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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슬픔에게
서재경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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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하고 포근한 초막 하나

 

가을을 보내야 하는 아쉬움과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긴장의 문턱에서 시집을 한 권 읽었다. “슬픔이 슬픔에게제목에서부터 벌써 묵직함이 느껴진다. 저자는 목사이다. 실제 목회 현장에서 사역을 하고 계신 서재경 목사. 낯선 이름 앞에 책의 표지를 넘기지 못하고 주저한다.

 

시집을 읽기 전, 그의 신상 털기를 먼저 했다. 포털 사이트에서 이름을 검색해보고 어렵지 않게 저자가 담임하는 교회의 카페에 들어갔다. 교회 앨범에는 작고 아담한 교회 공동체의 행복한 모습이 담겨있다. 비록 온라인이지만, 한 영혼을 세우기 위한 목자의 심정이 따듯하게 느껴진다.

 

저자에 대한 신뢰가 쌓여서일까? 시집을 한 장씩 넘기며 단어 하나에 담겨있는 깊은 내음을 느껴본다. 음미하고 묵상해본다.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겨있고, 사람에 대한 성찰이 한절한절에 오롯이 담겨있다.

 

슬픔은 다만 슬픔에게

기대어 쉬고

슬픔은 다시 슬픔에게

위로가 되느니”(15)

 

서글픈 표현에 가슴이 뭉클하고 심장이 미어진다. 고통보다 슬픔을 택하겠노라는 저자의 고백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자연을 벗 삼아 슬픔을 승화시키는 이후의 시작들에서 인생을 향한 애증이 거침없이 표현된다.

 

그러게. 저자의 고백처럼, 산을 오를 친구가 있고 소명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지금껏 삶 속에 평범한 독백을 잃어버리고 성공만을 추구하며 살았던 인생 여정에 허무함이 몰려온다. 그 허무함을 맛보았기에 저자는 이런 진솔한 고백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주여 우리는

초막 하나 지으렵니다

작지만 아늑하고 포근한

초막 하나 지으렵니다“(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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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 - 리처드 마우가 개인적으로 간략하게 소개하는
리처드 마우 지음, 강성호 옮김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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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회복을 통한 구원의 완성

 

중생을 경험한 성도로서의 정체성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가? 다시 말해, 나는 성도의 신분을 가지고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의문은 성도가 가져야할 본질적인 물음이자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다. 특히, 현대인의 교회 혹은 성도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형태의 삶의 모양은 이미 던진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 신앙의 본질적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가지고 살아간 영적 위인이 있다. '아브라람 카이퍼.' 네덜란드의 목사이자 신학자,자유대학 총장뿐만 아니라 수상까지 역임했던 파란만장한 그의 삶과 사상을 리처드 마우가 짦게 소개했다. 그래서 원제가 "A short and personal introduction"이다. 하지만, 짧고 개인적인 입문서라 해서 결코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카이퍼의 전반적인 사상에 대한 핵심이 이해하기 쉽게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짧게 요약된 그의 사상을 살펴보자. 카이퍼는 죄를 "윤리적인 반역"이라는 전통적인 신학사상으로 이해했지만, 세상을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지는 않았다. 그는 죄의 결과인 타락에 대해 "그것은 선이 왜곡된 것이지, 악이 아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것은 왜곡이라는 의미에서 악인 것이지, 그 자체로 나쁜 존재로서 악인 것은 아니다."(31)라고 했다. 결국,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왜곡된 이 땅을 회복하고 깨끗하게 만들이 위함이다.

 

창조질서에 관한 카이퍼의 이해는 문화의 회복이라는 독특한 신학사상을 만들어낸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안에서 각 문화의 영역은 각각 그 고유한 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 각각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49) 따라서, 성도의 본질적 질문에 대한 해답은 고유의 영역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며, 정체성에 대한 확신은 고유의 영역에서 창조질서가 회복되도록 행하며 사는 것이다.

