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본 세월 - 4.16이 남긴 것
김민웅 외 지음 / 포이에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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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이 슬픈 날


   세월(歲月)이 지났지만 세월호는 세월(世越)하지 못했다. 1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세월호는 안타깝게도 그 이름의 의미-세상을 초월하라-와는 반대로 저 무저갱과 같은 깊고 깊은 바다 속에 수장되어 있다쇄도하는 세상으로부터의 질문에 입을 굳게 닫고 등을 돌린 체 미세한 빛조차 들지 않는 흑암의 심연에 갇혀있다땅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에게 무거운 숙제만을 한보따리 남겨 놓은 체…….

 

   한국의 살아있는 양심들이 소리를 내었다. "헤아려본 세월." 한 기독교 작가가 아내를 떠나보내고 쓴 책 제목을 고의적으로 사용한 편집인의 의도가 보인다아마 세월호는 아직도 우리에겐 아픔이기에고통이기에그냥 묻어 두기엔 풀고 해결해야할게 너무나 많은 숙제이기에, "헤아려본 세월"은 결국 "헤아려본 슬픔"일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 본다.

 

   이 땅에 드리운 슬픔을 헤아려본 양심들은 공통적으로 정부의 무책임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세월호 특별법에 이어 세월호 시행령으로 유가족을 두 번 죽이는 권력 잡은 자들의 파렴치한 행동은 심판받아야 한다고신속한 수사와 더불어 공정한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격한 의조로 외쳤다어떤 양심은 성직자들의 무지에 대해 탄식하기도 했다신정론으로 일컬어지는 악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 통찰과 공동체적 자성을 촉구하는 관점도 간과하지 않았다끝까지 함께 하자는 권면도이 날을 기념하며 공동의례를 하자는 제안도,교회가 중심이 아닌 변두리로 가야 한다는 도전도 눈여겨 볼만했다.

 

   모두가 고대하는 그 날을 향한 소망을 담아경희대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김민웅 목사는 그의 글을 이렇게 끝맺음했다.

 

   “모두의 마음과 영혼이 뜨거워져서마리아가 기원했던 것처럼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권력을 빈손으로 보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인이 되어 감격의 잔치를 베풀 날을 고대하며 갈망한다새끼를 잃은 어미들의 눈물이 그로써 그치리라”(211)

 

   “새끼를 잃은 어미들의 눈물” 원색적인 표현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가슴이 복받쳐 올랐다미어졌다고통스러웠다갈기 갈기 찢기는 것처럼 아팠다.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며 검은색 넥타이를 골라 메었다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아니그렇게 해야 했다비록지금까지 잊고 지내다 1년이 되는 오늘그날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내 자신이 위선적으로 보이고 부끄러웠지만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미안했다죄송했다가슴이 아팠다책임을 다하지 못했음에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했음에행동하지 못했음에…….

 

  사무실에 도착해 마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 같은 한 가수의 노래를 들었다마음에서도 눈가에서도 눈물이 흘렀다포기하지 말자란 도전도끝까지 버티자란 권면도함께 하자는 위로도 슬픔을 덮어버리기엔 역부족이다세월을 헤아려보기에도슬픔을 헤아려보기에도너무나 힘든 하염없이 슬픈 날이다.

 

"다시 돌아올 거라고 했잖아

잠깐이면 될 거라고 했잖아

여기 서 있으라 말했었잖아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물끄러미 선 채 해가 저물고

웅크리고 앉아 밤이 깊어도

결국 너는 나타나지 않잖아

거짓말 음 거짓말

 

