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런 제닝스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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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작가 캐런 제닝스는 아프리카의 잊힌 슬픔의 역사에 대해 조명하고자 여러 작품을 썼고, <섬>으로 2021 부커상 후보로 선정돼 자국을 넘어 세계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부끄럽게도 식민지 시대 아프리카에 대해선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는데, 소설 <섬>으로 한 인간의 비참하고 고독한 생을 바라보며 민족 전체의 슬픔이 개인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낱낱이 목격하고야 말았다.


일흔 살의 노인 새뮤얼은 섬 하나를 홀로 지키고 있는 등대지기이다. 바다로 떠밀려 오는 시체 몇 구를 발견해 틈틈이 신고했으나, 같은 민족으로 추정되지 않는 시신에 대해선 국가의 대응이 영 시원찮다. 새뮤얼은 자신이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젊은 남자의 시신을 발견하지만 이내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두막으로 데려온다.


새뮤얼과 남자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며칠 간 돌보다가 공급선이 오면 태워 보내려고 하지만, 남자의 부정확하나마 "살려주(살려주세요)"라는 말을 듣고 그를 숨겨 준다. 그리고 그가 불법 입국을 시도했다가 사고를 당한 난민 출신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갑작스레 새뮤얼의 나날에 들어온 이 남자로 인해, 새뮤얼은 잊고 싶던 과거를 계속해서 떠올리고 폭력의 역사로 점철된 이 개인사는 '남자가 자신을 죽이고 이 섬과 오두막을 차지하려 든다'라는 망상으로 이어진다.


정치범으로 몰려 약 20여 년을 교도소에서 복역했던 나날의 기억을 통해 가족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잃어 버린 젊음에 대한 후회와 통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새뮤얼과 그 일행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선물해 줄 것만 같던 독립은 사실상 그들처럼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이들에겐 그 어떤 희망도 되지 못했고, 실체 없는 허상 그 자체였다.


폭력적인 행사에 참여하면서도 누군가의 목숨을 해치지는 않았던(못했던) 새뮤얼의 보답받지 못한 자부심은 세월이 흐르며 아픈 기억과 함께 서서히 부서져 내렸는지도 모른다. 이방인 남자를 향한 오해와, 그 오해가 풀리며 생겨났던 따스한 위안과 연대의 마음은 남자가 늙은 암탉의 목을 꺾으면서 완벽하게 지워져 버린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도 공감받지도 못했던 인생은 결국 슬픈 경계심으로 끝을 맺고 만다. 새뮤얼과 섬은 다시 침묵하며 혼자가 된다. 마치 남자가 없었던 나날들처럼, 남자를 지워 버린 그가 다시금 안정을 찾았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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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 - 신화에 가려진 여자
제시 버튼 지음, 올리비아 로메네크 길 그림, 이진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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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신화, 어렸을 땐 멋모르고 재밌게 읽었다지만 요즘 들어 생각해 보면 어쩐지 못마땅하고 부조리하게 여겨지는 부분도 많다. 신이라고 해서 다 완벽한 존재는 아니고, 인간과 별 다를 바 없다는 점이 큰 깨달음이었지…… 제시 버튼의 <메두사>는 그리스로마신화 속 명암을 재조명하며 애매하다고 느꼈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 주는 놀라운 작품이었다.


다들 페르세우스와 메두사에 얽힌 이야기는 알 것이다. 철저하게 페르세우스의 입장에서 쓰인 그 이야기에서 메두사는 그냥 무수히 많은 뱀이 머리에 달린 흉측하고 잔악한 괴물일 뿐이었다. 그 누구도 메두사의 이야기는 궁금해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메두사의 머리를 도려낸 페르세우스만을 영웅으로 칭송하기 바빴다.


포세이돈의 욕망을 위한 희생자였으며 그로 인해 억울하게 아테나에게 벌을 받게 된 어린 나이의 메두사와 두 언니들의 고립된 삶…… 페르세우스의 표류로 한순간이나마 친구와 연인을 얻은 듯했으나, 끝내 메두사를 한 명의 사람이 아닌 해치워야 할 괴물로 받아들인 페르세우스의 잘못된 판단(물론 그에게도 어머니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어서 이해를 못할 바는 아니다)으로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난다.


아무래도 메두사의 시점에서 보는 이야기이기에 메두사에게 쉽게 이입할 수밖에 없었는데, 단 며칠 간의 대화로 사랑에 빠져 너무 쉽게 상대를 믿어 버린 소녀의 심정이 어쩐지 과거의 순진했던 내 모습을 상기하게 했고, 고향에 애인을 두고 왔다고 말하면서도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다', '너는 내가 그토록 기다려 왔던 여자다'라는 류의 가벼운 대사를 내뱉고서 메두사의 정체를 알자마자 쉽사리 돌변해 버린 페르세우스가 ㅋㅋㅋ 아무리 어린 소년이라고는 하지만 조금 비겁하게 느껴졌다.......


