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의 소상(17)



 

그녀의 말투에 얼음에서 뻗쳐 나오는 듯한 냉기가 담겨있었는데 그것은 평소의 그녀 말투와는 완전히 상이한 말투였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잖아. 그만 만나야 하는 이유를?”

 

그녀는 민기를 사랑하지만 결혼은 하기 싫고 그러기에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민기가 왜 자기와 결혼은 하기 싫냐고 묻자 그 이유는 복합적이어 일일이 말하기 힘들다고 했다.

 

민기는 자기와 결혼을 하기 싫은 이유에 대해 몇 번이나 다그쳐 물었으나 그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대화가 끝날 때까지 메이크업 테이블에서 등을 돌리지 않았고 그런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민기는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빼어 물었다.

 

민기의 입에서 토해진 담배 연기가 실타래같이 엉기어 떠있다 사라질 때 쯤 그녀가 메이크업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뒤돌아섰으나 고개는 숙인 채로 민기 곁을 지나치며 읊조리듯 말했다.

 

사랑하는 그 순간 만큼은 진실이었어요.

행복하세요.”

 

그렇게 그녀는 이별을 통보하고 여우별처럼 떠났다.

 

그날 이후 그녀가 핸드폰 번호를 바꾸어서 통화를 할 수 없었고 그녀의 회사로 전화해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근무하는 회사의 사옥 앞에서 출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를 기다려도 보았으나 그녀가 그것을 미리 예견했는지 만날 수 없었다.

 

몇날 며칠 후 민기는 그녀의 친구로부터 부유한 집의 외동딸로 태어나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아온 그녀가 허영하지는 않지만 소규모 중소기업의 샐러리맨인 민기의 경제력으로 생활할 수 있는 자신감이 없어 불안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 친구의 아들과 한번 만나게 되었고 그 후로 서로 호감을 갖고 만나고 있다 얼마 전에 그들 부모 간에 혼담이 오갔고 아마 가을에 결혼식을 올리게 될 것 같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녀의 친구는 그녀가 민기와의 만남에 행복해 했고 민기를 진실로 사랑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니 믿어도 좋다고 말했으나 민기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타인에게는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이유가 민기에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였다.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사랑은 변하는 것이라지만 그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했는데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사랑이 변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한 순간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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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곡(秋哭)


성 민(윤찬준)

도토리 앙증맞게 물고

이끼 낀 고목을

넘나들던 다람쥐의

발걸음이 멎은 지 오래

갈빛 잦아들어

회색이 자욱한 숲엔

늦은 낙엽 지는 소리만이

적막을 잘라 먹는데

바람이 댓잎 사이로

일렁이며 흐르는 밤에

별빛 밟고 가는

먼 길 떠나는 나그네

별빛에 길을 물어

바람에 실려

이제는 어디로 가야하나

그 어디 메로 가야 하나

만나는 것이 기쁨이었지만

떠나는 것은 슬픔이라

밤이슬에 젖는 마음

님이사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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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의 소상(16)




용광로같이 뜨겁고 정열적인 사랑은 아니었어도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이슬과 같은 순수한 사랑이었다.

 

민기는 자신에게 배신의 아픔을 각인시켜주고 떠난 그녀를 만났을 때만 해고 그는 그녀와 같이 영원한 사랑의 늪 속에서 행복의 즙을 푸지게 흡입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었다.

 

한 잎 두 잎 떨어진 은행잎이 소복이 쌓여 금빛 융단을 펼쳐놓은 숲속에서였다.

 

작은 텐트의 좁은 공간은 불편하기보다 두 사람 사이를 더욱 가깝게 해주었고, 밤하늘의 은밀한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텐트 안에서 민기는 그때까지 가슴으로만 사랑했던 그녀를 처음으로 안았다.

 

그녀에게는 처음이 아니었을 수 있었겠지만 민기에게는 처음이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순간 두 사람은 풀리지 않을 고리로 연결된 것으로 여겼다.

 

그녀는 언젠가는 마음만 먹으면 풀 수 있는 고리로 연결된 것으로 여기고 있었을 수 있었겠지만 민기에게는 풀어지지 않는 고리로 연결된 것이었다.

 

민기는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가서는 가슴에 고여 놓았던 사랑을 그녀의 몸 안으로 분출시키며 수도 없이 사랑을 되뇌었다.

