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한 7가지 질문
강남순 지음 / 한길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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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에서 나온 페미니즘 서적은 다양하다. 다른 서포터즈 분들이 혜택도서로 페미니즘 서적을 신청해 받아보는 것을 보면서도 ㅡ 그중 '남자' 서포터즈 분들이 많은 건 놀라웠다. 일상에선 페미니즘에 발작하는 남성들만 봐왔기에 ㅡ 여태 그 책들을 읽어보지 않은 건 페미니즘 안에서도 담론이 너무나 다양하고 특정 저자의 특정 페미니즘 담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활동이 끝나기 전에 '한길사'의 페미니즘 저서를 꼭 한번 읽어보고 싶었고 마침 강남순 작가의 이번 신작은 제목이며 목차며 담백해서 좋았다. 편을 가르고 소위 말빨로 남성을 눌러버리는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같은 공격적 배타적 접근 방식 말고, 이론 탐구적으로 천천히 페미니즘에 접근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간중간 울컥 흥분하는 대목이 있었지만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쓰려고 노력했다. 이 감정은 페미니스트로서 나오는 감정이 아니라여성으로서 나온 감정이기에. 진정한 연대를 지향하는 페미니즘을 위해 우선은생물학적 남자에게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서평은 저자의 담론을 재구성해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가 권장한 이 책을 접하는 방식 '아하'의 경험으로 책에 소개된 근본 질문과 깨달음을 정리하고 그 외 페미니즘의 이론적, 지식적 측면에서 얻어갈 수 있는 내용, 마지막 끝맺음말로 이번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번 글은 한 구절 한 구절 버릴 수가 없는 책을 다룬 글이므로 좀 길어질 듯하다.



1. 요즈음 세상에 자기만 열심히 하면 무슨 차별을 받겠어? 사소한 문제에 불필요한 에너지 쏟지 말고 이미 주어진 일에나 최선을 다해.


놀랍게도 저자 또한 페미니즘 이론을 배우기 전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사실 놀라운 건 아니다. 모두가 힘들이지 않으면 편하게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사람들이 사고의 안일함만을 취하고 페미니즘의 근원 물음에 특히나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는, 성차별이 인종차별, 계층차별과는 달리 공적영역을 넘어 심지어 가족 안, 즉 사적영역에서도 행사되기 때문이다. , 모든 삶의 영역에서 뿌리깊게 확산되어 이에 대한 근원적 물음은 곧 일상의 근원적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이 말하는 '사소'한 문제는 그 광범위함에 비추어볼 때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만큼 일상에 깊이 자리잡은 불편한 진실을 모두가 처음부터 환영할 순 없겠지만 사소한 것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장벽을 넘으면 우리는 사회개혁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


2. 따로 공부할 필요 없이 알 수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이다.(혹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우리는 -ism '~주의'가 붙은 학문 사조에 대해 감히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유독 페미니즘만은 누구나 그 근원이 되는 배경과 지식을 공부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이는 페미니즘을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태도이다. 왜곡된 단순화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위험하다. 학문적 무지를 인정함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으로 말랑말랑한 상태를 의미하지만 이다/아니다를 단정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까지 이분법적 사고로 물들일 위험이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빙산의 일각일 뿐 나머지 세계에 접근하려면 이론적 조명이 필요하다.

변혁운동이 의식화 과정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만약 의식화가 결여된다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설득할 힘을 가지지 못해 변혁운동의 지속성과 확장성 또한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문적 연구와 이론적 성찰을 실천에 비해 가볍게 치부하는 태도 또한 옳지 못하다. 여기 저자가 언급한 딱 들어맞는 비유가 있다. 냉장고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땐 문제될 것이 없지만 고장이 났을 때는 냉장고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왜 문제가 생겼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론의 역할이다.

나 또한 한길사 덕에 읽을 기회가 없었다면 페미니즘 서적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굳이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분야라 생각하여 그것을 모든 일과 모든 서적의 후순위로 그것을 미뤘을지도 모른다. 바쁜 일상 속 주어진 성찰의 기회에 대해 새삼 다시 감사한 부분이다.


