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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늙어버린 여름 - 늙음에 대한 시적이고 우아한, 타협적이지 않은 자기 성찰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김영사 / 2021년 9월
평점 :
[내가 늙어버린 여름] _ 이자벨 드 크루티브롱
시간을 멈출 수 없고 내가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 어느 날이 있었다. 나를 비롯하여 내가 사랑하는 것 들이 모두 변한다면, 변하는 모습도 아름답기를 바랐다. 그런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부분도 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책임은 오롯히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가족이 명을 다하여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그녀가 얼마나 찬란하고 고된 인생을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당신께서 죽음에 가까워 지는 순간까지 또렷하게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의 발자취에는 늘 땀이 흥건했다.
그렇게 치열한 인생을 살아갈 자신도 없는 내가 멋진 노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의 어르신들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고 스스로 어떤 인생을 살아가는가. 이런 고민에 대학교 교양 수업으로 ‘노인을 위한 나라’라는 강의를 들었다. 노년기의 특징이 이론적으로 드러나고, 도망칠 수 없는 현실들이 펼쳐졌다. 철저한 약자의 삶.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과거 그리스에는 노인들이 지혜의 상징이자 길잡이였다고 한다. 모두의 존경을 받는 시기였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총명함을 잃을 만큼 장수를 하게 하는 의료기술과 너무도 빨리 변하는 트렌드가 그들의 앞을 막는다. “어른들께 물어봐.”, 라는 말 보다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말이 더 와닿는 것이다. 뭣 모르는 어른이 되는 일은 공포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어른에게서 지혜를 찾기로 했다. 당신이 겪은 일을 듣고 싶었다.
내가 늙어버린 여름은 제목 그대로 내가 늙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을 기록한 이자벨의 저서이다. 모두의 존경을 받고 박식한 삶을 살아가는 한 여성학자가 통제할 수 없는 노년기를 맞이하며 쓰는 회고록이다. 내가 꿈꿀 수 있는 가장 멋진 모습의 노인인 저자 이자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지 못한 노년기를 마주한다. 이자벨 같은 여성은 노년기에 대한 두려움이나 노년기의 결핍이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 했으나 오산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불평이 아닌 고찰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노년기가 올 수록 내게 부족해지는 역량들과 가지지 못한 환경, 선택에 대한 댓가 등 언젠가 마주해야할 이야기들을 고민하게 된다.
이자벨은 거침없이 솔직하다. 자신의 실수들과 겪은 고난을 가감없이 이야기하며 독자를 자극한다. 태생적으로 우울증을 가졌던 그녀의 노년기 우울증과,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해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발언이 동의를 얻지 못한 순간들, 가지지 못한 손주들에 대한 아쉬움과 ‘늙고, 마르고, 옷 맵시도 나지 않는 (p.31)’ 노인이 되어버린 순간들 말이다. 그녀가 한 일이라곤, 나이를 먹었을 뿐이다.
노인은 곧 역사의 산물이라고 할까. 이자벨은 시대의 변화 중 수 많은 사회적 아젠다의 당사자였다. 페미니스트이자 이민자, 학자이자 정치 참여자이다. 페미니즘, 이중언어, 다문화, 정체성에 관한 저서들을 써내려왔다. 늙음을 찾기 까지 이자벨은 이 아젠다들 속에서 고뇌하고 문제를 맞닥뜨린다. 페미니즘은 발전하는 트렌드라 선구자에서 구시대적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보일 때도 있었고, 청소년기의 혼란처럼 태어난 국가 프랑스와 이민온 미국 사이에서 붕 뜬 느낌을 받기도 한다. 부모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인상깊었다. ‘그 나이가 되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알쏭달쏭한 말들이 어떤 마음으로 발설되는지 알 수 있었다. 나의 부모가 나를 얼만큼 사랑했을까. 이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자벨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다. 어떻게 하면 멋진 어른이 되어 줄 수 있을까. 타인에게 유용한 삶으 살아가고자 하는 이자벨의 고민들은 대학교에서 처음 선배라는 호칭을 들은 나의 스물 한 살과, 학원 아르바이트에서 선생님으로 불리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연장자이거나 내가 가진 지위를 가졌다는 이유로 나는 알 수 없는 책임감을 느꼈다. 부담스럽지는 않았으나 걱정되었다. 나는 충분히 본받고싶은, 아니 적어도 되새기고 싶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젊은 나의 고민에 이자벨은 답장을 보낸다.
p. 178. ‘나는 과연 쓸모 있는 사람이었던가? 나는 누구에겐가 영감을 주고, 그를 도와주었으며, 그를 변화하게 했는가?’ 이 고통스러운 질문엔 물론, 나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해주는 졸업생들의 이메일 몇 통 외엔 똑 부러지게 구체적인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윽고 불과 몇 년전에 학생들에게서 선생님으로서 받은 사랑이 떠올랐고, 어제 새벽에 늘 언니에게 기대고 싶다던 동생들과 힘든 일을 기꺼이 털어놓던 친구들의 신뢰가 마음에 자리잡았다. 지금의 내 모습이 나쁘지 않다면, 이뤄낸 것들을 성장시켜가며 또 다른 내가 되어야할테다. 좋은 것은 안고, 나쁜 것을 버려가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멋진 노인이 되어 있지 않을까.
상담을 받으러 가서 최근 읽는 책으로 이 책을 언급했다. 선생님은 늙음을 준비하는 젊은이가 얼마나 생소하고 근사해보이는지 한참을 얘기하셨다. 어린 어른으로 근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 노년기의 어른이 되었을 때도 “그녀는 참 근사한 사람이야.” 라는 말을 듣고 싶다. 이자벨의 이정표를 흘긋거리며 오늘도 현재를 과거로 밀어보낸다. 내일로 발을 내딛으며 나이가 들어 간다.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