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8일 - 생각할수록 애련한 조성기 오디세이 1
조성기 지음 / 한길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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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가 역사소설 <사도의 8일>을 우리에게 들고와 2020년을 열었다. 내가 처음으로 읽는 역사소설이기는 하지만 영화로도 인상깊게 각색된바 있는 사도의 이야기이기에 끌렸고, 부제가 주는 저릿한 느낌이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또 역사에 그리 정통한 편은 아니지만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말을 종종 한 적이 있다. 엄격한 규율, 정통과 법칙 속에서 살아가는 당대의 사회가 누군가에겐 숨막히기도 하겠지만, 나에겐 한편으로는 긴장감 속에서 그만큼 각자가 갈구하는 것이 살아 숨쉬는 사회로 여겨졌다. 그것이 개인적 입신양명이 되었건, 문화의 부흥이 되었건, 나라의 기강이 되었건 간에 말이다.


문학이 가진 힘은 대단하다. 역사와 달리 문학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만을 부각하지 않고 내 눈에 그저 보이는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 볼 뿐이다. 업적을 세운 이들로 시대를 구분하는 역사는 우리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하지만, 못다 이룬 것이 남아 있는, 활짝 피지 못한 채 스러져간 사람들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이 소설은 잊혀져간 한 인간을 묘사함으로써 안타까움과 사랑 그 사이의 감정에서 당시의 시대적 비극을 바라보게 하고 반면교사적 시야를 갖게 한다. 

흔히 역사가 시대적 배경인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대사가 끝날때마다 화면 밑에 달아지는 각주를 읽기 바빴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성기 작가의 서술방식은 주의를 그런 식으로 독자의 주의를 흩뜨리지 않는다.


영화 <127시간> 같이 훗날 사도라 불리는 소조가 8일간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처절하게 죽어가는지를 그린 소설이었다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뒤주 안에서 '생존'을 떠올리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암벽에 떨어진 사람처럼 뒤주에 갇힌 것이 아니라 훗날 영조라 불리게 되는 대조의 명으로 가둬진 혹은 스스로가 가둔 공간일 뿐이다. 그렇기에 사도가 뒤주 안에서 죽어간 시간은 8일이지만 그가 회상한 과거는 그의 죽음으로부터 40여년 전, 그러니까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격화된 경종대로 거슬러 간다. 사도는 자신을 죽음으로 휘몰아쳐온, 돌풍같던 27년 과거를, 혹은 40년 역사를 돌아보며 생을 마감한다.


<사도의 8일>의 서술방식은 당대 소개되었다면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날짜를 기준으로 8개의 장으로 나누어 사도세자의 시각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시각에서도 그들이 목격한 조선의 역사를 회상하게 한다. 그로써 사도세자와 그의 세손(훗날 정조) 사이 잊혀진 아내 혹은 어머니, 즉 모든 조선 역사 속에서 가려진 또 하나의 집단인 여성을 끄집어낸다. 남편이 뒤주에 갇힌 시간들 속에서 비통함을 느끼지만 아들 이산을 생각하며 수도 없이 죽음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었을 그녀의 8일. 사도세자가 별세한 뒤 여윈 몸으로 뒤주에 들어가 가만히 무릎을 꿇고 엎드린 혜경궁 홍씨가 주는 여운으로 끝을 맺는 소설.


빙애의 일화에서 작년 흥행한 영화 <조커>를 본 기억을 떠올렸다. "광기를 표출하는 남자를 연민한다.", "끔찍한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음으로써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인식을 공고화 한다." 라는 친구의 신랄한 비평을 듣고 궁금해져 보러 간 영화였는데 그 때 나는 친구의 주장에 강하게 반박했다. 예술이나 문학은 누군가를 연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물론 시대가, 상황이 누군가를 극한으로 몰아넣어 미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소조가 한 번도 대조로부터 마음껏 사랑받지 못했음을, 자신을 지켜주는 이들이 떠나가고 서로를 헐뜯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당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견뎌야 했던 시간을 연민하진 않겠다. 하지만 그를 광기와 죽음으로 몰고 간 시대가 그저 잘못된 시대였거니, 사도가 시대를 잘못 타고났거니 하고 가볍게 넘기지만은 않으려 한다. 


대의나 정의가 사사로운 감정에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사람이 내 사람일 때 느껴야 하는 갈등,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밀려오는 고통의 무게를 사소하게나마 느낀 적이 있다. 내게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줄 만큼 내가 옳다고 여기는 가치는 진정으로 옳은 것인가. 그 가치를 끝까지 밀고나갈 수 있을 만큼 나는 그리도 단단한 사람인가.

하물며 한 나라의 대를 잇는 조선의 왕은 어땠겠는가. 영조는 이인좌의 난으로 정통성을 의심받고 기강이 흔들리자, 탕평을 본격적으로 내세우고 노론과 소론의 공생을 도모하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 했다.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지만 그들이 왜 분파를 만들어 갈라져있는지 자신들도 알지 못하고 무의미한 당쟁을 일삼는 조정에서 사화와 옥사가 또 다시 반복되어 무의미하게 수백 명이 죽어가는 상황을 멈추려 했다.


빙애의 일화는 소조와 대조의 행위를 오버랩 하는 듯하다. 빙애를 죽이고 나서야 사랑하고[愛] 사모함[戀]을 느낀 소조, 소조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나서야 생각할수록[思] 슬퍼진다[悼]는 시호를 내린 대조. 의대증이니, 시대적 어지러움이니 우리를 흔드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 때가 바로 내 옆의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용기가 필요한 순간일 것이다. 마치 매순간 함께 있어 그 소중함을 알지 못했지만 사도세자의 곁엔 그와 같이 슬퍼하며 그의 모든 것을 품었던 혜경궁 홍씨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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