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 동물원
어피니티 코나 지음, 유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전문가의 손길로 우리는 사진더미, 파일더미가 되어갔다. 우리 몸에서 채취된 성분은 염색되고 슬라이드 사이에 놓여 소용돌이무늬를 만들고 형광빛을 내며 현미경의 시야 아래 살아가게 되었다.
늦은 밤, 빨리 잠든 펄의 의식이 내 의식과 충분히 멀어졌을 때면 나는 우리의 작은 조각들을 떠올리며 한낱 입자라 해도 그 안에 우리 감정이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실험에 참여했다고 스스로를 혐오하지는 않을까. 조각들은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건 너희 잘못이 아니라고, 내키지 않는 협조였다고, 너희는 도난당해 고통을 강요받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조각들에 내 영향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와 떨어지고 나면 조각들은 단지 자연과 과학에, 자신을 삼촌이라 칭하는 남자에게 응답할 뿐이었다. 현미경으로 보아야 하는 작고 많은 물질을 대신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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