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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제자도
존 하워드 요더 지음, 존 C. 누겐트.앤디 알렉시스-베이커.브랜슨 L. 팔러 엮음, 홍병 / 죠이선교회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구름 너머 하늘을 바라보는 거인
조진웅
늘 고민이었다. 이 고민은 그의 삶에서 비롯되었다. 행복해보였다. 행복의 가치를 발견하는 곳도 지극히 건전했다. 자신이 처한 직장에서 맡은 일을 성실히 감당하며 노동의 보람을 느꼈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일구었다. 섬김과 배려의 넉넉한 마음으로 인간관계의 기쁨도 놓치지 않았다. 법을 지켰고 시민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가까운 친척 매형. 누구나가 인정하고 모두가 칭찬하는 모범적인 생활이자 삶이었다. 단지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만 뺀다면...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끊임없는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하루하루 전쟁의 삶을 살았다. 교회에 대한 책임, 가장의 의무 사이에서 늘 고민하며 갈등했다. 때로는 희생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친구와의 관계는 등한시하거나 무시해버렸다.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길을 걸을 때도 주위를 의식했고, 감정을 숨기고 가식이라는 가면을 자주 써야했다. 어쩌면, 모두가 기피하고 대다수가 싫어하는 그런 삶을 나는 살고 있었다. 단지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는 내게 늘 고민이었다. 예수 없이 행복한 삶이 어찌 가능하며, 예수와 함께 고달픈 나의 삶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메마른 대지가 하늘로부터 단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타는 갈증에 생수를 원하는 것처럼, 갈한 나의 심령을 해갈해 줄 책을 만났다. "급진적 제자도." 메노나이트 교회의 멤버이자, 성경적 평화주의 해석학자로 알려진 존 하워드 요더의 책이다. 이 책은 요더의 초기 자료를 읽기 쉬운 언어로 편집하여 소개한 글 모임인데,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불순응와 순응이라는 개념을 통해 나의 질문에 하나씩 답해준다.
첫째로, 예수 없이 가능한 행복한 삶은 가능한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스스로가 복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존재라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고 또한 마땅히 그러해야한다. 하지만, 거룩한 존재라는 생각 이면에는 비기독교인을 향한 정죄가 짙게 깔려있고 이런 판단은 존재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문화까지도 확장된다. 즉, 그들은 세속적이라는 판단이며, 나는 그들과 구별된다는 생각이다. 성과 속이라는 다분히 이원론적 개념에서 비롯된 무지한 판단에 대해 저자는 일침을 가한다.
"세속성은 특별한 악행이 아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취하는 정상적인 행위다. 일차적인 관심을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두지 않는 모든 생각이나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세속적인 사람도 얼마든지 존경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존경받을 만한 세속성이란 것도 있"다.(74)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매형의 삶에 대한 고민이 풀렸다. 매형의 삶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또한 본이 될 수 있는 삶이고, 지극히 정상적인 삶이다. 단지, 요더의 말처럼 "일차적 관심을 하나님 나라와 의에 두지 않을" 뿐이다. 하나님의 법에 불순응하지만 세상의 가치엔 순응하며 사는 삶이다. 즉, 삶의 목적 자체에 차이가 있는 것이지 주님이 없는 삶이 꼭 타락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매형에 대해 가진 첫 번째 질문의 답은 자연스레 두 번째 질문을 가져온다. 세속성에 불순응함하며 예수와 함께 고달픈 삶을 살기보다, 세속성에 순응하며 예수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가능한가? 요더의 말이다. "아무데도 매이지 않는 복음은 우리에게 사회의 요구에 순종하여 어느 곳에 정착하기보다는 그런 엄청난 자유를 활용하라고 요구한다.(49)" 그가 사용한 단어를 택한다면 세상에서 "부적응자"로서의 삶이 기독교인의 삶이며, 부적응자가 되어 유동성에 관심을 두며 사는 것이 복음의 자유를 만끽하는 행복한 삶이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불순응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빛들의 아버지"(약 1:17)를 닮는 것"이 특징이며, "이 하나님은 "그 피조물 중에 위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약 1:18) 분이다. 결국, "세상에 대한 불순응과 그리스도에 대한 순응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하나님의 높은 사랑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94)"
그렇다. 세상에 대한 순응이 그리스도에 대한 불순응을 의미하는 것도, 세상에 대한 불순응이 그리스도에 대한 순응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 없이 행복한 매형의 삶이 반쪽처럼 보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치 못한 연고요, 예수와 함께한 나의 삶이 고달팠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치 못한 이유이다. 즉, 편협한 이원론적 사고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높은 사랑에 순종하는 것이 예수가 완성한 길이자 "새로운 문화"(199)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개척한 이 길은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현실이되 박해와 십자가가 따르는 현실이다. 그 문은 좁다. 그 길을 취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204)
그런 측면에서 책제목, 급진적 제자도(Radical Christian Discipleship)의 "Radical"이란 단어가 "뿌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예수를 따르기 원하는 제자의 삶의 중심도 십자가요, 뿌리도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결국, 매형의 삶을 완성할 뿌리도 십자가, 나의 삶을 회복할 뿌리도 십자가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본인이 그냥 견뎌야 할 어리석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이자 능력이다."(238) 그렇게 세상을 이긴 승리의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세상에 발을 두고 있되 구름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는 거인. “급진적 제자도”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