3. 내 경험 좀 들어볼래?


남자다움의 증명으로 성매매 경험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은 남성문화가 있다. 음담패설을 무용담처럼 주고받고 단체 카톡방이나 회식이 끝난 자리에서 종종 여성은 성적 놀잇감으로서 지배-피지배 관계에 놓인다. 그러나 정작 행위자들은 그것이 여성혐오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노골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여성혐오를 드러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도 여성혐오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예뻐해주잖아 뉘앙스 등의 발언, 남자의 관심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여자들과 질투 관계에 놓이는 여성들의 태도. 이것들 모두 여성혐오를 내면화한 다양한 모습니다. 남성과 여성을 지배와 종속 관계로 각인시키고, 혹은 스스로 각인하고 결국 남성중심적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동조자가 되는 것이다.


4. 남성도 성차별의 피해자이다!


베나타가 주창한 '2의 성차별'에 따르면 남성도 다양한 폭력의 희생자라고 한다. "남성은 군대처럼 갈등상황이 아닌 곳에서도 생명이 희생되며/ 군대에서 남성에게 품위를 손상시키는 짧은 머리를 하게 하며/ 여성보다 남성에게 육체적 체벌이 더 많으며/ 감옥에는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으며/ 동성애 남성이 레즈비언 여성보다 더 차별받으며/ 남성은 육아휴직에서 차별받는다." 등의 근거를 든다. 하지만 남성에게 그러한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다른 여성이 아닌 남성이다. 즉 성차별에 의한 불이익이라기보다, 진정한 남성됨을 전사(warrior)로 생각하는 남성중심주의적 문화에 의한 불이익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태어날 때 생물학적 남자였던 사람이 남성으로서의 삶을 거부하는 것은 전통적인 남성중심적인 젠더 위계주의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트렌스여성은 트렌스남성보다 편견과 성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반면 여성이 성폭력의 희생자일 경우 가해자는 여성이 아닌 남성이다. 이처럼 가부장제적 지배논리는 권력을 지니지 못한 남성들에게조차 종속된 삶을 강요하게 하며, 가부장적 가치를 거부하는 남성을 남자답지 못한 남자로 간주한다.

또한 애트우드는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남성은 여성이 자신을 비웃을 것을 두려워하지만, 여성은 남성이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여성혐오는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여성에 억압과 차별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의미의 남성혐오 개념이 존재한 적은 없다. 즉 여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남성이 취급된 역사가 '없다.'


5.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표면적으로 생물학적 남성은 여성의 성차별 경험에서 당사자성이 결여된 존재이기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 구호만 외치고 트랜스여성, 흑인 남성, 성소수자 남성을 배제하는 페미니즘은 지속될 수 없을 뿐더러 공허할 뿐이다. 분노에는 파괴적 분노와 성찰적 분노가 있다. 파괴적 분노는 피해자 의식 속에 침잠하여 관계의 파괴로 이어지는 분노다. 파괴적 분노를 느끼는 여성주의적 페미니즘이 가부장제적 관점과 다른 것은 오직 그 가치의 전도일 뿐 다른점은 없어보인다.

여성의 절대적 피해자성을 주장하기 어렵다. 여성혐오를 재생산하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외모,교육,나이 등 요소에 따라 같은 여성이라도 각기 다른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기도 한다. 인종, 성정체성, 계층, 나이, 장애여부으로부터 차별받는 남성도 있다. 또 성소수자 백인남성은 자신의 성소수자성을 내세우며 절대적 희생자 위치만을 강조할 수도 있다. 이러한 교차성 개념은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뀔 수 있는지를 보게 한다. 자신의 다차원적 사회적 역할 수행과 책임을 인식하고, 각기가 지닌 인식의 사각지대를 일깨워 대립과 차별의 경계를 허무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페미니즘의 최종 목표이다.

