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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박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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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가 한 번쯤은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순간이 온다.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고, 문밖으로 나가는 일상조차 힘겨워지는 시간이. 구태여 원인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내부에 있을 수도 외부에 있을 수도 있다. 아주 사소한 사건이거나, 사회적으로 조율해야 하는 거대한 사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땅굴을 파고 들어간 사람에게 발단을 짚어보는 일은 무의미하다. 무엇이든 자신의 잘못이 있을 거라고 믿으며 스스로 처벌을 가중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실수를 해서,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마땅한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앞선 문장이 진실이어서가 아니다. 그래야만 나가지 않을 명분이 생기기에. 고립된 자는 자신을 가둠으로써 비로소 숨을 쉰다. 안에서 문을 잠근다.

 

 "사람에겐 몇 개의 방이 있는 걸까요. 그 방이 모두 어둠으로만 구성된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요. 제게도 많은 방이 있습니다. 아주 어둡고 아주 더러운 방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그 방에서 탈출하고 싶기도 하고 탈출하고 싶지 않기도 하단 말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본문 136-137)

 

 밖으로 나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다. 밖은 '이동'의 영역. 버스와 지하철이 직장인 무리를 실어 나른다. 사람들은 바쁘게 발을 움직인다. 다들 갈 곳이 있다. 목표가 있다. 반면 안은 '멈춤'의 영역이다. 해가 떠올라도 부동하는 나의 영역. 모두가 떠나는 사이, 한 데 고여있어 현상 유지도 아니고 퇴보한다는 감각이 든다. 그렇다, 나는 한때 조기준이었다. 나의 예민한 기질이 사회로의 진입을 가로막는 거라고 여겼다. 나는 한때 마태공이기도 했다. 지칠 대로 지쳤지만 그래도 살아내고 싶었다. 태공의 '그럼에도' 스킬을 종종 썼다. 그럼에도 일어나서 세수를 했다. 그럼에도 컴퓨터를 켜서 지원 공고를 찾아보았다. 그럼에도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숨통이 트인 건, 반 년 만이었다. 이렇다 할 기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문을 열었다. 이제 나가고 싶었다. 방 안에 있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생존하는 법을 배운 듯했다. 이를테면 호흡하는 것, 물살을 가르는 것, 가끔은 온몸에 힘을 빼고 둥둥 떠다니는 것을.

 

 부끄럽지 않아. 부끄러워도 돼. (본문 138)

 

 벙커, 벽장, 안전 가옥. 뭐라고 부르든 간에 이곳이 잘잘못을 논하는 장이 아님은 분명하다. 공간은 그저 사람에게 시간을 줄 뿐이다. 문이 누군가를 막는 벽이 아니라 오고 가는 통로임을 실감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면서.

 

 방 탈출 필승 공략법: 일단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본문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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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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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사를 살펴보면, 족적은 남겼으되 이름은 알리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른바 작자 미상이라 하는 것. 규방에서의 시, 가정에서의 그림. 시대가 '미덕'이라고 부르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가려져있던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이 지금, 여기 되살아난다. 그렇다면 이들이 뒤늦게 조명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운이 좋아 누군가의 눈에 들어서만은 아닐 터다. 저자 박재연은 이를 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작가가 작품을 발표할 시기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생각이, 현대에 이르러 지향하는 가치로 변모한 것이다. 일례를 들자면, 조선의 허난설헌이 있다. 난설헌은 수많은 명시를 썼으나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동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양반가의 규수이자 혼인한 여식으로서의 '미덕'은 가정을 꾸리고 남편을 내조하는 데 있었기에, 이와 상충되는 여성의 예술가적 기질은 축소되어 왔다. 그렇게 난설헌의 이야기는 규방에서 시작되어 문턱을 넘지 못하다가, 동생 허균에 의해 보존된다. 하지만 시대상이 달라짐에 따라 오늘날 한국 문학사에서 허난설헌은 찬탄 받는 문장가 중 하나로 기록된다. 허난설헌의 시 또한 조선 여성의 회한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재평가 받는다. 『두 번째 미술사』에서도 여성 화가를 통해 이러한 환경적 변화를 포착한다. 대표적으로, 멕시코의 회화 작가 프리다 칼로는 풍파가 도처에 깔린 격동적인 삶을 살았다. 개인적으로는 병마와 싸우고, 직업적으로는 예술계로부터 환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멕시코에 여성주의가 대두되면서 프리다 칼로의 작품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라는 수식을 지우고 독립적인 작가로 남고자 했던 바람처럼, 프리다 칼로는 그 혼자로도 족한 멕시코의 국민 작가로 부상한 것이다.


