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괜찮은 정오
정오 지음 / 작은별출판사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적당히괜찮은정오 #정오 #에세이 #작은별

책표지를 보면 ‘정오’에 대한 감이 온다. 정오를 떠올리면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 그리고 눈부신 빛, 선명하지만 짧아진 그림자를 떠올리게 된다. 책 표지의 한 장면은 잠시 멈춘 일상의 한 가운데를 보여주는 듯했다. 아침처럼 설레거나, 저녁처럼 마무리되지 않은 시간의 중간쯤이랄까. 하루 중 가장 밝은 시간 같지만, 오전과 오후 그 사이에서 적당히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 책은 살면서 우리가 통과한 시간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누구나 한 번쯤 지나왔을 법한 감정들을 건드린다. 인생에서 펼쳐진 아주 사적인 삶을 글로 옮겨 놓는 일이란 그 자체로 용기 있는 일이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초반에 등장하는 신학대학원과 십자가 아래에서 벌어진 아버지의 사기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과 신성한 공간이 교차하는 문장 안에서 씁쓸함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저자는 ‘

고개를 드니 저 멀리 교회 지분 위 십자가가 보였다. 목돈을 투자하면 돈을 불려주겠다고 말하던 사람이나 그 말을 듣고 전 재산을 가져온 사람이나, 신학대학원이 참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P49)라며 비난 대신 다소 냉소적이면서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 건조함이 오히려 깊게 남았다. 빛과 그림과가 함께 존재하는 시간. 삶의 정오.

엄마의 관계를 다루는 대목에서는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딸의 마음이 느껴졌다. 엄마의 팔에 남은 상처와 멍자국을 보며 얼마나 울컥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요양 병원에서 노인분들을 케어하며 그들의 손아귀 힘에 못 이겨 생긴 흔적들임을 왜 모르겠는가. 대수롭지 않은 듯 좀 더 조심하라는 다소 퉁명스러운 말로 엄마의 삶을 지켜주는 그 마음에는 사랑과 미안함이 묻어 있다. 알지만,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진짜 말은 사랑이다. 우리는 종종 사랑에 정직하지 않고 또 다른 언어로 빗겨 말하곤 한다.

자기 크기만큼 살려는 태도는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다. 화가 날 때 걷는 것, 책을 읽을 때 편안함을 느끼고, 남편과 어설픈 요리를 하며 소박한 행복을 찾는 일. 또한 툭종보다 한 꼭지의 기사를 쓰는 기자가 되고 싶다는 작은 바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만들어내지 않아도 된다는 삶으로부터의 깨달음. 이 모든 것들의 고백에서 저자의 단단함이 느껴진다. 삶을 타인의 잣대에 두지 않고 나를 인정하며 주어진 삶에 충실 하려는 움직임은 저자가 말하는 ‘정오’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저자는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가장으로서 버텨야만 했던 시간들 속에서, 그리고 기자로서 소명을 다해야 하는 가운데 따라주지 않는 현실과 직장 상사의 꼰대짓 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행복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지만, 정작 우리는 내 몸이 보내는 신호에 얼마나 둔감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더 나아가 출산과 생계, 꿈과 현실 사이에서 오는 갈등과 동시대의 고민까지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층의 사고를 엿볼 수 있었고, 그들의 불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행복을 통해 자신의 기쁨을 발견하는 마음을 지나치지 않았다. 꽃이 저자의 삶에 숨구멍이 되어 주듯, 자신이 누군가에게 건넨 작은 마음이 다시 자신을 살게 하는 힘이 된다는 믿음을 만들어 낸다. 자기 안의 선을 꺼내쓸 줄 아는 사람은 언제든 행복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후반부에 가까워질수록 더 좋았던 책이다. 나 역시 누군가의 삶을 통해서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갈망하던 때가 있었다. 저자가 꺼내든 ‘한 달 살기’ 로망 역시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바라던 로망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저자는 누군가의 한 달 살기를 ‘지금 눈앞의 한 달 살기’로 시선을 돌린다. 멀리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내게 주어진 한 달을 차곡차곡 잘 살아내는 일 역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임을 돌아보게 한다. 예고 없이 찾아온 좋은 일과 나쁜 일 속에서도 우리는 결국 잘 적응하고, 그 순간을 매일 찾아오는 정오처럼 일상으로 만들 수 있다.

인생에도 정오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지 모른다. 나는 이미 많은 시간을 지나왔지만, 아직 거쳐야 할 시간이 남아 있다. 화려하거나 눈부신 나날이 아니어도 괜찮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적당히 나를 지키며 서 있는 그 자체로 충분할 수 있다.

p256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언제나 망설임 없이 ‘행복’이라고 답하면서도 몰랐다. 미처 알지 못했던 것. 나의 행복이 전부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나를 통해 행복한 얼굴을 하는 것, 그 또한 커다란 행복이었다.

정오 작가님 @work.walk.write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