결론적으로 페미니즘은 여성남성간 성차별문제에만 매달리는 협소한 사상이어서는 안 된다. 이는 성차별의 우선적 중요성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성차별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되 다층적 차별을 해결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도착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보편주의와 뜻이 통하는 것 같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코즈모폴리탄 페미니즘은 개별적 정황에서 출발하여 보편 평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보편주의보다 구체적, 실천적 담론이다.


6. 침묵이 답이다.


이 모든 최근의 페미니즘 확산 노력과 미투운동, 추문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흔히 이 편함을 추구하는 이들을 중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은 명백히 사고의 오류를 드러내진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어떤 쪽으로든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침묵은 그들이 목격한 바, 들은 바에 대한 묵인을 의미하고 묵인은 가해행위의 지속성을 촉진한다. 비의도적으로 차별이 난무하는 현실의 현상유지를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자기정체성을 넘어서 페미니즘이 요구하는 개별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선 적어도 의도적으로 침묵을 깨는 그 불편한 행위가 어느정도 수반되어야 한다.



<페미니즘에 관한 이론적 지식>

1. 푸리에가 쓴 féminisme은 라틴어의여성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한다. 즉 생물학적 female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요즘 사용하는 정치적 입장을 담은 페미니즘이 아니었다.

2. 트렌스젠더와 반대되는 개념은시스젠더'cisgender로서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성과 사회문화적 젠더가 일치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cisman transman 또는 ciswoman transman으로 젠더 정체성을 표현하는 표현이 영어권에서 대중화되고 있다.

3. 간성(intersex)가 여자와 남자의 생식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개념의 third sex라면 트렌스젠더는 사회문화적 성별로서 third gender이다.

4. 영어로 여성혐오를 뜻하는 용어는 미소지니(misogyny)이다.

5. 여성혐오의 두 모델

-사창가모델: 성적욕구를 충족시키는 존재

-농장모델:종족 보존을 위한 출산,양육,가사 등의 역할을 하는 존재

6.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 페미니즘''

-자유주의 페미니즘: 평등한 제도와 법과 같은 객관적 조건들의 변화가 필요하다. 인간 개체성, 독립성을 강조하다 보니 계층, 인종 차별 요소를 보지 못하는 것이 한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여성의 무임금 가사노동 평가절하하며 대안으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과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제시한다. 하지만 임금지불은 가사노동이라는 단순노동 영역에 여성을 더욱 제한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또 다른 한계는 여성을 억압하는 것은 남성이 아닌 자본이라고 여김으로써 젠더 관점을 부차적인 것으로 본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자본주의(공적영역 억압)뿐만 아니라 가부장제도(사적영역 억압)까지 비판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성은 왜 억압받고있는지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

-급진주의페미니즘: 여성억압의 근본원인은 여성의 생물학적기능이다. 임신, 출산, 인공유산, 포르노그라피, 성희롱과 성폭력 등의 문제 해결책을 탈가부장제와 피임, 체외수정 등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본다.

cf) 생물학적 모성이 중요하다고 보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남성이 유일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출산기능을 축소한다며 계약에 근거한 모성에 반대한다. 출산 기능을 축소화 하는 것은 오히려 남성에게 더욱 강력한 지배도구를 주는 것과 같다는 주장을 펼친다.

한계: 출산 기능을 수행할 때 비로소 정상적인 여성이 된다고 여긴다. 공적활동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비혼이나 무자녀 여성은 비정상적 여성이 된다. 워킹맘인 여성은 전문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7. 페미니스트 보이콧이 필요하다. 이는 경제적 효과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회정치적 저항의미를 지닌다. www.ethicalconsumer.org/ethicalcampaighns/boycotts

->인권이나 생태적 관점에서 문제되는 기업이나 상품리스트를 만들어 보이콧을 권한다.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재현하고 성적대상으로 투사하는 영화,음악,잡지 또는 기업에 보이콧 통해 의식 개혁의 계기를 마련한다.