 특히 사회적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들에게 패션은 강력한 자기표현의 도구가 되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고, 소외된 정체성을 시선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전략 말이다. 머리 모양, 장신구, 의상의 색과 형태, 그 모든 요소가 '사는 방식'이자 '버티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본문 108쪽)


 프리다 칼로라는 이름은 더 이상 한 개인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의미화되고, 다양한 맥락 속에서 다시 해석되며, 새로운 세대에도 여전히 호소력을 지닌 살아 있는 상징이다. 예술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지속적으로 의미를 바꾸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이 이름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일부다. (본문 114쪽)


 미술은 때로 언어가 되어 질문한다. 마치 대답을 구하듯 관객의 눈을 마주한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세간에 어떻게 발견되고 해석되는지, 의의가 지워지는지 혹은 한없이 확장하는지를. 이에 『두 번째 미술사』는 한 가지 축을 제시한다. 한때 묻혀있던 작품도 사회의 필요에 의해 꺼내지기 마련이라고. 목소리에 대한 응답이 오랜 시간 뒤에 돌아오기도 한다고 말이다.


 묘비에 새겨진 "외젠 마네의 미망인"이라는 문구는 여전하지만, 이제 그 앞에 놓인 꽃들은 '인상주의의 선구자, 베르트 모리조'를 기리는 헌화가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 섬세함과 사적인 시선, 감각적 실험성이 미술사 안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한 예술가의 명성과 위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누가 무엇을 그리고, 누가 그것을 가치 있게 여겼는지를 되묻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본문 105-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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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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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그랬다. 신을 자처하는 사람이 왜 한둘이 아니냐고. 그 말처럼, 교주를 재림 신이라 주장하는 사이비가 적잖이 있다. 하늘이 내려보낸 신의 아들이 이렇게나 많던가. 세상을 이롭게 하라고. 하지만 그들이 일삼는 반인륜적인 행위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리와는 대척점에 서있다. 오히려 착취와 지배에 대한 욕망에 가깝다. 지배자에 반기를 들지 않는 순한 양. 불의에도 순응해야 하며 그러지 않을 시 집단 린치를 가하는 시스템. 통상적인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나 평화, 화합은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모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탈인간을 말하는 교주는 인간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너희가 안 믿어서 걔들이 죽는 거야. 그게 바로 지옥이야. 힘을 잃을까 두려워 아버지 선생님은 울부짖고, 믿음을 잃을까 두려워 신도들은 눈을 감는다. (본문 251)

 

 -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는 거야.

원장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그런 짓을 당할 만큼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러니 잘못을 바로잡을 필요도, 그럴 기회를 줄 이유도 없다는 것을 몰랐다. (본문 81)

 

 『파사주에는 가상인 듯 아닌 듯 혼란스러운 서술이 곧잘 등장한다. 이러한 문장 뒤로 보이는 것은 소름 끼치도록 적나라한 현실의 그림자다. 어떤 장에서는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의 세계가 등장하는 한편, 어떤 장에서는 눈 뜨고 꾸는 꿈처럼 낯선 세계가 드러난다. 3인칭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생기는 것이다. 때문에 독자는 전지적으로 작중 상황을 이해하기보다는 유림의 시선과 해석에 기대어 받아들인다. 간혹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요소들도 유림이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반영한 것이라면 일견 납득이 간다. 다만 유림이 목격한 것이 단순히 메타포에 그치지는 않는다. 어린 가인을 지키는 양옥집 주인들, 돌탑에서 유림과 해수를 둘러싼 가인들, 파사주 게임을 제안한 굴댕이, 숲의 신당에서 마주한 사슴. 그리고 마침내 땅속에서 솟아오른 가인들. 유림이 아는 면면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 살아나 사슴 형상을 한 아버지 선생님을 무찌른다. 유림이 마주한, 이 거대한 은유의 세계는 베일을 한 겹 둘렀을 뿐 현실과 다름 없다.