우우 그대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우우 그대 말을 철석같이 믿었었는데

우우우우우 찬 바람에 길은 얼어붙고

우우우우우 나도 새하얗게 얼어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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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돌려드립니다
권일한 지음 / 좋은씨앗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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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났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갈등은 더 커져갔다. 생명을 잃을뻔한 낙뢰의 위협을 경험하고 사제가 된 그는 고귀한 성경을 곡해하고 호도하는 다른 사제들을 향한 의분이 일어났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도 생겼다. 고민하고 결단했다. 그의 결단은 행동을 가져왔고, 그 행동은 기독교 역사의 축을 틀어버리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성경해석의 권위를 사제만이 아닌 모든 성도들이 누려야 한다는 그의 생각! 뷔텐 베르그 성당 문에 붙여진 마르틴 루터의 개혁의 의지로 성경은 특정 소수에게서 다수에게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확고했던 그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다시금 소수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종교 개혁 이후에 생겨나기 시작한 설교자의 역할과 책임은 다시금 성경을 소수에게로 가져오는 결과를 맺었다. 다수는 여전히 소수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자들은 설교자를 의지했고, 설교자를 통해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여과없이 수용하고 믿었다. TV에서 쏟아져 나오는 설교의 풍요로 인해 초대교회의 성도와 같이 개인이 성경을 읽고 씨름하는 일은 점점 사라졌다. 그렇게, 성경은 다시금 소수에게로 돌아갔다. 

루터가 봤으면 땅을 치며 통탄할 안타까운 상황. 이런 상황 속에서 이젠 성직자가 아닌 일반 신자가 개혁의 의지가 담긴 반박문을 들고 나왔다. "몇 사람을 위한 전문서적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을 돌려드립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이지만, 아이들게서 더 많이 배운다는 권일한씨가 쓴 반박문의 제목이다. 긴 제목을 줄이면 "성경을 돌려드립니다."이다. 

쉽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중요하지만 결코 심각하지 않게, 신자들로부터 성경을 빼앗은 사단의 7가지 전략에 대해 날카롭게 파헤친다. 그리고 성경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서사적으로 열거한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공동체를 어떻게 만드시고 이끄셨는지, 공동체를 통해 이 땅을 심판하시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대해 풀어간다. 

성경은 한권의 책이며 66권의 책이기도 하다. 숲을 보는 동시에 나무를 보는 것처럼 읽어야한다. 직접 읽고 묵상하며, 성경 자체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성경이 기록된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고 자기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며 읽어야한다. 그렇게 말씀 자체의 권위를 인정하고 능력을 확신할때, 말씀은 역사한다! 저자가 인용한 존 블랜챠드의 말이다. "왜 사자를 보호하려고 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사자를 보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를 우리에서 풀어놓기만 하라. 성경은 사자와 같아서 풀어놓아 다니게 하면, 스스로 힘을 발휘할 것이다."(37)

저자는 개인에게 주어진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도 역사하는 성경에 대해 말한다. 성경을 서로 듣고 배울때, 그리고 성경 자체의 권위를 인정할때,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세우신 두 개의 거룩한 신적 기관인 가정과 교회는 올바르게 세워진다. 영국이 만든 책이 세익스피어라면, 영국을 만든 책이 바로 성경이라고 했던 빅토르 위고의 말처럼, 성경이 공동체를 만든다. 다시 말해, 공동체를 형성하는 밭이 성경임과 동시에 공동체를 자라게 하는 양식 또한 성경인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소수가 아닌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성경을 돌려받아야한고 한다. 

연애를 하는 커플은 사랑의 표현을 담아 편지를 쓴다. 러브레터. 읽고 또 읽는다. 동일한 내용이어도, 똑같은 표현이어도, 그저 좋다. 읽는 시간이 행복하고 달콤하다. 달달한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러브레터이다.  창조주(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성자 하나님)과 함께 원저자(성령 하나님)를 통해 그의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 책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이 성경을 달다고 했다. 꿀 같이 달다고 했다.(에스겔 3:3) 

러브러터처럼 달달한 성경이 우리에게 돌아왔다. 되돌려진 성경. 어떻게 해야 할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씹어야한다. 먹어야한다. 언제까지? 단맛을 느낄 때까지, 내 안에서 향기로운 단내가 풍겨날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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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경 -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스캇 맥나이트 지음, 김창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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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이 아닌 삶의 고백
(스캇 맥나이트, 예수 신경, 새물결 플러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던 내게 예배는 은혜가 뭍어나는 자발적 헌신이기보다는 삶의 습관이었다. 감사가 충만하고 감격이 넘치는 예배가 아니라 무의미하고 건조한 종교의식이었다. 때문에, 주님과 인격적 만남이 있기 전까지 예배는 지루하고 지겨운 의식과 같았다. 특별히, 아무 생각없이 외웠던 사도신경은 따분한 예배의 서막을 알리는 주문이었다. 무의미하게 외웠던 사도신경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신학교에 입학하고 난 이후이다. 