글을 마치며

우리는 모두 인식의 사각지대를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 오직 형성 중인 페미니스트이다. 각자의 정황이 다르듯 사실이란 없고 다만 해석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들은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 '함께 그리고 따로따로' 씨름하고, 성찰하고, 개입하고, 연대하라고 말한다.

강남순 저자의 페미니스트 담론은 극단적이지 않아 만족스러웠지만 다소 이상적, 추상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를 정의하는 고정된 하나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차별과 혐오에 저항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처한 정황의 수만큼의 담론이 존재함을 깨닫는다면 이러한 담론이 최선임도 알게 될 것이다.

친언니가 한번은 회사에서 무거운 짐을 들 일이 있을 때 일부러 자기가 든다고 말했다. "여자들은 그들에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을 외치면서도 이럴 때만 여자이고 싶어한다." 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란다.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해명하기 위해 오직 여성만이 노력해야 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증한다. 진정한 의미의 페미니즘은 이분법적으로 단순화된 이론이 아님을 우리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충분히 이해했다. 우리는 젠더적 우열을 가리고 지배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페미니즘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를 위협하는 차별과 억압에 저항할 뿐이다.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이론적 관심을 가지고 노력할 필요성을 남성들이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지배적 위치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지배-종속적 관계를 아직도 상당히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누군가는 BC 2세기부터 시작된, 이미 유구한 역사를 지닌 가부장제도를 되돌릴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시작점은 존재해야 하고 이미 변혁의 움직임은 시작되었다. 지난 근대 역사 동안 인류가 이룩한 건 법적 재산권, 교육 기회의 평등권 등 눈에 보이는 법과 제도였다. 하지만 이는 평등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다. 구체적 방법으로 '모두'가 진정한 평등을 누리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변화, 즉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과 관점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하고 남은 21세기 페미니즘의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근대 객관적 변화와는 달리 토론과 자기성찰, 부단한 학업 등을 통해 아주 조금씩 변화가 가능한 부분이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설득-자각-연대의 선순환 고리를 만드는 탄탄하고 왜곡 없는 초기 이론적, 실천적 작업은 쉼없이 구르고 굴러 생각보다 빨리 이 사회에 뿌리 깊에 잔존하는 지배-피지배 사고의 고리를 끊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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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8일 - 생각할수록 애련한 조성기 오디세이 1
조성기 지음 / 한길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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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가 역사소설 <사도의 8일>을 우리에게 들고와 2020년을 열었다. 내가 처음으로 읽는 역사소설이기는 하지만 영화로도 인상깊게 각색된바 있는 사도의 이야기이기에 끌렸고, 부제가 주는 저릿한 느낌이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또 역사에 그리 정통한 편은 아니지만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말을 종종 한 적이 있다. 엄격한 규율, 정통과 법칙 속에서 살아가는 당대의 사회가 누군가에겐 숨막히기도 하겠지만, 나에겐 한편으로는 긴장감 속에서 그만큼 각자가 갈구하는 것이 살아 숨쉬는 사회로 여겨졌다. 그것이 개인적 입신양명이 되었건, 문화의 부흥이 되었건, 나라의 기강이 되었건 간에 말이다.


문학이 가진 힘은 대단하다. 역사와 달리 문학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만을 부각하지 않고 내 눈에 그저 보이는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 볼 뿐이다. 업적을 세운 이들로 시대를 구분하는 역사는 우리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하지만, 못다 이룬 것이 남아 있는, 활짝 피지 못한 채 스러져간 사람들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이 소설은 잊혀져간 한 인간을 묘사함으로써 안타까움과 사랑 그 사이의 감정에서 당시의 시대적 비극을 바라보게 하고 반면교사적 시야를 갖게 한다. 

흔히 역사가 시대적 배경인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대사가 끝날때마다 화면 밑에 달아지는 각주를 읽기 바빴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성기 작가의 서술방식은 주의를 그런 식으로 독자의 주의를 흩뜨리지 않는다.