 

 대호가 있었고, 정우와 미란이, 맹상도 있었다. 그리고 이름 모를 가인들도. 유림은 그들을 부른 적이 없었다. 늘 잊으려 했고, 지우려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어코 돌아왔다. 쫓아온 게 아니라 함께하려고 돌아온 것이었다. 유림 곁에, 바로 이 순간 그 자리에 서서 그것에 맞섰다. (중략) 일어나 같이 가자! 일어나 같이 가자! 일어나 같이 가자! (본문 253-254)

 

 익숙한 품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알에 갇힌 이에게 자신을 둘러싼 껍데기는 너무 견고해 보이므로. 학대여도 학대임을 모르고, 안다 해도 저항하기에는 두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해수는 알았다. 다들 속고 있어. 아버지 선생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몸이 짓밟히면서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모두가 ''라고 답하는 성전에서 이건 '아니'라고 외쳤다. 해수의 마지막을 본 유림에게도 균열이 생겼다. 눈앞의 생생한 비극을 지켜보며, 유림은 해수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파사주의 시작이다. 이 여정은 죽은 친구를 보내주는 과정이다. 갇힌 유림과 해수를 꺼내는 한풀이다. 넓은 세계로 떠나는 모험이기도 하다. 살아감에 있어 허락을 구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냥 내가 되기 위해서. 여정의 종착에 다다라 유림은 해수의 뼛가루를 날린다. 정해진 규칙을 파한다. 보란 듯이.

 

 - 저건 우리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이 일은 별거 아니고 자기는 곧 돌아올 거라고.

 - 그럼 우린 어떻게 해?

 - 그냥 우리 삶을 살면 돼.

 (본문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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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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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했다. 그러니 같이 살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 말인지 자문해 보면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불거지는 정치·산업 재해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무기력해진다. 비보를 내 일처럼 안타까워하는 의식은 소모품처럼 닳아, 소식을 듣고도 무감해지기에 이른다. 외면은 쉽고 달다. 나 하나 살기에도 팍팍하다, 그래봤자 남의 일이 아니냐며 불패의 변명을 던진다. 그러나 진실은 다르다. 같은 땅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름조차 모르는 상대에게 선의의 명함을 내민 장처럼, 우리는 이름 모를 동료 시민으로 살아왔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아도 누군가는 내게 손을 뻗고 있었다. 연대하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한편 세월호와 이태원, 이름만 다른 사건들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주워 담지 못했다. 설명할 길 없이 망연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제 그만 잊자'는 언론이 나올 때에야 알았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어느 한 축이 흔들린 채 사는데 그게 도통 회복이 안 된다고 말이다. 이는 우리가 이어져 있다는 방증이었다.

 

 누군가에게 말뚝은 전복된 선박의 선원이었고 부모였다. 바다에 가라앉은 자식이었고, 길에서 죽은 청년이었으며, 정리 해고로 생명줄이 끊긴 노동자였다. 그게 전부 살아남은 사람의 기억으로 쓰여 있었다. 지우는 사람이 기록하는 사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본문 248)


말뚝들에서는 죽었지만 죽지 않은 '말뚝들'이 전국을 들썩이게 한다. 통제하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보도처럼, '말뚝들'은 시시각각 등장해 재난 상황을 알린다. 죽어도 눈 감을 수 없는 숨, 그리하여 말뚝으로 돌아온 사람들. 한때 사회가 외면했던 그들의 말은 '말뚝'이라는 형상을 통해 사방에 퍼진다. 해안에, 도심에, 끝내는 광장 하늘에 도달한다. 잊어야 한다고 해도 기어이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듯이, 묻으려 해도 반드시 일어서는 존재도 있는 법이다.