새로이 해석된 <메두사>에는 여성의 수동적인 태도만을 미덕으로 삼았던 옛 사회상을 그대로 그려 내 같은 여자로서 억울하게 느껴지고 공감되는 장면이 많았다. 솔직히 나조차도 메두사의 이야기는 여태 궁금해하지 않았기에, 남성신화를 위해 조력자로밖에 등장하지 못한 다른 여성 캐릭터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고 이 점이 특히나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리고 일러스트가 상당히 멋진 책이기에 꼭 종이책으로 보면 더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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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말 풍요의 바다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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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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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을 참기에는 충분히 오래 살았어 - 90세 스웨덴 할머니의 인생을 대하는 유쾌한 태도
마르가레타 망누손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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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 스웨덴 할머니의 인생 철학을 꾸밈없이 담아 낸 담백한 에세이. 이웃집 할머니가 술술 얘기해 주시는 재밌는 인생담 같아서 하루만에 다 읽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모두 현명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마냥 어둡고 우울하고 비관적이기만 한 사람도 많이 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세월이 흐르고 경험이 많아진다고 모두가 똑같은 배움을 얻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런 부정적인 어른들을 반면교사 삼아서 과거의 내 행적에 대해서도 많이 후회하고 있고, 이제부터라도 베풀 줄 알고 따뜻한 감성의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다짐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여전히 정이 없고 신경질적이긴 하다 ㅋㅋ


그런 의미에서 이 에세이가 사랑스럽고 저자를 존경해 마지않는다. 항상 주변인을 소중히 여기고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에 추억을 가득 만들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자기가 그동안 살면서 받아왔던 아름다운 배려를 내리사랑하듯 새로운 세대를 이끄는 젊은이들에게 베풀며 대접하려는 저자의 마음이 너무 아름다운 것 같다. 노화로 인해 이전보다 신체가 부자유스럽고 그에 따라 예민해질 만도 한데, 그것마저 유쾌한 사색으로 넘어가는 태도를 보며 아무것도 아닌 걸로 파르르 분노하는 내 모습이 떠올라서 반성되기도 했다.


<초콜릿을 참기에는 충분히 오래 살았어>라는 제목처럼, '초콜릿을 먹어서 죽든 그보다 훨씬 덜 기분 좋은 무언가 때문에 죽든 어쨌든 곧 죽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라고 쿨하게 말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걸 맘껏 즐기는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상의 다짐이, 크나큰 마음의 여유를 이끌어 내는 게 아닐까?


특히 책의 큰 주축이 되는 정신, 스웨덴의 미니멀 라이프적인 전통 '데스클리닝'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깊히 박혔다. 세상을 떠날 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남기지 말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남은 이들이 되도록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따스한 마음이 이 에세이처럼 우리 삶 전반에 펼쳐진다면, 너나할 것 없이 덜 우울한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무척 재밌고 의미 있게 읽었다! #협찬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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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부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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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기담집>을 읽고 란포에게 사랑에 빠짐. 진실로… 이렇게 매력적인 기담집이 또 있을까? 기이하고, 불길하고, 음침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의 향연이다. 왜 다들 일본 미스터리 하면 란포, 란포 하는지 알겠다.


모든 에피소드가 하나같이 마음에 들었던지라, 10점 만점에 10점 주고 싶다. 사실 단편을 엮어 둔 책은 그다지 기대하고 읽진 않는 편인데(각 편마다 기복이 심한 작품이 많아서) 해당 기담집은 처음부터 끝가지 너무너무너무 매력적이었다. 원래는 며칠에 걸쳐 천천히 읽으려고 했는데 주말 반나절을 통으로 쏟아 완독했다. 진짜 재밌었음.


억지스러운 권선징악이 없어서 더 좋았다. 미스터리 한 사건은 미스터리 그대로 남기는, 어떻게 보면 애매한 결말도 어떤 환상의 세계 속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이게 대체 무슨 전개야!"라고 부르짖게 되는 에피소드도 그저 허무맹랑하지 않고 인간 내면 속 깊이 숨어있는 사악함을 짙게 뿜어내고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어쩐지 현대의 미스터리, 공포의 토대가 되는 작품들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 익숙한데도 새로웠다. 이 시대 사람들은 이 소름 돋는 자극을 얼마나 더 풍요롭게 느꼈을까. 부럽다.


유독 기억에 남는 단편은 <애벌레>인데...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 인간의 생을 향한 집념과, 한순간에 그 집념을 포기해 버릴 수밖에 없는 절망이 여실히 느껴졌다.


란포는 살아있을 당시 대체 어떤 하루를 보낸 걸까? 작품을 위해 매일 이런 류의 생각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면, 왜인지 그가 꺼림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굉장히 그로테스크하고... 어떻게 보면 극히 일본적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이런 음침한 분위기를 좋아해서 무척 맘에 들었지만.......


보통 리뷰에 이런 말은 잘 안 남기는 편이지만 책 만듦새도 일품이었다. 표지가 약간 벨벳 천 느낌 나는데, 그래서 촉감이 상당히 부드럽고 고급스러워서 '에도가와 란포'라는 네임밸류에 딱 걸맞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여름에 읽기 딱 좋은 서늘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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