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는 사람들을 말살하고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릴 목적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과학적으로 통제된 조건에서 인간 행동의 표현인 자발성 자체를 제거하고 인격을 단순한 사물, 동물조차 아닌 -잘 알다시피 배가 고플 때가 아니라 벨이 울릴 때 먹이를 먹도록 훈련받은 파블로프의 개는 변태 동물이지만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물로 만드는 무서운 실험실이다.
나는 오랫동안 장애(障礙)라는 단어에대해 고민해왔어. 무엇인가 가로막고 혹은 결핍되어 불안하게 절룩거리는 단어. 늘 나 자신에게 묻곤 했지. 나에겐 장애가 있나? 단어가 입술 사이를 가로막아 산산조각난 언어. 끝없이 누수되는 호흡, 치아 사이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단어들. 나는 분명 장애가 있지. 타인의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장애는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오직 확인만 가능할 뿐이지. 잘려나가거나 뽑혀 없어져야만 비로소 알아볼 수 있는 불구.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 somebody가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 nobody 일 뿐이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처음 들어설 때도 그렇고, 다음날 외출하고 돌아올 때도 그렇다. 호텔은 집요하게 기억을 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