 

십자가는 개인의 구속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을 추구한다. 역으로, 공동체의 회복이 수반될 때 개인의 구원은 완전해진다. , 성경적 구원은 개인과 공동체의 동시적 회복을 필수로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로 위장한 맘몬의 가치를 가감 없이 수용한 한국교회는 구원을 개인에게 국한시키고 공동체 정화의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협소한 개인 구원 개념을 야기 시켰다. 평신도 법학자의 말처럼 "세상속의 교회"가 아니라 "교회속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카이퍼의 사상은 교회에 도전하는 바가 크다. "기독교인들은 문화에 깊이 관심을 두어야 하며, 주님께 진정 문화적으로 순종하는 일은 십자가 아래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209) 다시 말해, 십자가 아래에서의 올바른 회개는 개인적 죄 사함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향해 분명한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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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설교의 역사
폴 스코트 윌슨 지음, 김윤규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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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자 행복, 아픔이자 기쁨


사역을 하는 목회자에게 설교는 치열한 싸움과도 같다. 아니 싸움이라기보다 해산의 고통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 산모가 자신의 전부를 희생해 아이를 출산하는 것처럼, 사역자는 진액을 쏟아 부어 한편의 설교를 탄생시킨다. 그렇게 탄생한 설교는 사역자에게 자식과도 같다. 해산을 겪은 산모가 자녀를 보며 고통이 아닌 행복을 느끼듯이, 사역자는 설교를 통해 존재의미를 발견하며 기쁨을 느낀다. 그래서 사역자에게 설교는 고통이자 행복이며, 아픔이자 기쁨이다.


사역자의 애환이 담겨 있는 설교. 그 애환을 역사적으로 훝어낸 독특한 책이 나왔다. 토론토대학 신학부인 임마누엘 대학의 설교학 교수 '폴 스코트 윌슨'의 저서 "그리스도교 설교의 역사"이다. 그가 설정한 역사의 범위는 대단하다. 초대교회의 바울부터 시작해 20세기 마틴루터 킹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검증된 설교의 대가 20인을 선정하여 2000년에 가까운 설교의 역사를 250페이지로 압축시켰다. 그래서 책의 원어 제목은 "A Concise History of Preaching"이다.

 

긴 역사를 압축시켰다고 해서 책을 우습게 평가하면 절대 안 된다. 선정된 각 인물에 대한 간략하지만 핵심적인 소개와 함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설명도 놓치지 않았다. 설교학 교수답게 인물의 설교 배경과 설교학적 의미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고찰은 독자로 하여금 각 시대별 설교의 특징을 파악함은 물론이거니와 설교의 역사적 흐름에 대한 전체적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준다. 특별히, 각 인물이 실제로 했던 설교문의 직접 인용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이는 근거이자, 사역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풍부한 자료와 구성이 탄탄한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독자는 선지자의 마음을 닮아간다. 하나님의 말씀이 혼탁한 시대에 범접할 수 없는 영적 통찰력과 함께, 세상을 향해 애끓는 심정으로 그 분의 마음을 설교했던 선지자말이다. 그래서 황금의 입술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한다. "설교자의 중요한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으로, 설교자는 인간적인 찬사나 칭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대신에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기를 기대해야 한다."(55)

 

사람의 인정을 부인하고, 끊임없는 내면의 사투를 통해 한편의 설교를 만들어내는 것. 이것은 사역자에게 주어진 고통의 십자가이다. 또한 승리의 십자가이다. 왜냐면 "그 누구라도 지나온 세기들을 돌아보면, 좋은 때이든 나쁜 때이든 언제든지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특권을 실제적으로 누렸으며, 이를 위해서 설교자들에게 성령의 능력"(249)이 부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역자에게 설교는 고통이자 행복이며, 아픔이자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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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제자도
존 하워드 요더 지음, 존 C. 누겐트.앤디 알렉시스-베이커.브랜슨 L. 팔러 엮음, 홍병 / 죠이선교회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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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구름 너머 하늘을 바라보는 거인


조진웅


늘 고민이었다. 이 고민은 그의 삶에서 비롯되었다. 행복해보였다. 행복의 가치를 발견하는 곳도 지극히 건전했다. 자신이 처한 직장에서 맡은 일을 성실히 감당하며 노동의 보람을 느꼈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일구었다. 섬김과 배려의 넉넉한 마음으로 인간관계의 기쁨도 놓치지 않았다. 법을 지켰고 시민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가까운 친척 매형. 누구나가 인정하고 모두가 칭찬하는 모범적인 생활이자 삶이었다. 단지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만 뺀다면...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끊임없는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하루하루 전쟁의 삶을 살았다. 교회에 대한 책임, 가장의 의무 사이에서 늘 고민하며 갈등했다. 때로는 희생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친구와의 관계는 등한시하거나 무시해버렸다.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길을 걸을 때도 주위를 의식했고, 감정을 숨기고 가식이라는 가면을 자주 써야했다. 어쩌면, 모두가 기피하고 대다수가 싫어하는 그런 삶을 나는 살고 있었다. 단지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는 내게 늘 고민이었다. 예수 없이 행복한 삶이 어찌 가능하며, 예수와 함께 고달픈 나의 삶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메마른 대지가 하늘로부터 단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타는 갈증에 생수를 원하는 것처럼, 갈한 나의 심령을 해갈해 줄 책을 만났다. "급진적 제자도." 메노나이트 교회의 멤버이자, 성경적 평화주의 해석학자로 알려진 존 하워드 요더의 책이다. 이 책은 요더의 초기 자료를 읽기 쉬운 언어로 편집하여 소개한 글 모임인데,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불순응와 순응이라는 개념을 통해 나의 질문에 하나씩 답해준다.


