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 동물원
어피니티 코나 지음, 유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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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문가의 손길로 우리는 사진더미, 파일더미가 되어갔다. 우리 몸에서 채취된 성분은 염색되고 슬라이드 사이에 놓여 소용돌이무늬를 만들고 형광빛을 내며 현미경의 시야 아래 살아가게 되었다.
늦은 밤, 빨리 잠든 펄의 의식이 내 의식과 충분히 멀어졌을 때면 나는 우리의 작은 조각들을 떠올리며 한낱 입자라 해도 그 안에 우리 감정이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실험에 참여했다고 스스로를 혐오하지는 않을까. 조각들은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건 너희 잘못이 아니라고, 내키지 않는 협조였다고, 너희는 도난당해 고통을 강요받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조각들에 내 영향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와 떨어지고 나면 조각들은 단지 자연과 과학에, 자신을 삼촌이라 칭하는 남자에게 응답할 뿐이었다. 현미경으로 보아야 하는 작고 많은 물질을 대신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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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면 우리를 구해줄 장소로 갈 수 있는 열쇠가 될래, 아니면 우리의 적을 쳐부수는 무기가 될래?"
"나는 진짜 소녀가 될래. 원래 그랬던 것처럼." 펄이 무심하게말했다.
놀이를 하면 다시 진짜 소녀가 된 기분이 들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나조차 자신이 없었다. 나치가 우리에게 매긴 번호는 생명을 못 알아보게 만들었는데, 어둠 속에서는 그 숫자밖에 안 보였고, 더욱 안 좋은 점은 숫자를 좀더 참을 만한 것으로, 덜 혹독한 것으로, 덜 우울한 것으로 보이게 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내 숫자는 번지고 흐릿해져 있었다. 내가 때리고 침을 뱉었기 때문이다. 숫자는 틀림없이 나를 구속할 거였다. 흐릿해졌어도 여전히 숫자였다. 펄도 번호가 매겨졌고 나는 그게 내 것보다 훨씬 미웠다. 왜냐하면 숫자는 우리가 별개의 사람이라는 걸 나타냈고,
별개의 사람이라는 것은 헤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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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책을 잇는 여행 - 어느 경계인의 책방 답사로 중국 읽기
박현숙 지음 / 유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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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 못 드는 밤이나 ‘베이징 사모님‘으로 살지 못하는 내 신세가 처량할 때면 가끔 심야 책방에 간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평등한 장소인 그곳은 어딜 가나 볕이 잘 들고 나를 위한 등불이 늘 켜져 있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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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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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 있다고 해서 오기가 아내의 슬픔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내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눈물을 거둔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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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 미러 - 우리가 보기로 한 것과 보지 않기로 한 것들
지아 톨렌티노 지음, 노지양 옮김 / 생각의힘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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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한다면 가능하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원할까? 당신은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욕망을 갖고 있으며 어떤 불복종을 마음에 두고 있는가? 만약 당신이 이상적인 여성이 되는 데 성공했다면, 그 여성의 모습으로 만족하고 사랑받는다면, 당신을 언제나 과장하게 하고 폄하하는 시스템 안에서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과연 탈출을 원할 것인가?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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