 

그녀는 한 순간의 유희를 즐겼을 수 있었겠지만 민기에게는 영원한 사랑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적어도 민기에게는 성스러웠던 의식이 끝난 후 그와 그녀는 숲 속의 왕자와 공주마냥 나란히 누워 무수히 떠 있는 별들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영원히 지켜달라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 맹세의 종극은 배신과 아픔뿐이었다.

 

 

2개월 전 새벽부터 내리는 봄비가 그칠 줄 모르고 하루 동일 내리고 있는 날이었다.

 

그날 민기는 그녀와 헤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헤어진 것이 아니라 그녀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은 날이었다.

 

그녀의 이별 통보는 그때쯤 그녀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던 민기에게는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었다.

 

민기에게 있어서 그녀와의 이별은 예기치도 않았고 있어서도 안 되는 절대 금지의 영역이었으나 그녀는 그 금지의 영역을 단숨에 넘어섰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한 차례의 격정의 시간이 지나고 메이크업 테이블에 앉아 파운데이션을 바르던 그녀가 지나가듯 내뱉았다.

 

그녀는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시선은 거울 속의 민기를 살피고 있었기에 그 시선은 거울을 바라보는 민기의 시선과 마주쳤다.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요.

말 그대로 그만 만나자는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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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기 싫은데

     



성 민(윤찬준)




이 밤 눈을 감으면

아침을 맞이하기 싫으니

이대로 영원히

꿈속에서 헤매리라

수천 수만 낭떠러지

수평선 너머로 넘어가리라.



그러나

눈을 뜨고 싶지 않아도

보고픔은 눈꺼풀을

헤치며 비집고 나와

가슴속에서 맴돈다.



오오 사랑!

그대 오늘도 살아계신가.

만경창파 머리 풀어 헤치고

북망산에 묻힌 줄 알았는데.



잊으렴인가

아님 더욱 보고픔인가.

밤꽃들 피어나는 거리를

부표처럼 떠돌고 떠돌다

다시 눈을 감으면

그 놈의 질긴 그리움이

나보다 먼저 눈을 감고

내 옆에 누워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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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의 소상(15)



여인의 눈꼬리가 약간 올라갔었으나 이내 내려앉았다.

 

여인은 민기의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경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쪽이 제 생각을 힐난하시는 것 같아 말하기가 겁이 나네요.”

 

아니에요. 전연 힐난한 것 아니에요. 겁쟁이이시다.”

 

여인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에는 민기를 편하게 해주려는 배려가 담겨있었다.


멍청이에 겁쟁이라. 오늘 남자로서는 좋지 않은 명칭을 다 듣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어머, 겁이 난다고는 그쪽이 먼저 말한 것인데. 듣기 거북했었나보네요.”

 

아니에요

듣기 거북하지는 않았고 그저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럼 겁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마귀 사랑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려야겠네요

이것도 어디까지나 남자의 입장에서의 생각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 알겠어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이 목숨을 바칠 정도의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남자의 그런 절대적인 사랑을 이용할 대로 이용한 후 돌연 이별로 그 댓가를 치룬다면 그런 사랑은 파멸적인 사랑인 것이겠지요.”

 

그 생각에도 동의할 수 없겠는데요.

그것은 여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이 민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 그렇겠지요. 여자의 입장에서도 목숨을 바쳐 사랑을 했는데 그 댓가가 이별이었다면 그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요.”

 

당연하지요.”

 

어쨌든 남자나 여자나 사랑을 했다가 상대로부터 이별을 당하게 되면 배신에 치를 떨게 되겠지요

그리고 배신을 당하게 되면 처음에는 그 배신에 분노하고 증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와 증오는 좌절로 바뀌게 되고, 좌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쉽게 벗어나지 못하여 방황하게 되지요

어떤 사람은 방황을 끝내고 새로운 사랑을 찾겠지만 어떤 사람은 방황을 끝내지 못하고 삶을 포기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배신을 당하는 사람은 삶에 치유하루 수 없는 생채기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인은 민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리듯 짧게 말했다.

 

그렇지요. 맞는 말씀이에요.”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칠흑 같은 침묵이 길게 깔렸다.

 

한줄기 바람이 지나갔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센 바람이었다.

 

바람에 대숲이 울었다.

 

민기는 대숲 울음만큼이나 서글픈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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