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고백하는 공식적 진술이다. 단순한 고백을 뛰어넘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신자로서의 삶에 대한 결단이 신경 속에 담겨있다. 때문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시작된 신경은 현대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금까지 신경에 대한 연구가 시대적 상황과 사실에 근거하는 역사적 접근 방법이었다면, 전혀 다른 차원의 관점에서 신경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스캇 맥나이트'를 통해 이루어졌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해 세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신약학자인 그는 전공에 맞게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생애와 그가 사용했던 신경에 주목한다. 신명기 6장에 기록된 쉐마와 레위기 19장에 기록된 사랑에 대한 이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기초로 하는 바로 "예수 신경"이다.

예수에게 있어 신경은 단순한 신앙고백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신경은 삶을 살아가는 이유였고, 삶을 대하는 자세였으며, 삶에 임하는 방식이었다.

"우리의 소명이 무엇이든, 예수에게서 영성 형성은 예수 신경과 함께 시작된다. ...중략... 당신과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는 서로 다르지만, 우리 각자의 삶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말하기 위해 주어졌으며, 그 삶은 예수 신경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36)

다시말해, 예수 신경은 신앙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이며. 영성 형성의 동기이자 목표이다.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인도하는 기준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성에 근거한 단순한 신앙의 고백이 아닌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지는 살아있는 진리. 그것이 바로 예수 신경이다.

예수의 삶은 그가 주장한 신경.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근거로 하는 예수 신경과 함께한 삶이었다. 우리의 모습처럼 신경과 삶이 분리된 삶이 아니라, 연결되며 하나되는 삶이었다. "예수의 삶은 그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책 커버 전체를 포함해서, 예수 신경에 의해 만들어진 삶"(390)이었다.

저자는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예수 신경과 함께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낸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들에게 예수 신경이 삶의 영향력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또한 공동체에 어떤 모습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실례와 예화, 다양한 인용문을 들어 설명한다. 더불어, 신자가 신경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과 함께 우리의 삶의 롤모델이신 예수가 살아냈던 모범적인 삶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고 있다.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2000년전 예수가 주장했던 말씀. 삶으로 살아냈던 말씀에 주목해보자. 그렇게 그의 삶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할때, 예수가 고수했던 말씀은 작은 예수로서 우리를 이끌어줄 것이다. 주문이 아닌 삶의 고백인 예수 신경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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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설교 갈라디아서 읽는 설교 시리즈
화종부 지음 / 죠이선교회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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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변명
(화종부, 갈라디아서, 죠이 선교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사의 일입니다. 설교는 물론이거니와 성경공부를 하거나 상담을 할때도 복음이 증거되어야합니다. 복음으로 복음을 위해  복음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시쳇말로 복음으로 밥벌이를 하는 직업이 바로 목사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복음을 잘 알고, 복음과 가깝고, 복음을 누리며 살거라 생각합니다. 복음의 전문가, 복음의 전도자가 바로 목사라는거지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목사는 세상과 구별되기는 커녕 오히려 세상과 단절된 교회라는 온실에서 삽니다. 때문에, 목사가 경험하는 복음은 실제이기보다는 이론에 가깝습니다. 간증이 기록된 신앙서적이나 학문적 내용의 신학 서적을 통해 복음을 접합니다. 복음을 글로 배웁니다. 간간히 심방을 하면서 접하게 되는 성도님의 간증은 설교의 좋은 예화로 사용할 뿐입니다. 때문에, 목사의 영적 내공은 세상이라는 치열한 야생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의 야성보다 더 약할지 모릅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 앞에서, 남서울은혜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화종부 목사가 자신의 설교집 "갈라디아서"에서 한 말은 목사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행한 업적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의 선하심과 사랑으로, 예수의 공로만으로 우리를 은혜 가운데 선대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복음의 심장입니다."(30)