 

 테믈렌, 당신 끝까지 내 돈 갚지 않고 가네요. 조심히 가요. 내 빚 갚지 말고 계속 안고 있어요. 그걸로 당신 계속 기억할 테니 서러워 마요. (본문 279)


 언젠가 광장이 빛과 소리로 가득한 날이었다. 아닌 것을 아니다 말하는 데 있어 물러섬이 없는 목소리. 이 목소리를 지지하는 수많은 불빛. 어떠한 폭력도 그걸 방해할 수 없었다. 내가 광장으로 나갔을 때, 특별히 대단한 걸 쟁취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 사람의 몫을 하고 싶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필연적으로 오는 슬픔을 나눠가지고 싶었다. 광장에 있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목격이 아닌 기록을 해나갈 것이다.

 

 일제히 해금됐다. 모두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본문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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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책 - 괴테에서 톨킨까지, 26편의 문학이 그린 세상의 정원들
황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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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이다. 프랑스 영화와 친하지 않은 나로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영화로부터 받은 인상이 흐릿하다. 하지만, 따뜻한 나무색과 짙은 푸른색을 마주할 때면 어김없이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오르고는 한다. 향수에 가까운 감각이다. 가진 적 없는 추억이 생긴 것 같다. 숲도 아니고, 산도 아니고, 정원. 이는 오롯이 정원만이 주는 환상이다. 가보지 않았어도 그리운 장소.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은 이를 가능케 한다.


책머리에서 저자는 '가든 라이팅'이라는 용어를 가져온다. 쉽게 말하자면 정원이라는 소재를 작품 안에 담는 것이다. 저자는 가든 라이팅을 설명하며 '그저 배경일 때도 있지만 정원이 없으면 안 되는 작품도 있고, 정원이 숨은 주인공이기도 하다'라고 덧붙인다. '숨은 주인공'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생각난 소설이 있다. 표지마저 『정원의 책』과 닮아있는 『지구 끝의 온실』이다. 


 "지금부터는 실험을 해야 해. 내가 가르쳐 준 것, 그리고 우리가 마을에서 해온 것들을 기억해. 이번에는 우리가 가는 곳 전부가 이 숲이고 온실인 거야. 돔 안이 아니라 바깥을 가꾸는 거야. 최대한 멀리 가. 가서 또 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어. 알겠지?" (『지구 끝의 온실』, 242쪽)


 기후 재난이 닥치고 모든 일상이 무너져버린 2058년, 나오미와 아마라는 긴 여정을 떠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을 찾아서. 하지만 둘 앞에 놓인 것은 가시밭길이다. 처참한 생존 환경이, 인간의 악의가 도처에 깔려있다. 방심하는 순간 죽는 것은 예삿일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살아내고자 한다. '온실'에서의 기적을 직접 목격했던 그들이다. 인간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도 보았지만, 인간이 서로의 삶을 부여잡고 다시금 터전을 일구어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끈질긴 생에의 의지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유대를 배웠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내일로 향한다. 프림 빌리지에서 들고나온 씨앗을 품은 채로. '온실 밖'으로 나온 씨앗은 둘의 바람처럼 널리 퍼져나갔다.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말이다. 씨앗은 경계를 넘어 세계로 뻗어가고, 시간마저 넘어 2129년 아영에게까지 가닿는다. 프림 빌리지 주민들만의 '온실'은 더 이상 한 공간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세상 곳곳에서 피어오른 모스바나의 불빛이 이를 증명한다. 어느 것보다 푸르른 빛. 생존하여 마침내 실재하는 희망이다.


 이들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지구를 떠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 모퉁이마다 씨앗을 심었다. 지수의 말처럼 그들이 가는 곳 전부가 프림 빌리지의 숲이고 온실이 되었다. 이들은 약속을 지켰고, 그러자 이들을, 우리의 세계와 미래를 지켜주었다. 이 '지구 정원사'들이 나누었을 다정하고 "온기 어린 이야기"와 약속들을,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를 비추고 있을 것만 같은 온실의 불빛을 상상해본다. (본문, 262-263쪽)


 앞서 저자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소비되는 시대에도 정원과 문학처럼 시간과 관심을 기울여 살펴야 하는 것이 여전히 있음을 기억해주길(10쪽)' 바란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말처럼, 책을 읽는 동안 정원을 향한 온정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여러 문학을 통해 약동하는 정원의 힘을 아는 독자라면, 저자의 마음과 기꺼이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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