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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
이소영 지음 / 래빗홀 / 2025년 10월
평점 :
네팔의 여신 쿠마리의 존재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신화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작품(심지어 한국 배경!) 속 등장인물로 만나다니 새롭다. 과거 쿠마리였으며 이제는 여신으로서의 명이 다해 팔려오듯 한국으로 온 소녀 차미바트. 순식간에 살인사건에 휘말려 유력한 용의자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누군가가 차미바트를 살인범으로 확정 판결을 내려야 하는 상황. 결백을 주장하고는 있지만 마치 거미줄에 걸린 듯 철저히 곤경에 처한 이 소녀를 더욱 더 확실하게 구렁텅이로 내몰기 위해, 통역사 도화는 기꺼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뢰인에게 이용당해 주기로 한다...
도화처럼 네팔어를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이들은 적고, 마침 암 치료비로 막대한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도화는 재판에서 차미바트가 불리할 수 있도록 허위 통역을 해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의뢰를 선뜻 맡는다. 하지만 차미바트를 직접 만나고, 그가 말하는 문장들을 곱씹으며 무언가 잘못됐다(이미 허위 통역 의뢰를 받아들인 것 부터가 한참 잘못됐지만 ㅎㅎ)는 생각이 도화의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데...
그저 바다를 보고 싶어 한국에 왔다던 소녀의 말이 도화의 마음을 움직인 탓일까? 놀랍게도 이런 감성에 젖어 있을 시간도 길게 주지 않고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소위 차미바트 사건에 얼기설기 얽힌 충격적인 진실들을 파헤치느라 여념이 없다.
방폐장, 이주노동자, 남성중심사회에서 외국인(심지어) 여성의 사회적 위치 등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모든 요소가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 숭고하고 고귀한 네팔의 여신은 제3의 눈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환상적이면서 호러틱하고... 미스테리어스한 분위기가 내내 감돌아 눈을 떼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도화의 행동력과 판단력이 쏘 나이쓰. 이 시대 여성 주인공으로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배우로 치면 누구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진짜 아는 배우가 없어서... 김태리? 전종서? ㅋ큐ㅠ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은 역시, 도화의 “들었어요.”
이 마지막 한마디가 작품의 깊이감을 1000% 더했다...
아주 멋있고 매력적인 작품이었고, 생소한 네팔 문화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돈과 정치적인 이슈보다 값진, 값지게 여겨야 할 가치가 있다는 걸... 왜 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는 걸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