영화 <127시간> 같이 훗날 사도라 불리는 소조가 8일간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처절하게 죽어가는지를 그린 소설이었다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뒤주 안에서 '생존'을 떠올리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암벽에 떨어진 사람처럼 뒤주에 갇힌 것이 아니라 훗날 영조라 불리게 되는 대조의 명으로 가둬진 혹은 스스로가 가둔 공간일 뿐이다. 그렇기에 사도가 뒤주 안에서 죽어간 시간은 8일이지만 그가 회상한 과거는 그의 죽음으로부터 40여년 전, 그러니까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격화된 경종대로 거슬러 간다. 사도는 자신을 죽음으로 휘몰아쳐온, 돌풍같던 27년 과거를, 혹은 40년 역사를 돌아보며 생을 마감한다.


<사도의 8일>의 서술방식은 당대 소개되었다면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날짜를 기준으로 8개의 장으로 나누어 사도세자의 시각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시각에서도 그들이 목격한 조선의 역사를 회상하게 한다. 그로써 사도세자와 그의 세손(훗날 정조) 사이 잊혀진 아내 혹은 어머니, 즉 모든 조선 역사 속에서 가려진 또 하나의 집단인 여성을 끄집어낸다. 남편이 뒤주에 갇힌 시간들 속에서 비통함을 느끼지만 아들 이산을 생각하며 수도 없이 죽음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었을 그녀의 8일. 사도세자가 별세한 뒤 여윈 몸으로 뒤주에 들어가 가만히 무릎을 꿇고 엎드린 혜경궁 홍씨가 주는 여운으로 끝을 맺는 소설.


빙애의 일화에서 작년 흥행한 영화 <조커>를 본 기억을 떠올렸다. "광기를 표출하는 남자를 연민한다.", "끔찍한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음으로써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인식을 공고화 한다." 라는 친구의 신랄한 비평을 듣고 궁금해져 보러 간 영화였는데 그 때 나는 친구의 주장에 강하게 반박했다. 예술이나 문학은 누군가를 연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물론 시대가, 상황이 누군가를 극한으로 몰아넣어 미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소조가 한 번도 대조로부터 마음껏 사랑받지 못했음을, 자신을 지켜주는 이들이 떠나가고 서로를 헐뜯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당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견뎌야 했던 시간을 연민하진 않겠다. 하지만 그를 광기와 죽음으로 몰고 간 시대가 그저 잘못된 시대였거니, 사도가 시대를 잘못 타고났거니 하고 가볍게 넘기지만은 않으려 한다. 


대의나 정의가 사사로운 감정에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사람이 내 사람일 때 느껴야 하는 갈등,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밀려오는 고통의 무게를 사소하게나마 느낀 적이 있다. 내게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줄 만큼 내가 옳다고 여기는 가치는 진정으로 옳은 것인가. 그 가치를 끝까지 밀고나갈 수 있을 만큼 나는 그리도 단단한 사람인가.

하물며 한 나라의 대를 잇는 조선의 왕은 어땠겠는가. 영조는 이인좌의 난으로 정통성을 의심받고 기강이 흔들리자, 탕평을 본격적으로 내세우고 노론과 소론의 공생을 도모하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 했다.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지만 그들이 왜 분파를 만들어 갈라져있는지 자신들도 알지 못하고 무의미한 당쟁을 일삼는 조정에서 사화와 옥사가 또 다시 반복되어 무의미하게 수백 명이 죽어가는 상황을 멈추려 했다.


빙애의 일화는 소조와 대조의 행위를 오버랩 하는 듯하다. 빙애를 죽이고 나서야 사랑하고[愛] 사모함[戀]을 느낀 소조, 소조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나서야 생각할수록[思] 슬퍼진다[悼]는 시호를 내린 대조. 의대증이니, 시대적 어지러움이니 우리를 흔드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 때가 바로 내 옆의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용기가 필요한 순간일 것이다. 마치 매순간 함께 있어 그 소중함을 알지 못했지만 사도세자의 곁엔 그와 같이 슬퍼하며 그의 모든 것을 품었던 혜경궁 홍씨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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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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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지 않은 주제를 번역체로 읽어야 하는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한나 아렌트의 사상에 대한 나의 배경지식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알던 것에만 끌리는 독자 명의 일상에, 잠시 멈추어 낯선 이를 이해하고 세계를 통찰하는 시간을 선사해준 한길사에 고마움을 전한다.

