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수살귀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쌈무이 지음 / 책과삶 / 2026년 8월
평점 :

14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 동안 밤을 지켜온 '공포라디오0.4MHz 쌈무이'가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반가움과 기대감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평소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습관처럼 틀어놓던 방송이었기에, 쌈무이 특유의 목소리로 즐기던 시청각의 공포가 온전히 글자로만 옮겨졌을 때 과연 그 서늘한 긴장감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소리라는 직관적인 자극이 사라진 자리를 텍스트가 채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은 채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는 첫 장을 넘기자마자 기분 좋게 엇나갔다. 텍스트는 시청각 매체와는 또 다른 독보적인 맛을 지니고 있었다. 소리가 즉각적인 소름을 유발한다면, 문자는 독자의 상상력을 천천히 죄어오는 은근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단어를 하나씩 읽어 내려갈 때마다 머릿속에서 구체적인 장면이 그려졌고, 여백에서 느껴지는 정적은 오히려 공포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특히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여타 가상의 공포소설들과 달리 실화 사연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온다. 깔끔하게 사건이 해결되거나 악귀가 퇴치되는 인공적인 서사와 달리, 실화 괴담 특유의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불쾌함과 찝찝한 끝맛이 마지막 한 줄 까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수많은 사연 중에서도 단 22편만을 엄선해 엮어낸 만큼, 수록된 이야기 하나하나의 완성도가 상당했다. 오랜 세월 쌓아온 라디오 방송의 수만 가지 제보 중에서도 정수만을 뽑아냈다는 점이 단박에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었던 에피소드는 단연 '후쿠오카 호텔에서'였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워 나도 자주 찾게 되는 익숙한 여행지 후쿠오카의 어두운 화장실 안쪽에 웅크리고 있던 젖은 여자의 비현실적인 기척은, 글귀를 읽는 내내 마치 내가 그 공간에 홀로 남겨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오싹함을 선사했다.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 순식간에 가장 위험한 장소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책은 공포라는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에필로그를 통해 각 사연자들의 후일담까지 차분하게 담아낸다. 기이한 일을 겪고 난 뒤에도 여전히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흔적을 바라보며, 어떤 사건은 문장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의 시간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소리로 들을 때와는 또 다른 깊이로 감각을 자극하는 이 실화 괴담집은, 불을 끄고 자려고 누운 침대 위에서 문득 닫힌 문 너머의 어둠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묘한 끌림을 지니고 있다. 책장을 덮은 후에도 손끝에 남은 서늘한 감각은 당분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