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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루치의 낙담
박선영 지음 / 반비 / 202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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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을 품고 한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다. 비록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나 한 사람 제대로 불사르면 거창하지 않아도 뭔가 바뀌어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과 기대로 사회에 나온다. 그러나 막상 현실의 벽에 부딪혀 보면 안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고, 조악한 환영에 불과했었는지 말이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이 오히려 나 자신을 실망시키고 좌절의 단두대에 올려놓았을 때 그제서야 깨닫는다. ‘이건 아니라고!’
그러나 세상은 아이러니한 곳이기에 제목처럼 <그저 하루치의 낙담>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저자는 17년간의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책과 함께한 깊은 침묵 속에서 깨어나 과거 기자로서의 삶을 돌아보며, 직업적 윤리와 희망을 이 책에 담아내고 있었다. 또한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며 마주한 낙담들은 저자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낙담임을 전하고 있는 듯했다. 행간 속에 숨어든 작은 유머 속에서 저자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으며, 그녀가 기자로서 얼마나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로 인한 낙담마저도 숭고하게 다가왔다.
‘기자란 자기 홍보가 필요할 땐 기자님이지만 잘나가는 자기를 비판할 땐 기레기인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 승리하고 있는 사람이 불멸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진실이란 사람들이 하고 있는 말 속에 있기보다 하지 않는 말 속에 있기 때문이다.’ p59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드러나는 것들을 너무 쉽게 진실이라 믿어왔던 것은 아닐까. 권력 다툼 속에서 국민이 희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많은 생각이 오가게 했다. 게다가 기자의 숙명은 어찌나 처절한지. 하나의 기사를 쓸 때 알려야 할 사실과 지워야 하는 사실 그 사이에서 얼마나 깊은 내적 갈등을 겪어야만 했을까. 실제로 기사로 띄울 때까지 자신이 쓴 글로 인해 누군가는 다치고, 누군가는 살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글을 읽으면서 저자는 윤리 감각이 대단히 예민한 기자처럼 느껴졌다. 그런 점을 미루어 짐작해 봤을 때 기자 박선영이란 사람의 내적 갈등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엄마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입시를 향한 소리 없는 경쟁을 매일 치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내가 지나온 시간이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날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적성을 찾고, 꿈을 찾아라는 이런 말들은 듣기 좋은 허울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그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알게 모르게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을 어른인 우리가 모르지 않는다. 다 그런 거라고, 그걸 위로랍시고 말하는 내가 용기 없는 엄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학교와 성적보다 아이의 생을 먼저 선택한 엄마. “나는 아직 어리니까 그런 큰 일은 부모가 결정해줄게. 엄마 아빠 믿고 자퇴해.”라고 과연 나는 이 문장을 말해 줄 수 있을까. 이 책 속에서 나는 아이를 위해 세상과 싸우는 부모의 참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엄마로서의 나, 부모로서의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이 개인적으로 좋았던 것은 낙담의 순간들이 자기 연민에 머물거나 극단적인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좋았다. 일상의 소소하고 미세한 울림을 지닌 낙담들은 내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나의 일부였다. 저자의 사유는 개인적 감정에 그치지 않고 사회 속 존재로서 나를 돌아보게 했다.
‘모든 지긋지긋한 것들은 그 위치에너지의 힘으로 끝내 우리를 구원한다. 너무나 지쳤다는 것, 지긋지긋하고 넌덜머리가 난다는 것, 입을 뻥긋할 기운도 없는 깊은 절망과 피로. 이것은 엄청난 에너지다. 세상의 많은 혁명은 넌덜머리의 에너지로 반발했으며, 지긋지긋의 에너지로 세상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눈에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도록 만드는 가공할 힘, 넌덜머리. 지긋지긋.’ p314
‘지긋지긋하다’ ‘넌덜머리가 난다’는 것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어떻게든 나를 끌고 가는 힘이었다. 갖은 인상을 쓰며 하던 이 말이 구원의 말이 될 줄이야. 간만에 너무나 멋진 작가의 책을 만나서 큰 위로가 되었다. 나에게 그녀의 글은 ‘괜찮은 낙담’이었다.
플랫 @flatflat38 반비 @banbibooks 필사서평단에 선정되어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