책은 전반부 한나아렌트의 생애를 다루고 점차 그녀의 사상을 현대 정치에 적용하여 확장시켜나간다. 개인적으로 리처드 번스타인이 전반에 견지하는 객관적 시각이 매력적이다. 절대적 우상화도 맹목적 비난도 아닌 우리가 함께 사유하게 하는 책이기에 전반에 걸쳐 소재가 되는 한나 아렌트는 그저 우리가 현대 정치를 냉정한 태도로 바라보고 그를 적극적 행동으로 옮기게 해주는 출발점으로 작용할 뿐이다.

 간단히 말해 한나 아렌트는 억압받는 자들의 권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정치사상가이다. 목차 '충성에 근거한 반대 -아렌트의 시온주의 비판' '인종주의와 분리', '악의 평범성' 목차까지는 그녀의 생애 동안 직접 보고 겪은 정치적, 사회적 사건에 대해 그녀가 가졌던 태도가 녹아있다. 물론 과정에서 아렌트가 받아왔던 비판도 작가는 가감없이 소개하며 함께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이후 '진리, 정치 그리고 거짓말', '복수성, 정치 그리고 공적 자유', '미국혁명과혁명정신', '개인의 책임과 정치적 책임' 목차에서는 그녀가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그녀의 사상을 바탕으로 정치와 권력, 억압과 자유에 대한 고찰을 확장해 나간다. 이를 통해 작가는 현대 정치를 무사유로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경고의 메시지를 주기도, 정치의 추악한 모습에 절망과 냉소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그로부터 회복의 여지를 주기도 한다.

<충성에 근거한 반대- 아렌트의 시온주의 비판>

그녀가 철학자의 면모를 지녔다고 넉넉히 인정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여기부터였다. 오래도록 무국적자로 지내야 했던, 나치를 피해 도망친 유대인 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겐 '개인적' 분노의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다.(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세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길 진정으로 원했다. 그렇기에 모두가 유대인만의 국민국가에 대해 yes 근본 해결책이 아니라며 no 외칠 있었으며, 모두가 아이히만 행위의 악마성에 no 외칠 개인적 무사유 나이브함의 원인을 끄집어내어, 개인 차원의 1차원적 비난에서부터 스스로를 고찰할 성장의 기회를 모두에게 심어줄 있었던 지식인이었다.

나치에 반대하는 유대인으로서 있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끊임없이 사유했다. 그녀 또한 패리아, 유대인이 억압받는 집단과 연대해 싸워야 한다고 믿는 반란자였는데 다만 시온주의자는 아니었다. 시온주의 탄생의 시발점은 이팔 분쟁과 테러 그로 인해 통치권자인 영국이 해당 지역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한 것이었다. 이들은 상황을 이용해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자고 주장한 이들이다.

그녀가 지적한 시온주의자들의 문제는 배타적, 만장일치적 이데올로기 경향이었다. 만장일치가 '동의' 다른 점은 ' 입증된 반대' 대하는 태도이다. 시온주의의 감정적 경향에서 나온 유대인들의 국민국가 건설에 아렌트는 끊임없이 반기를 들었다. 유대인 국가의 건설로 인해 팔레스타인 다수 민족인 아랍인들에게서 또한 전투적 민족주의를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엔총회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이 결정된 이후에도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전쟁이 발발했는데, 시온주의자들의 이상대로 유대인 민족국가가 건설된다면 이전의 상황보다 유대인들이 위협받는 상황이 것임은 분명했다.