첫째로, 예수 없이 가능한 행복한 삶은 가능한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스스로가 복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존재라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고 또한 마땅히 그러해야한다. 하지만, 거룩한 존재라는 생각 이면에는 비기독교인을 향한 정죄가 짙게 깔려있고 이런 판단은 존재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문화까지도 확장된다. , 그들은 세속적이라는 판단이며, 나는 그들과 구별된다는 생각이다. 성과 속이라는 다분히 이원론적 개념에서 비롯된 무지한 판단에 대해 저자는 일침을 가한다.


"세속성은 특별한 악행이 아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취하는 정상적인 행위다. 일차적인 관심을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두지 않는 모든 생각이나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세속적인 사람도 얼마든지 존경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존경받을 만한 세속성이란 것도 있".(74)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매형의 삶에 대한 고민이 풀렸다. 매형의 삶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또한 본이 될 수 있는 삶이고, 지극히 정상적인 삶이다. 단지, 요더의 말처럼 "일차적 관심을 하나님 나라와 의에 두지 않을" 뿐이다. 하나님의 법에 불순응하지만 세상의 가치엔 순응하며 사는 삶이다. , 삶의 목적 자체에 차이가 있는 것이지 주님이 없는 삶이 꼭 타락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매형에 대해 가진 첫 번째 질문의 답은 자연스레 두 번째 질문을 가져온다. 세속성에 불순응함하며 예수와 함께 고달픈 삶을 살기보다, 세속성에 순응하며 예수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가능한가? 요더의 말이다. "아무데도 매이지 않는 복음은 우리에게 사회의 요구에 순종하여 어느 곳에 정착하기보다는 그런 엄청난 자유를 활용하라고 요구한다.(49)" 그가 사용한 단어를 택한다면 세상에서 "부적응자"로서의 삶이 기독교인의 삶이며, 부적응자가 되어 유동성에 관심을 두며 사는 것이 복음의 자유를 만끽하는 행복한 삶이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불순응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 "빛들의 아버지"( 1:17)를 닮는 것"이 특징이며, "이 하나님은 "그 피조물 중에 위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1:18) 분이다. 결국, "세상에 대한 불순응과 그리스도에 대한 순응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하나님의 높은 사랑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94)"

 

그렇다. 세상에 대한 순응이 그리스도에 대한 불순응을 의미하는 것도, 세상에 대한 불순응이 그리스도에 대한 순응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 없이 행복한 매형의 삶이 반쪽처럼 보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치 못한 연고요, 예수와 함께한 나의 삶이 고달팠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치 못한 이유이다. , 편협한 이원론적 사고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높은 사랑에 순종하는 것이 예수가 완성한 길이자 "새로운 문화"(199)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개척한 이 길은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현실이되 박해와 십자가가 따르는 현실이다. 그 문은 좁다. 그 길을 취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204)

 

그런 측면에서 책제목, 급진적 제자도(Radical Christian Discipleship) "Radical"이란 단어가 "뿌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예수를 따르기 원하는 제자의 삶의 중심도 십자가요, 뿌리도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결국, 매형의 삶을 완성할 뿌리도 십자가, 나의 삶을 회복할 뿌리도 십자가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본인이 그냥 견뎌야 할 어리석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이자 능력이다."(238) 그렇게 세상을 이긴 승리의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세상에 발을 두고 있되 구름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는 거인. “급진적 제자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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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을 선교적으로 읽으면 두 모델이 보인다
손창남 지음 / 죠이선교회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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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배드민턴을 즐길때까지, 모두가 풀뿌리가 될때까지

(손창남, 사도행전을 선교적으로 읽으면, 조이선교회)


