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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예술사를 살펴보면, 족적은 남겼으되 이름은 알리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른바 작자 미상이라 하는 것. 규방에서의 시, 가정에서의 그림. 시대가 '미덕'이라고 부르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가려져있던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이 지금, 여기 되살아난다. 그렇다면 이들이 뒤늦게 조명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운이 좋아 누군가의 눈에 들어서만은 아닐 터다. 저자 박재연은 이를 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작가가 작품을 발표할 시기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생각이, 현대에 이르러 지향하는 가치로 변모한 것이다. 일례를 들자면, 조선의 허난설헌이 있다. 난설헌은 수많은 명시를 썼으나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동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양반가의 규수이자 혼인한 여식으로서의 '미덕'은 가정을 꾸리고 남편을 내조하는 데 있었기에, 이와 상충되는 여성의 예술가적 기질은 축소되어 왔다. 그렇게 난설헌의 이야기는 규방에서 시작되어 문턱을 넘지 못하다가, 동생 허균에 의해 보존된다. 하지만 시대상이 달라짐에 따라 오늘날 한국 문학사에서 허난설헌은 찬탄 받는 문장가 중 하나로 기록된다. 허난설헌의 시 또한 조선 여성의 회한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재평가 받는다. 『두 번째 미술사』에서도 여성 화가를 통해 이러한 환경적 변화를 포착한다. 대표적으로, 멕시코의 회화 작가 프리다 칼로는 풍파가 도처에 깔린 격동적인 삶을 살았다. 개인적으로는 병마와 싸우고, 직업적으로는 예술계로부터 환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멕시코에 여성주의가 대두되면서 프리다 칼로의 작품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라는 수식을 지우고 독립적인 작가로 남고자 했던 바람처럼, 프리다 칼로는 그 혼자로도 족한 멕시코의 국민 작가로 부상한 것이다.
특히 사회적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들에게 패션은 강력한 자기표현의 도구가 되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고, 소외된 정체성을 시선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전략 말이다. 머리 모양, 장신구, 의상의 색과 형태, 그 모든 요소가 '사는 방식'이자 '버티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본문 108쪽)
프리다 칼로라는 이름은 더 이상 한 개인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의미화되고, 다양한 맥락 속에서 다시 해석되며, 새로운 세대에도 여전히 호소력을 지닌 살아 있는 상징이다. 예술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지속적으로 의미를 바꾸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이 이름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일부다. (본문 114쪽)
미술은 때로 언어가 되어 질문한다. 마치 대답을 구하듯 관객의 눈을 마주한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세간에 어떻게 발견되고 해석되는지, 의의가 지워지는지 혹은 한없이 확장하는지를. 이에 『두 번째 미술사』는 한 가지 축을 제시한다. 한때 묻혀있던 작품도 사회의 필요에 의해 꺼내지기 마련이라고. 목소리에 대한 응답이 오랜 시간 뒤에 돌아오기도 한다고 말이다.
묘비에 새겨진 "외젠 마네의 미망인"이라는 문구는 여전하지만, 이제 그 앞에 놓인 꽃들은 '인상주의의 선구자, 베르트 모리조'를 기리는 헌화가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 섬세함과 사적인 시선, 감각적 실험성이 미술사 안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한 예술가의 명성과 위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누가 무엇을 그리고, 누가 그것을 가치 있게 여겼는지를 되묻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본문 105-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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