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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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지 않은 주제를 번역체로 읽어야 하는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한나 아렌트의 사상에 대한 나의 배경지식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알던 것에만 끌리는 독자 명의 일상에, 잠시 멈추어 낯선 이를 이해하고 세계를 통찰하는 시간을 선사해준 한길사에 고마움을 전한다.

책은 전반부 한나아렌트의 생애를 다루고 점차 그녀의 사상을 현대 정치에 적용하여 확장시켜나간다. 개인적으로 리처드 번스타인이 전반에 견지하는 객관적 시각이 매력적이다. 절대적 우상화도 맹목적 비난도 아닌 우리가 함께 사유하게 하는 책이기에 전반에 걸쳐 소재가 되는 한나 아렌트는 그저 우리가 현대 정치를 냉정한 태도로 바라보고 그를 적극적 행동으로 옮기게 해주는 출발점으로 작용할 뿐이다.

 간단히 말해 한나 아렌트는 억압받는 자들의 권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정치사상가이다. 목차 '충성에 근거한 반대 -아렌트의 시온주의 비판' '인종주의와 분리', '악의 평범성' 목차까지는 그녀의 생애 동안 직접 보고 겪은 정치적, 사회적 사건에 대해 그녀가 가졌던 태도가 녹아있다. 물론 과정에서 아렌트가 받아왔던 비판도 작가는 가감없이 소개하며 함께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이후 '진리, 정치 그리고 거짓말', '복수성, 정치 그리고 공적 자유', '미국혁명과혁명정신', '개인의 책임과 정치적 책임' 목차에서는 그녀가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그녀의 사상을 바탕으로 정치와 권력, 억압과 자유에 대한 고찰을 확장해 나간다. 이를 통해 작가는 현대 정치를 무사유로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경고의 메시지를 주기도, 정치의 추악한 모습에 절망과 냉소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그로부터 회복의 여지를 주기도 한다.

<충성에 근거한 반대- 아렌트의 시온주의 비판>

그녀가 철학자의 면모를 지녔다고 넉넉히 인정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여기부터였다. 오래도록 무국적자로 지내야 했던, 나치를 피해 도망친 유대인 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겐 '개인적' 분노의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다.(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세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길 진정으로 원했다. 그렇기에 모두가 유대인만의 국민국가에 대해 yes 근본 해결책이 아니라며 no 외칠 있었으며, 모두가 아이히만 행위의 악마성에 no 외칠 개인적 무사유 나이브함의 원인을 끄집어내어, 개인 차원의 1차원적 비난에서부터 스스로를 고찰할 성장의 기회를 모두에게 심어줄 있었던 지식인이었다.

나치에 반대하는 유대인으로서 있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끊임없이 사유했다. 그녀 또한 패리아, 유대인이 억압받는 집단과 연대해 싸워야 한다고 믿는 반란자였는데 다만 시온주의자는 아니었다. 시온주의 탄생의 시발점은 이팔 분쟁과 테러 그로 인해 통치권자인 영국이 해당 지역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한 것이었다. 이들은 상황을 이용해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자고 주장한 이들이다.

그녀가 지적한 시온주의자들의 문제는 배타적, 만장일치적 이데올로기 경향이었다. 만장일치가 '동의' 다른 점은 ' 입증된 반대' 대하는 태도이다. 시온주의의 감정적 경향에서 나온 유대인들의 국민국가 건설에 아렌트는 끊임없이 반기를 들었다. 유대인 국가의 건설로 인해 팔레스타인 다수 민족인 아랍인들에게서 또한 전투적 민족주의를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엔총회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이 결정된 이후에도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전쟁이 발발했는데, 시온주의자들의 이상대로 유대인 민족국가가 건설된다면 이전의 상황보다 유대인들이 위협받는 상황이 것임은 분명했다.

 그러기에 아렌트는 자치정부에 많은 권한을 주길 웠했다. 유토피아적이라는 시온주의자의 이전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렌트는 연방제 국가라는 그녀의 주장이 보다 현실적임을 입증해내었다. 비록 누구도 그녀의 주장에 동조해주지 않았지만 언제든 누구로부터든 시작될 있는 집단적 의견일치, 재앙적 미래를 경고했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인종주의와 분리>

아렌트가 받았던 비판의 원인이 되었던 주장이자 다만 가지 아쉬운 점은 인종주의를 합리적 이데올로기로

 바라본 것이다. 아렌트는 "누군가가 유대인으로서 공격받을 때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억압받는 자들과의 연대투쟁을 믿는 패리아였음에도 불구하고 앞선 선언을 흑인에게 확장해 적용하진 못했다. 오히려 사회적 차별을 정치적 수단으로 불법화해서는 된다며 극단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인종주의가 아닌 이상 개인의 자유롭고 합리적인 차별에 돌을 던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충분히 혹자들이 그녀 주장의 이중성을 의심할 있는 부분이다.

 한편 그녀는 해방과 자유를 엄밀히 구분한 있다. '누군가로부터의' 소극적 해방이 정치적 평등의 장을 만드는 적극적 자유의 필요조건이 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은 없다는 것이다. 정치의 품격을 높인다는 점에서 제도 창출, 공적 공간의 확보와 같은 자유를 높게 평가했기에 상대적으로 반란과 해방의 가치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한 면이 있다.

 다시 돌아오면, 한나 아렌트는 흑인이 받아왔던 차별에 둔감하고 낙천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 차별' 또는 '해방' 관련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옹호한 유대인은 강제성을 억압 나치의 박해를 받은 전례가 있기 때문에 해방의 개념보다는 '혁명' '자유' 의미에 방점을 찍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의식적 패리아가 되기도 하고 유대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있었다. 이렇듯 그녀는 자신만의 이념적 지표를 세우고, 역설적이라 비난받을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진리, 정치 그리고 거짓말>

제목 '우리는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답의 적실성을 얻을 있는 부분은 장이다. 마디로 옮고 그름의 기준이 모호해지는 시대에, 만들어진 이미지에 선동되어 현실이 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지고 정치적 책임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철학자는 불변의 참된 지식, '이성적 진리' 부르는 것을 중시하며 '사실적 진리' 불리는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주관적 옳고 그름의 주장을 평가절하한다. 한나 아렌트가 철학자와 다른 점은 바로 부분이다. 그녀는 정치철학이 행사할 있는 역할의 중요성을 인지했고 위험성 또한 간파했다. 가짜뉴스와 이미지메이킹이 얼마나 권력을 공고화할 있는지, 전방위적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러한 일은 얼마나 자주 등장하여 폭력을 수반하게 비판적 기준을 가지고 의심해야만 한다. 책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 정치적 삶에 대한 책임을 각자가 져야 한다. 개개인이 만장일치의 역설에 빠진다면, 힘있는 자들이 저지르는 정치적 부패, 추악한 모습에 방관하고 냉소한다면 정치적 억압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요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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