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셴든에게는 한 가지 병 같지 않은 병이 있었는데, 열차 도착 예정 시각 한 시간 전쯤 되면 차를 놓칠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는, 이른바 열차 병이다. 호텔에서 짐을 가져오기로 한 짐꾼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아 조바심 태우고, 호텔 셔틀버스는 어째서 그렇게 시간을 빠듯하게 다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고, 도로가 한번 막혔다 하면 돌아 버릴 것 같고, 역 짐꾼들이 굼뜨게 움직이는 꼴을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온 세계가 자기를 지각하게 만들 작정으로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미는 것만 같다. 승강장 입구를 통과할 때는 사람들이 자기를 막는 것 같고, 매표소에서 다른 열차표를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행렬 속 사람들은 잔돈을 꼼꼼하게 센다고 일부러 꾸물거리는 것 같고, 수하물 등록은 끝도 없이 오래 걸린다. 게다가 동행이라도 있을라치면 신문을 사러 가지 않으면 운동 좀 하겠다고 승강장으로 내려가거나, 또 난데없이 처음 보는 사람하고 대화를 하거나, 갑자기 전화할 데가 있다면서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거나, 열차 놓칠 행동만 골라서들 한다. 이래도 그가 타려는 열차마다 다 놓치게 하려고 온 우주가 공모하는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넉넉히 출발 30분 전에 짐을 머리 위 선반에 얹고 예약한 좌석에 앉기 전까지는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심지어 역에 너무 일찍 나가는 바람에 자기가 타야 할 열차가 아닌 앞 열차를 타고 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게 다 열차를 놓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그놈의 열차병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 P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