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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섬 : 나의 투쟁 4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9년 10월
평점 :
하나, 시간의 상대속도 법칙
자신의 생일이 돌아오기 한 달 전부터 손꼽아 기다리던 날들이, 어른에게 허용된 사회적 권리를 얻기까진 아득히 멀게 남은 것만 같아 입을 삐죽 내밀던 날들이 기억나는가. 그러다 문득 생일이 생일인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날들이 많아지고, 주어진 자유가 빚쟁이처럼 내 등을 떠밀어 마감기한을 맞춰가듯 살아야 하는 날들이 일상으로 자리잡는다. 이 때, 우린 달라도 너무 다른 이 마음의 경계점을 더듬더듬 찾아가고 싶어하리라.
어린 시절의 한 시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이유는 오직 변하는 것이 나이기 때문이며, 커버린 우리의 일 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이유는 오직 변하는 것이 나 이외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풍경과 보폭은 서로에게 맞춰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이 몇 km로 가든 창 밖에 보이는 것들이 자전거이냐, 열차이냐에 따라 내 차가 빨리 가고 있다 혹은 느리게 가고 있다고 느낀다는 단순한 물리법칙. 그 법칙이 절망스럽기도 하지만 다행스럽기도 한 이유는 적어도, 모든 것이 멈춘 채로 머물러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흔히 부르는, 거창한 의미를 지니지 않아도 되는 '삶'이란 것이다.
둘, 행복과 불행의 예측가능성
유년기 때 불행에서 행복에 도달하기까지의 거리는 짧다. 축축한 눈, 하얗게 변하는 차창, 예쁜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접하노라면 칼 오베는 그 놀라운 풍경 앞에서 슬픔과 불행을 떠올릴 틈이 없었다. 예측하지 못한 즐거움이 내 앞에 튀어나올 때, 우리는 그간 자신도 모르게 쌓여온 슬픔, 우울 같은 감정의 가루를 재채기처럼 흩어보낸다.
그러나 빤히 예상했기에 조용히 내려앉는 행복은 묵은 감정을 날려보내주지 못한다. 인과가 정해져 있는 성적, 직장, 결혼이라는 행복의 이정표를 세워둔다. 이정표 사이에 더 이상의 행복이란 없다고 믿으며 찾으려 행복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에게 불행에서 행복에 도달하기까지의 거리는 아득하다. 이정표를 세워놨으나 그것이 '내 삶'의 이정표가 아닐 수 있고 그에 도달했을 때 오히려 좌절할 수 있다.
예측하려 하면 할수록 벗어나는 것이 인생이라서, 어쩌면 그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라서 다행이다. 행복한 삶을 살 가능성이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떠나온 것이 우리였어서 다행이다.
셋, 존재의 온전함 - 어시스의 마법사
크나우스고르의 유년기 기억 속엔 어머니가 사준 한 책이 자리하고 있다.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금지된 마법을 사용한 게드. 그 때문에 지하세계로부터 빠져나온 그림자는 계속해서 게드를 따라오지만, 이름을 모르기에 그림자를 없애지 못하고 쫓기기만 한다. 하지만 자신을 쫓아다니던 그림자가 게드 자신이란 걸 안 순간부터 게드는 더 이상 어떤 것에도 통제 당하거나 지배 받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나는 유년 시절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기억력이 좋지 않기도 하거니와, 담아두고픈 기억보다 묻어두고픈 기억이 더 많아서일 것이다. 남들에게 차마 말하기 부끄러운 기억들이 나머지 행복한 기억들을 흐려버렸다. 그에 그치지 않고 평생을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칼 오베 또한 그가 했던 미숙한 행동들을 낯낯이 고백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친구 토르를 이기기 위해 좋아하던 소녀 카이사에게 토르가 그의 여자친구와 한 키스한 시간을 이겨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어리석은 경쟁심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이용한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타인은 없다. 받아들이기는커녕,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의 곁에 있는 것조차 꺼릴 것이다.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외부 세계를 알아간다는 건 상처 받음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상처까지 껴안을 수 있을 때 인간은 더욱 자신의 자아를 대면할 줄 알게 된다. 그러니 자신이 아닌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고 껴안는 법을 배운 지금 우리는 용감하지만 미숙했던, 그 시절의 우리를 그다지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결과론적 사고는 이런 문맥에서 들먹이면 적당한 것이지 않을까.
넷, 언제고 빛날 유년의 기억
이제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어린 시절을 이미 지나간 시험범위처럼 덮어두지만은 않으려 한다. 그 기억 속에는 여전히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칼 오베를 스쳐간 많은 소녀들처럼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치만 그럼 어떤가. 감정은 두려움에서 애틋함으로, 서운함에서 동정과 연민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기에 내 곁을 지켜와준 사람들은 여전히 새롭다. 나와 생의 한 페이지만을 같이 한 사람들 또한 내가 써내려가는 책 귀퉁이의 숫자, 내가 서 있는 이 지점의 좌표를 여전히 증명해내고 있기에, 나에겐 언제고 내 곁에서 빛나는 존재들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