 그러기에 아렌트는 자치정부에 많은 권한을 주길 웠했다. 유토피아적이라는 시온주의자의 이전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렌트는 연방제 국가라는 그녀의 주장이 보다 현실적임을 입증해내었다. 비록 누구도 그녀의 주장에 동조해주지 않았지만 언제든 누구로부터든 시작될 있는 집단적 의견일치, 재앙적 미래를 경고했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인종주의와 분리>

아렌트가 받았던 비판의 원인이 되었던 주장이자 다만 가지 아쉬운 점은 인종주의를 합리적 이데올로기로

 바라본 것이다. 아렌트는 "누군가가 유대인으로서 공격받을 때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억압받는 자들과의 연대투쟁을 믿는 패리아였음에도 불구하고 앞선 선언을 흑인에게 확장해 적용하진 못했다. 오히려 사회적 차별을 정치적 수단으로 불법화해서는 된다며 극단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인종주의가 아닌 이상 개인의 자유롭고 합리적인 차별에 돌을 던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충분히 혹자들이 그녀 주장의 이중성을 의심할 있는 부분이다.

 한편 그녀는 해방과 자유를 엄밀히 구분한 있다. '누군가로부터의' 소극적 해방이 정치적 평등의 장을 만드는 적극적 자유의 필요조건이 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은 없다는 것이다. 정치의 품격을 높인다는 점에서 제도 창출, 공적 공간의 확보와 같은 자유를 높게 평가했기에 상대적으로 반란과 해방의 가치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한 면이 있다.

 다시 돌아오면, 한나 아렌트는 흑인이 받아왔던 차별에 둔감하고 낙천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 차별' 또는 '해방' 관련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옹호한 유대인은 강제성을 억압 나치의 박해를 받은 전례가 있기 때문에 해방의 개념보다는 '혁명' '자유' 의미에 방점을 찍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의식적 패리아가 되기도 하고 유대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있었다. 이렇듯 그녀는 자신만의 이념적 지표를 세우고, 역설적이라 비난받을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진리, 정치 그리고 거짓말>

제목 '우리는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답의 적실성을 얻을 있는 부분은 장이다. 마디로 옮고 그름의 기준이 모호해지는 시대에, 만들어진 이미지에 선동되어 현실이 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지고 정치적 책임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철학자는 불변의 참된 지식, '이성적 진리' 부르는 것을 중시하며 '사실적 진리' 불리는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주관적 옳고 그름의 주장을 평가절하한다. 한나 아렌트가 철학자와 다른 점은 바로 부분이다. 그녀는 정치철학이 행사할 있는 역할의 중요성을 인지했고 위험성 또한 간파했다. 가짜뉴스와 이미지메이킹이 얼마나 권력을 공고화할 있는지, 전방위적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러한 일은 얼마나 자주 등장하여 폭력을 수반하게 비판적 기준을 가지고 의심해야만 한다. 책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 정치적 삶에 대한 책임을 각자가 져야 한다. 개개인이 만장일치의 역설에 빠진다면, 힘있는 자들이 저지르는 정치적 부패, 추악한 모습에 방관하고 냉소한다면 정치적 억압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요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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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섬 : 나의 투쟁 4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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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시간의 상대속도 법칙

 자신의 생일이 돌아오기   전부터 손꼽아 기다리던 날들이어른에게 허용된 사회적 권리를 얻기까진 아득히 멀게 남은 것만 같아 입을 삐죽 내밀던 날들이 기억나는가그러다 문득 생일이 생일인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날들이 많아지고주어진 자유가 빚쟁이처럼  등을 떠밀어 마감기한을 맞춰가듯 살아야 하는 날들이 일상으로 자리잡는다 우린 달라도 너무 다른  마음의 경계점을 더듬더듬 찾아가고 싶어하리라.

