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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호시스 ㅣ 슬라우 하우스
믹 헤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6년 8월
평점 :

재미있는 미드가 없나 두리번 거리다 어느 유튜버의 인생작이란 소개로 접하게 된 영드 '슬로 호시스'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과장을 조금만 보태면 '브레이킹 배드'를 안본 눈을 부러워하던 내 눈이 만족할만한 두번째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멋스러운 정장에 최첨단 장비들로 무장한 007에서 볼 법한 스파이 대신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담배 연기와 방귀 냄새를 풍기며 임산부처럼 배가 뽈록하게 튀어나온 잭슨 램의 등장부터가 기존 스파이물의 공식을 산산조각 냈기 때문이다. 찌질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카리스마 넘치는 분위기에 푹 빠져 시즌을 정주행했던 기억과 함께, 드디어 한국에 정식 출간된 믹 헤런의 원작 소설 '슬로 호시스'를 오늘 펼쳐 들었다. 이미 드라마로 내용을 모두 알고 있는 입장에서 과연 원작 소설이 주는 재미가 남아 있을지 조금은 걱정되었지만 책장을 넘기자마자 그것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소설은 드라마가 가진 긴장감과 블랙유머를 한층 더 밀도 높은 문장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드라마 속 잭슨 램은 굉장히 멋진 편이었다는 사실도 추가로 알게 되었다!
이 소설에 빠져들게 만드는 첫번째 요소는 극 초반부에 배치된 '슬라우하우스'에 대한 치밀하고 현실감 넘치는 묘사다. 공문서나 명함, 전화번호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공과금 고지서조차 제대로 찾아오지 않는 '수렁의 집'. 슬라우 하우스 시리즈의 작가 믹 헤런은 이 오래되고 낡은 건물의 오래된 계단과 먼지 쌓인 서류 더미, 그리고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유의 탁한 공기를 시각을 넘어 청각과 후각까지 느껴지게 만든다. 본부인 리젠트파크에서 쫓겨나 무의미한 서류 분류 작업에 갇힌 요원들 느린 말들 슬로우 호시스의 절망감과 좌절이 이 슬라우하우스라는 공간을 통해 완벽하게 표현된다.
무엇보다 흑과 백으로 대비되는 엘리트 첩보 세계에서 벗어나 이제 이도 저도 아닌 쓸모 없어져버린 낙오자들의 세계를 누렇게 물든 노란색과 빛 바랜 회색으로 표현하는데 이 시각적인 표현이 무척 효과적이며 생생하다. 이미 드라마 속 슬라우하우스에 익숙한 내게도 또다른 느낌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드라마에서는 스쳐지나갔던 공간의 눅눅함과 성공가도에서 탈락한 자들의 무기력한 분위기가 글을 통해 전해지며 책을 읽는 나로 하여금 순식간에 이 한심하면서 웃픈 유배지의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든다. 그리고 이 우울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잭슨 램과 리버 카트라이트의 티키타카는 소설을 읽는 내내 절로 실소를 터뜨리게 만드는 최고의 재미 요소로 작용한다.
훈련소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슬라우하우스로 굴러떨어져 어떻게든 다시 올라가고 싶어 안달이 난 리버와, 그런 리버의 열등감과 조급함을 정확히 파악하고 사사건건 신랄한 독설을 퍼붓는 램의 대화는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드라마에서 게리 올드만과 잭 로던이 보여준 모든 것들이 바로 원작의 힘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램이 툭툭 던지는 무례한 말과 그 속에 숨겨진 노련한 직관, 그리고 이에 매번 억울해하면서도 리젠트파크에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리버와의 대화는 자칫 무겁기만 할 수 있는 스파이물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환기한다. 원작소설로 만나는 램의 독설은 드라마보다 더 날카롭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이야기가 진행되어 극우 단체에 의해 무슬림 청년 납치 사건이 터지고 느린 말들이 본의 아니게 권력 다툼에 휩쓸릴 때 원작소설의 재미가 빛을 발한다. 현대 정보국의 관료주의와 정치적 계산, 예산 다툼을 향한 믹 헤런의 냉소적인 풍자는 신랄한 독설 사이에 더욱 선명하게 녹아 있다.
드라마를 이미 본 사람들에게 원작소설 '슬로 호시스'는 단순한 줄거리의 재확인이 아니다. 각 인물들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열등감과 생존과 성공에 대한 욕구, 그리고 겉으로는 마구 대하는 듯하지만 은근한 책임감으로 판을 흔드는 램의 진짜 실력을 훨씬 더 세밀하고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다. 미워할 수 없는 낙오자들의 반격을 담은 원작소설을 만난 것은 드라마를 재미있게 본 팬으로서 감사한 선물처럼 느껴진다.
드라마를 보았든, 보지 않았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첩보소설 슬로호시스를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