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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한 7가지 질문
강남순 지음 / 한길사 / 2020년 2월
평점 :
한길사에서 나온 페미니즘 서적은 다양하다. 다른 서포터즈 분들이 혜택도서로 페미니즘 서적을 신청해
받아보는 것을 보면서도 ㅡ 그중 '남자' 서포터즈 분들이 많은 건 놀라웠다.
일상에선 페미니즘에 발작하는 남성들만 봐왔기에 ㅡ 여태 그 책들을 읽어보지 않은 건 페미니즘 안에서도 담론이 너무나 다양하고
특정 저자의 특정 페미니즘 담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활동이 끝나기 전에
'한길사'의 페미니즘 저서를 꼭 한번 읽어보고 싶었고 마침 강남순 작가의 이번 신작은
제목이며 목차며 담백해서 좋았다. 편을 가르고 소위 말빨로 남성을 눌러버리는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같은 공격적 배타적 접근 방식 말고, 이론 탐구적으로 천천히 페미니즘에 접근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간중간 울컥 흥분하는 대목이 있었지만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쓰려고 노력했다. 이 감정은 페미니스트로서
나오는 감정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나온 감정이기에. 진정한 연대를 지향하는 페미니즘을 위해 우선은 ‘생물학적 남자’에게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서평은 저자의 담론을 재구성해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가 권장한 이 책을 접하는 방식 '아하'의 경험으로
책에 소개된 근본 질문과 깨달음을 정리하고 그 외 페미니즘의 이론적, 지식적 측면에서 얻어갈 수 있는 내용,
마지막 끝맺음말로 이번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번 글은 한 구절 한 구절 버릴
수가 없는 책을 다룬 글이므로 좀 길어질 듯하다.
1. 요즈음 세상에 자기만 열심히
하면 무슨 차별을 받겠어? 사소한 문제에 불필요한 에너지 쏟지 말고 이미 주어진 일에나 최선을 다해.
놀랍게도 저자 또한 페미니즘 이론을 배우기 전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사실 놀라운 건 아니다.
모두가 힘들이지 않으면 편하게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사람들이 사고의 안일함만을
취하고 페미니즘의 근원 물음에 특히나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는, 성차별이 인종차별, 계층차별과는 달리 공적영역을 넘어 심지어 가족 안, 즉 사적영역에서도 행사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삶의 영역에서 뿌리깊게 확산되어 이에 대한 근원적 물음은 곧 일상의 근원적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이 말하는 '사소'한 문제는 그 광범위함에 비추어볼 때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만큼 일상에 깊이 자리잡은
불편한 진실을 모두가 처음부터 환영할 순 없겠지만 사소한 것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장벽을 넘으면 우리는 사회개혁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
2. 따로 공부할 필요 없이
알 수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이다.(혹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우리는 -ism 즉 '~주의'가 붙은 학문 사조에 대해 감히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유독 페미니즘만은
누구나 그 근원이 되는 배경과 지식을 공부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이는 페미니즘을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태도이다. 왜곡된 단순화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위험하다.
학문적 무지를 인정함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으로 말랑말랑한 상태를 의미하지만
이다/아니다를 단정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까지 이분법적 사고로 물들일 위험이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빙산의 일각일 뿐 나머지 세계에 접근하려면 이론적 조명이 필요하다.
변혁운동이 의식화 과정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만약 의식화가
결여된다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설득할 힘을 가지지 못해 변혁운동의 지속성과 확장성 또한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문적 연구와 이론적 성찰을 실천에 비해 가볍게 치부하는
태도 또한 옳지 못하다. 여기 저자가 언급한 딱 들어맞는
비유가 있다. 냉장고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땐 문제될 것이 없지만 고장이 났을 때는 냉장고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왜 문제가 생겼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론의 역할이다.
나 또한 한길사 덕에 읽을 기회가 없었다면 페미니즘 서적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굳이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분야라 생각하여 그것을 모든 일과 모든 서적의 후순위로 그것을 미뤘을지도 모른다. 바쁜 일상 속 주어진 성찰의 기회에 대해 새삼 다시
감사한 부분이다.
3. 내 경험 좀 들어볼래?
남자다움의 증명으로 성매매 경험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은
남성문화가 있다. 음담패설을 무용담처럼 주고받고 단체 카톡방이나 회식이
끝난 자리에서 종종 여성은 성적 놀잇감으로서 지배-피지배 관계에 놓인다. 그러나 정작 행위자들은 그것이 여성혐오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노골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여성혐오를
드러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도 여성혐오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예뻐해주잖아
뉘앙스 등의 발언, 남자의 관심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여자들과 질투 관계에 놓이는 여성들의 태도.
