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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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세상에는 밥집에서 혼자 반주를 마시는 여자를 괘씸해하는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있다.
그동안 여자 밖혼술러들은 크고 작은 그런 반응들을 그러려니 하는 상수로서 이미 계산에 넣은 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때로는 그러면 그럴수록 전투력이 상승해서 보란 듯이 더 당당하게 술을 마시고 나오기도 했다.
남자 밖혼술러들에게는 없을 상수였다. 여자 혼자 타는 택시와 남자 혼자 타는 택시가 다른 세계를 싣고 달리듯이, 여자가 밥집에서 혼자 술 마시는 걸 두고 ‘멋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 많은 건, 그 행동에 무릅쓴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 술마시는 남자를 두고 멋있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처럼, 우리가원하는 건 멋있는 게 아니라 그저 술을 마시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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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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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아주머니가 마침 막 부쳐낸 김치전이 한가득 담긴 그릇을 들고 테이블마다 하나씩 나눠 주고 있었는데, "주문이 밀려 시간이 좀 걸리니까 먹으면서 기다려요"라며 내 앞에도 한 장 놔주셨다.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가 끝나자마자 젓가락으로 한점 찢어 입에 넣었고 입안에 살짝 기름진 새콤함이 가득 퍼지는데… 크흐, 갑자기 저절로 팔이 번쩍 들렸다. "사장님, 여기지평막걸리도 한 병 주세요!"
여기저기 둘 내지 셋씩 앉아 있는 틈바구니에서 혼자 막걸리에 김치전을 아마도 매우 행복한 표정으로 먹고 있었을 나와 눈이 마주친 아주머니가 씩 웃었다. 그러더니 김치전 한장을 더 집어 내 그릇에 올려주었다.
"한 장만 먹으면 막걸리 남잖아요. 한 병엔 두 장이지."
난 그만 아주머니에게 반할 뻔했다. 김치전을 한 장 더 주신 것도 주신 거지만, 이렇게 한 쌍으로 묶이는 두 가지 음식의 소진 속도와 적절한 양적 균형에까지 생각이 미치는 사람은 매우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새 한 김 식은 김지전은 적당히 따뜻했고 당연히 맛있었고 아주머니 말대로 막걸리 한 병과 똑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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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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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메리의 꽃말, 아니 술말은 ‘당황‘ 일 게 분명했다. 한 모금 먹었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맛이라 당황했고, 술맛이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는 사실에 또 당황했다. 그것은 나의 협소한 관점에서 술 카테고리에 들어 있을 수 없는 맛이었다. 안톤버그 위스키 봉봉이 제아무리 최선을 다해 술병의 모양을 띠고 있더라도 술이 들어간 초콜릿이라고 하지 술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이것은 술을 넣은 차가운 수프라고 해야지 술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토마토 수프와 클램차우더에 보드카를 섞어놓은 맛인데 심지어 술 위에 가니시로 셀러리 줄기까지 꽂아주다니. 이게 술이면, 색으로 보나 성분으로 보나 블러디 그 자체인 선짓국 국물에 소주를 넣고 배추를 꽂은 후 ‘블러디 영희‘라고 이름 붙이면 그것도 술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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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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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구르기 하듯이 고꾸라지며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이문재 시인이 「바닥」이라는 시에서 그랬지. "모든 땅바닥은 땅의 바닥이 아니고 지구의 정수리" 라고. 그러니까 이것은 지구의 정수리와 나의 정수리가 맞부딪치는 우주적 모멘트였던 것이다.
머리가 아팠지만 참을 만했다. 부딪히기 전부터 이미 머리는 깨질 듯 아팠기 때문이다. 커다란 내적 두통에 까진 정도의 외적 두통 하나 더해진들 대수겠는가. 피가 조금 났지만 괜찮았다. 하지만 우주적 모멘트는 나의 형질을 유인원에서 마침내 네발 짐승으로 바꾸어놓았다. 다리가 완전히 풀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기어야 했다. 턱에서부터 집까지는 50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내 생애 땅바닥을 기어가는건 처음이었다. 현관까지 기어가면서 생각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면 걷는 놈 밑에는 기는 놈이 있구나…. 지나가는 뛰는 놈 걷는 놈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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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몇 시간 후 시원한 술을 마실 수있는 가능성이 열리듯이, 신나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순간 다음 날 숙취로 머리가 지끈지끈할 가능성이 열리듯이, 문을 닫으면 저편 어딘가의 다른 문이 항상 열린다. 완전히 닫는다‘는 인생에 잘 없다. 그런 점에서 홍콩을 닫고 술친구를 열어젖힌 나의 선택은 내 생애 최고로 술꾼다운 선택이었다. 그선택은 당장 눈앞의 즐거운 저녁을 위해 기꺼이 내일의 숙취를 선택하는 것과도 닮았다. 삶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지만 하지 않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니까. 가지 않은 미래가 모여 만들어진 현재가 나는 마음에 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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