목사로서 굳이 변명을 하자면, 목사의 학위나 능력에 근거하지 않고, 맡은 부서의 양적 부흥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 예수의 공로만으로 목사를 은혜 가운데 선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복음의 심장이라 합니다. 요약하자면, 부족하기 짝이 없고, 연약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지요.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지 모르겠네요. 복음으로 인해 부족하고 연약한 자가 목사가 되었으니 목사에게는 배울것도, 얻을것도, 받을것도 없지 않을까? 목사에게서 무엇을 바라는게 어리석은 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변명을 하나 더 해 볼까요? 저자의 말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담고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하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그분의 은혜를 우리가 누리게 하고, 그분의 은혜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입니다."(26)

목사의 말이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목사의 삶이 은혜가 아닙니다. 바로 목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합니다. 글로 배운 복음으로 연명해가는 부족한 목사의 삶이지만, 그래서 남을 변화시키기는 커녕 자신도 변화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자가 목사이지만, 복음으로 살려고 애쓰고 몸부림치는 목사의 삶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목사의 삶을 이끌어가는 복음이 은혜의 선물입니다. 

때문에, 목사는 복음을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강력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누구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목사질(?)을 목사답게 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은혜를 처절하게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목사는 복음을 경험하고 은혜를 누립니다. 비록, 영적 전쟁의 최전방에서 술과 담배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치는 폼나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진 못하지만, 교회 구석진 언저리에서 모양 빠지고 볼품 없게 목사는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쪽팔리냐구요? 은혜의 원천은 다르지 않습니다. 부끄럽냐구요? 복음의 능력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내일도 목사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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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
로버트 루이스 윌켄 지음, 배덕만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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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삼천 년의 세월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깨달음도 없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리.”대문호 괴테가 한 말이다. 여기서 삼천년의 세월이라 함은 탈레스로부터 시작되는 철학사를 일컫는 말이지만, 포괄적인 의미에서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역사를 모르는 자, 과거가 주는 현재적 의미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삶의 가치를 모른 체 살아간다. 능동적으로 삶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끌려가는 수동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과거역사는 거울과 같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뭍은 먼지를 털어내는 것처럼, 과거사를 통해 우리는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고 주어진 삶을 수정한다. 또한, 현실에 대한 소명의식을 점검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을 겸비한다. 결국, 역사를 반추하는 자세는 사람됨을 향한 첫걸음임과 동시에 녹녹치 않은 인생을 헤쳐 나갈 강력한 무기를 장착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탁월한 종교사학자인 '로버트 루이스 윌켄'의 저서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은 현대 기독교의 현주소를 점검케 하는 거울임과 동시에 미래를 준비케 하는 강력한 무기 역할을 한다. 초대교회사와 교부학의 권위자답게 그는 본 저서를 통해 교부들을 통해 세워진 기독교 정신을 차근차근 풀어간다. 특별히, '아돌프 폰 하르낙'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의 그리스화'라는 개념을 뒤엎고 '헬레니즘의 기독교화'라는 대전제 아래, 철학적 기초가 아닌 성경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빈틈없이 증명해낸다.

때문에, 독자는  본 저서를 통해 초기 기독교 사상의 형성 과정에서 교부들이 생각했던 성경의 권위와 역할, 거짓 교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보호하기 위한 피땀어린 노력, 우리의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되어지는 미래적 종말론의 의미를 저자가 인용한 방대한 교부들의 기록과 저서를 통해 생생히 살펴볼 수 있다. 특별히, 문학과 미술로 대표되는 예술 영역이 근본적으로 지향한 목적을 살펴보는 작업은 이 책을 더 풍성하고 역동적이게 만들어주는 영역이기도 하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회복과 갱신의 마음을 담아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친다. 그렇다면, 날카로운 교리적 공격과 질문 속에서 '다시 복음'이 아닌 '순수 복음'으로 시작했던 교부들의 사상. 저자가 인용한 '한스 우루수 폰 바타자르'의 고백처럼, "위대함, 깊이, 담대함, 유연성, 확실성, 그리고 불타는 사랑"이라는 징표들을 가지고 있는 교부신학으로 돌아가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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