이것들 모두 여성혐오를 내면화한 다양한 모습니다. 남성과 여성을 지배와 종속 관계로
각인시키고, 혹은 스스로 각인하고 결국 남성중심적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동조자가 되는 것이다.
4. 남성도 성차별의 피해자이다!
베나타가 주창한 '제2의 성차별'에 따르면 남성도 다양한 폭력의 희생자라고 한다. "남성은 군대처럼 갈등상황이 아닌
곳에서도 생명이 희생되며/ 군대에서 남성에게 품위를 손상시키는 짧은 머리를 하게 하며/ 여성보다 남성에게 육체적 체벌이 더 많으며/ 감옥에는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으며/
동성애 남성이 레즈비언 여성보다 더 차별받으며/ 남성은 육아휴직에서 차별받는다."
등의 근거를 든다. 하지만 남성에게 그러한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다른 여성이 아닌
남성이다. 즉 성차별에 의한 불이익이라기보다, 진정한 남성됨을 전사(warrior)로 생각하는 남성중심주의적 문화에 의한 불이익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태어날 때 생물학적 남자였던
사람이 남성으로서의 삶을 거부하는 것은 전통적인 남성중심적인 젠더 위계주의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트렌스여성은 트렌스남성보다 편견과 성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반면 여성이 성폭력의 희생자일 경우 가해자는 여성이 아닌 남성이다. 이처럼 가부장제적 지배논리는 권력을 지니지 못한 남성들에게조차 종속된 삶을 강요하게 하며, 가부장적 가치를 거부하는 남성을 남자답지 못한 남자로 간주한다.
또한 애트우드는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이 자신을 비웃을 것을 두려워하지만,
여성은 남성이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여성혐오는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여성에 억압과 차별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의미의
남성혐오 개념이 존재한 적은 없다. 즉 여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남성이 취급된 역사가 '없다.'
5.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표면적으로 생물학적 남성은 여성의 성차별 경험에서 당사자성이
결여된 존재이기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 구호만 외치고 트랜스여성, 흑인 남성, 성소수자 남성을
배제하는 페미니즘은 지속될 수 없을 뿐더러 공허할 뿐이다. 분노에는 파괴적 분노와 성찰적 분노가 있다.
파괴적 분노는 피해자 의식 속에 침잠하여 관계의 파괴로 이어지는 분노다. 파괴적
분노를 느끼는 여성주의적 페미니즘이 가부장제적 관점과 다른 것은 오직 그 가치의 전도일 뿐 다른점은 없어보인다.
여성의 절대적 피해자성을 주장하기 어렵다. 여성혐오를 재생산하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외모,교육,나이 등 요소에 따라 같은 여성이라도 각기 다른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기도 한다.
인종, 성정체성, 계층, 나이, 장애여부으로부터 차별받는 남성도 있다. 또 성소수자
백인남성은 자신의 성소수자성을 내세우며 절대적 희생자 위치만을 강조할 수도 있다. 이러한 교차성 개념은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뀔 수 있는지를 보게 한다. 자신의 다차원적 사회적 역할 수행과 책임을
인식하고, 각기가 지닌 인식의 사각지대를 일깨워 대립과 차별의 경계를 허무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페미니즘의
최종 목표이다.
결론적으로 페미니즘은 여성남성간 성차별문제에만 매달리는
협소한 사상이어서는 안 된다. 이는 성차별의 우선적 중요성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성차별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되 다층적 차별을 해결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도착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보편주의와 뜻이 통하는 것 같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코즈모폴리탄 페미니즘은 개별적
정황에서 출발하여 보편 평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보편주의보다 구체적, 실천적 담론이다.
6. 침묵이 답이다.
이 모든 최근의 페미니즘 확산 노력과 미투운동, 추문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흔히 이 편함을 추구하는 이들을 중립'충'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은 명백히 사고의 오류를 드러내진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어떤 쪽으로든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침묵은 그들이 목격한 바, 들은 바에 대한 묵인을 의미하고 묵인은 가해행위의 지속성을 촉진한다.
비의도적으로 차별이 난무하는 현실의 현상유지를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자기정체성을
넘어서 페미니즘이 요구하는 개별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선 적어도 의도적으로 침묵을 깨는 그 불편한 행위가 어느정도 수반되어야 한다.
<페미니즘에 관한 이론적
지식>
1. 푸리에가 쓴
féminisme은 라틴어의 ‘여성’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한다. 즉 생물학적 female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요즘 사용하는 정치적 입장을 담은 페미니즘이 아니었다.
2. 트렌스젠더와 반대되는 개념은
‘시스젠더'cisgender로서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성과 사회문화적 젠더가 일치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cisman과 transman 또는
ciswoman과 transman으로 젠더 정체성을 표현하는 표현이 영어권에서 대중화되고
있다.