 어린 시절의  시간이  깜짝할  지나가는 이유는 오직 변하는 것이 나이기 때문이며커버린 우리의  년이  깜짝할  지나가는 이유는 오직 변하는 것이  이외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풍경과 보폭은 서로에게 맞춰 움직이지 않는다자신이  km 가든  밖에 보이는 것들이 자전거이냐열차이냐에 따라  차가 빨리 가고 있다 혹은 느리게 가고 있다고 느낀다는 단순한 물리법칙 법칙이 절망스럽기도 하지만 다행스럽기도  이유는 적어도모든 것이 멈춘 채로 머물러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거창한 의미를 지니지 않아도 되는 ''이란 것이다.


행복과 불행의 예측가능성

 유년기  불행에서 행복에 도달하기까지의 거리는 짧다축축한 하얗게 변하는 차창예쁜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접하노라면  오베는  놀라운 풍경 앞에서 슬픔과 불행을 떠올릴 틈이 없었다예측하지 못한 즐거움이  앞에 튀어나올 우리는 그간 자신도 모르게 쌓여온 슬픔우울 같은 감정의 가루를 재채기처럼 흩어보낸다.

 그러나 빤히 예상했기에 조용히 내려앉는 행복은 묵은 감정을 날려보내주지 못한다인과가 정해져 있는 성적직장결혼이라는 행복의 이정표를 세워둔다이정표 사이에  이상의 행복이란 없다고 믿으며 찾으려 행복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그러니우리에게 불행에서 행복에 도달하기까지의 거리는 아득하다이정표를 세워놨으나 그것이 ' ' 이정표가 아닐  있고 그에 도달했을  오히려 좌절할  있다.

 예측하려 하면 할수록 벗어나는 것이 인생이라서어쩌면 그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라서 다행이다행복한 삶을  가능성이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그로부터 떠나온 것이 우리였어서 다행이다.


존재의 온전함 - 어시스의 마법사

 크나우스고르의 유년기 기억 속엔 어머니가 사준  책이 자리하고 있다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금지된 마법을 사용한 게드 때문에 지하세계로부터 빠져나온 그림자는 계속해서 게드를 따라오지만이름을 모르기에 그림자를 없애지 못하고 쫓기기만 한다하지만 자신을 쫓아다니던 그림자가 게드 자신이란   순간부터 게드는  이상 어떤 것에도 통제 당하거나 지배 받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나는 유년 시절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기억력이 좋지 않기도 하거니와담아두고픈 기억보다 묻어두고픈 기억이  많아서일 것이다. 남들에게 차마 말하기 부끄러운 기억들이 나머지 행복한 기억들을 흐려버렸다그에 그치지 않고 평생을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오베 또한 그가 했던 미숙한 행동들을 낯낯이 고백한다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친구 토르를 이기기 위해 좋아하던 소녀 카이사에게 토르가 그의 여자친구와  키스한 시간을 이겨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어리석은 경쟁심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이용한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타인은 없다받아들이기는커녕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의 곁에 있는 것조차 꺼릴 것이다.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외부 세계를 알아간다는  상처 받음의 연속이다하지만  상처까지 껴안을  있을  인간은 더욱 자신의 자아를 대면할  알게 된다그러니 자신이 아닌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고 껴안는 법을 배운 지금 우리는 용감하지만 미숙했던 시절의 우리를 그다지 부끄러워  필요가 없다결과론적 사고는 이런 문맥에서 들먹이면 적당한 것이지 않을까.

 

언제고 빛날 유년의 기억

  이제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어린 시절을 이미 지나간 시험범위처럼 덮어두지만은 않으려 한다 기억 속에는 여전히  곁에 남아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베를 스쳐간 많은 소녀들처럼 다시는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치만 그럼 어떤가감정은 두려움에서 애틋함으로서운함에서 동정과 연민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기에  곁을 지켜와준 사람들은 여전히 새롭다나와 생의  페이지만을 같이  사람들 또한 내가 써내려가는  귀퉁이의 숫자내가  있는  지점의 좌표를 여전히 증명해내고 있기에나에겐 언제고  곁에서 빛나는 존재들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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