청소년을 데리고 5박 6일간의 일정으로 일본을 다녀왔다타이틀은 일본단기선교목적은 그 땅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에 있다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는 청소년들이 다 그러하듯이단기선교에 임하는 친구들의 모습은 기대 이하였다우상이 만연한 일본 땅을 놓고 기도하는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친구들아침 경건시간에 멍때리는 친구들저녁 나눔 시간에 교과서적인 대답만을 늘어놓는 친구들단기선교의 명목 하에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을 보며 선교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 무엇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 시간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실망과 회의로 가득한 후회로 2-3일간의 시간을 보냈다일본 현지 목사님의 인도로 일본에 뿌리내린 복음의 흔적과 순교의 현장을 방문하며그 땅을 보고 밟는 시간이 쌓일수록 작은 변화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그리고 축적된 변화의 모습은 마지막 기도 시간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터트렸다. 10명 남짓한 일본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서로 기도하는 시간철부지처럼 행동하던 학생들이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기 시작했고흐느끼기 시작했으며통성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그렇게 성령의 강력한 임재는 순식간에 기도의 현장을 덮었고우리에게 잊지 못할 영적 추억을 안겨주었다.

 

영적으로 척박한 일본 땅에서 경험한 선교여행은 내게 선교에 대해 곱씹어보게 했다.

 

"진정한 선교적 교회란 더 많은 배드민턴 선수를 태릉선수촌에서 보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이 배드민턴과 친근해져서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우수한 선수가 나오고 그 선수들이 국제무대에 가서 메달을 따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264)

 

조이 선교회를 섬기는 '손창남 선교사'가 "사도행전을 선교적으로 읽으면 두 모델이 보인다."라는 책에서 선교에 대해 한 말이다이 말에는 30여년 가까이 현장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한 그의 선교철학에 대한 엑기스와 수많은 사람을 선교사로 동원한 선교동원가로서의 노하우가 담겨있다모든 국민이 배드민턴을 즐길 때 우수한 선수가 배출되는 것 같이교회가 특정 집단 혹은 인물을 선교사로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선교에 관심을 쏟고 기도할 때훌륭한 선교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두가 배드민턴을 즐기는 모습을 풀뿌리 선교사라고 표현한다드러나지 않고 소리 내지 않고음지에 뭍혀 묵묵히 주님의 오실길을 닦는 사람 혹은 공동체가 바로 풀뿌리 선교사인 것이다그렇게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대중적 선교사에 대한 관심을 풀뿌리 선교사로 향하게 한다.

 

"흩어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풀뿌리 선교가 이룬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그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안디옥 교회가 생기게 되었는데 유대인뿐 아니라 헬라인들도 참여하는 놀라운 공동체였다."(119) 바울이 선교의 거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도자 없이 교회를 일구어낸 안디옥 교회의 풀뿌리 선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복음을 현지의 상황과 환경에 맞게 전달할 수 있도록 최적화되어 있는 이들이들의 수고와 헌신이 밑거름이 되어 풍성한 선교의 열매가 맺힌 것이다.

 

청소년들과 함께 찾았던 교회는 큐수 중앙에 위치한 아마쿠사에 있었다역사적으로 복음의 전달 루트였던 축복된 이 지역은 더불어 큰 핍박이 있었던 순교의 지역이기도 하다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대가로 목숨을 버려야했기에 지금도 이 지역은 기독교 자체를 거부하고 금기시한다.

 

청소년 친구들이 눈물로 기도하던 그 밤그 교회의 여집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일본은 믿는 사람이 너무나 적습니다.나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는 전교생이 182명인데그중 기독교인은 나의 자녀 2명밖에 없습니다울며 기도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정말 부럽습니다."

 

몇 안 되는 믿음의 동역자들과 힘겹게 신앙을 지켜나가야 하는 일본 현지 교회의 집사님을 보며 가슴이 참 많이 아팠다그들의 외로움이 느껴져 안타까웠다믿음 좋은 많은 성도님들과 함께 사역을 하며 감사하지 못하는 내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예배에 동참했던 청소년들도 동일한 마음을 느끼고 경험했다크리스천이 됨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불편을 감수함에도 불구하고소리 없이 자신의 신앙을 지켜가고 있는 이들일본교회의 현지 성도들은 일본 땅의 부흥과 회복을 소망하며 소리 없이 풀뿌리 선교사역을 감당해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유일한 민족이 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를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셨다."(38) 손창남 선교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이렇게 정의한다밤을 수놓은 많은 십자가를 자랑으로 여기는 영적 자만심에 빠져있는 우리에게우리가 받은 영적 축복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다른 나라를 향한 사명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가 찾아야 할 선교적 모델은 무엇일까모두가 배드민턴을 즐기자모두가 풀뿌리가 되자그럴 때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통로가 되고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며우리는 사도행전 29장의 새로운 주인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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