3. 간성(intersex)가 여자와 남자의 생식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개념의 third sex라면 트렌스젠더는
사회문화적 성별로서 third gender이다.
4. 영어로 여성혐오를 뜻하는
용어는 미소지니(misogyny)이다.
5. 여성혐오의 두 모델
-사창가모델: 성적욕구를 충족시키는 존재
-농장모델:종족 보존을 위한 출산,양육,가사 등의 역할을 하는 존재
6.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 페미니즘'들'
-자유주의 페미니즘:
평등한 제도와 법과 같은 객관적 조건들의 변화가 필요하다. 인간 개체성,
독립성을 강조하다 보니 계층, 인종 차별 요소를 보지 못하는 것이 한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여성의 무임금 가사노동 평가절하하며 대안으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과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제시한다. 하지만 임금지불은 가사노동이라는 단순노동 영역에 여성을 더욱 제한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또
다른 한계는 여성을 억압하는 것은 남성이 아닌 자본이라고 여김으로써 젠더 관점을 부차적인 것으로 본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자본주의(공적영역 억압)뿐만 아니라 가부장제도(사적영역 억압)까지 비판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성은 왜 억압받고있는지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
-급진주의페미니즘:
여성억압의 근본원인은 여성의 생물학적기능이다. 임신, 출산, 인공유산, 포르노그라피, 성희롱과 성폭력 등의 문제 해결책을 탈가부장제와 피임, 체외수정 등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본다.
cf) 생물학적 모성이 중요하다고
보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남성이 유일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출산기능을 축소한다며 계약에 근거한 모성에 반대한다. 출산 기능을 축소화 하는 것은 오히려 남성에게 더욱 강력한 지배도구를 주는 것과 같다는 주장을 펼친다.
한계: 출산 기능을 수행할 때 비로소 정상적인 여성이 된다고
여긴다. 공적활동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비혼이나 무자녀 여성은 비정상적 여성이 된다. 워킹맘인 여성은 전문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7. 페미니스트 보이콧이 필요하다.
이는 경제적 효과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회정치적 저항의미를 지닌다. www.ethicalconsumer.org/ethicalcampaighns/boycotts
->인권이나 생태적 관점에서
문제되는 기업이나 상품리스트를 만들어 보이콧을 권한다.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재현하고 성적대상으로 투사하는
영화,음악,잡지 또는 기업에 보이콧 통해 의식 개혁의 계기를 마련한다.
글을 마치며
우리는 모두 인식의 사각지대를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 오직
형성 중인 페미니스트이다. 각자의 정황이 다르듯 사실이란
없고 다만 해석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들은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 '함께 그리고 따로따로' 씨름하고, 성찰하고, 개입하고, 연대하라고 말한다.
강남순 저자의 페미니스트 담론은 극단적이지 않아 만족스러웠지만
다소 이상적, 추상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를 정의하는 고정된 하나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차별과 혐오에 저항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처한 정황의 수만큼의 담론이 존재함을 깨닫는다면 이러한 담론이 최선임도 알게 될 것이다.
친언니가 한번은 회사에서 무거운 짐을 들 일이 있을 때
일부러 자기가 든다고 말했다. "여자들은 그들에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을 외치면서도 이럴 때만 여자이고 싶어한다." 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란다.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해명하기 위해 오직 여성만이 노력해야 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증한다. 진정한 의미의 페미니즘은 이분법적으로 단순화된 이론이 아님을 우리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충분히 이해했다. 우리는 젠더적 우열을 가리고 지배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페미니즘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의 존재를 위협하는 차별과 억압에 저항할 뿐이다.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이론적 관심을 가지고 노력할 필요성을 남성들이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지배적 위치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지배-종속적 관계를 아직도 상당히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누군가는 BC 2세기부터 시작된, 이미 유구한 역사를 지닌 가부장제도를 되돌릴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시작점은
존재해야 하고 이미 변혁의 움직임은 시작되었다. 지난 근대 역사 동안 인류가 이룩한 건 법적 재산권,
교육 기회의 평등권 등 눈에 보이는 법과 제도였다. 하지만 이는 평등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다. 구체적 방법으로 '모두'가 진정한 평등을 누리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변화, 즉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과 관점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하고 남은 21세기 페미니즘의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근대 객관적 변화와는 달리 토론과 자기성찰, 부단한 학업 등을 통해 아주 조금씩 변화가 가능한
부분이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설득-자각-연대의 선순환 고리를 만드는 탄탄하고 왜곡 없는 초기 이론적, 실천적 작업은 쉼없이 구르고
굴러 생각보다 빨리 이 사회에 뿌리 깊에 잔존하는 지배-피지배 사고의 고리를 끊어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