은 막강했다. 기병으로 이루어진 흉노의 병사들은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하면서 변방도시를 침범했다. 유방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서 30만 대군을 이끌었지만 이들에게 포위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 때 유방은 간신히 그곳을 탈출해 남쪽으로 돌아갔다. 이를 ‘평성의 치욕’이라고 부른다. 이 후 제 3대 문제, 제 4대 경제는 흉노족에게 화평책을 쓰면서 공격보다는 수비 위주로 하고, 회유책을 썼다.
한 무제는 이러한 외교정책이 굴욕적이라고 생각했지만, 흉노족을 무찌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위청이 새로운 전법을 구사하면서, 흉노족에게 승리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위청뿐만 아니라 그의 조카인 곽거병의 활약은 더욱 놀라웠다. 곽거병은 그의 삼촌의 전공을 능가하면서 불과 열여덟 살의 나이에 제후에 봉해졌다. 또한 한 무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이렇게 위청과 곽거병은 한 무제에게 듬직한 양팔이 되어주었다.
“위청과 곽거병, 이 두 사람은 무제의 시대를 통틀어 가장 눈부시게 활약했던 장수들이다. 또한 무제의 신임을 가장 두텁게 받았던 무인이었다.” - p121
한 무제의 전성기에는 영토 확장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친정에 나선 후 본격적으로 유학자들을 뽑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바로 동중서라는 인물이 있다. 그가 무제가 출제한 시험 문제에 대한 답안은《한서》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무제가 낸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상사회를 재현할 수 있는가?”이고, 동중서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학문적 교양을 가진 인간이 관리가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학문은 ‘역, 서, 시, 예, 악, 춘추’와 같은 유계를 일컫는 것이다. 육예와 공자의 ‘도’에 합치하지 않은 사상은 배척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무제는 그의 진언을 채택했다. 이로서 중국 사회는 유학이 기본 이념이 되면서 2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전해지게 된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푸는 것이 하나의 기본 도리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지금도 유효하다.
유가 사상을 갖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은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국민들의 행복과 안녕을 추구하라고 교육시킨다.
지극히 맞는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이념이 절대적인 것처럼 굳어버린 것은 아쉬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입신양명’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으면서 누구나 관리로서 성공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연 그대로’를 설파한 노자의 ‘무위자연’은 한 나라의 초기 건국이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잊혀졌다.
군신간의 관계는 결국 상명하복이 되면서, 조직을 안정화시켰지만 세상을 너무 단조롭게 만들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또한 잘못된 군주에 대한 충성은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중국 역사를 단조롭게 만드는 제약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 p131
이 책을 통해서 한 무제의 치세뿐만 아니라 그의 단점도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일본의 저명한 중국학 연구자인 요시카와 고지로는 이 책을 통해서 한 무제의 치세와 그의 통치 이념, 업적, 실정 등을 자세히 다룬다. 당시 제도와 문화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서 역사 초보자들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 한 줄 요약 : 한 무제는 중국을 외형적, 내형적으로 성숙시킨 개척자이지만, 무리한 정벌과 건축으로 백성들을 동원한 무자비한 군주이기도 했다.
- 생각과 실행 : 개혁을 주도한 리더는 조직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와서 뛰어난 영웅으로 칭송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노력과 땀, 눈물이 따르게 마련이다. 자신의 공적에 심취하기 보다는 이들의 마음도 어루만지고 보살필 수 있는 리더가 진정한 리더라고 할 수 있다.
* 이번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으로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