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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갈 수 있는 배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윤희 옮김 / 살림 / 2018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레이지 사야카'라는 별명의 작가 무라타 사야카.
왜 별명이 크레이지일까 싶었는데 책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직감했다
이 사람은 쉽게 꺼내지 못하는 숨겨진 이야기를 수면 위로 올려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멀리 갈 수 있는 배'라는 책 제목이 책을 읽기 전에는 뭔가 신비한 느낌이 들면서 서정적인 이미지까지 떠올리게 했는데 읽고 나니 내가 생각했던 내용과 상당히 거리가 먼 이야기로 조금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멀리 갈 수 있는 배'에는 3명의 여성이 각자의 시선에서 말하는 내용이 이어지는데 유일하게 한 명 츠바키만이 이야기의 주체가 되지 않다는 점이 조금 이상하다. 내 생각에는 작가의 입장으로 봤을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여성에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중립으로 놓고 그와 거리가 있는 두 사람의 입장에서 글을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마치 각자가 떠돌아다니는 행성처럼 같은 여성이지만 지극히 다른 느낌의 세 사람

열아홉 살 리호. 남자친구가 있지만 그녀는 남자친구와의 잠자리가 괴롭게 느껴진다.
겉모습은 여자지만 자신이 어쩌면 여성을 좋아하는 남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리호는 혼란 속에 빠져들게 만드는데. 결국 리호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 남장을 하고 독서실을 찾게 된다. 남성 or 여성이라는 두 가지 성별을 벗어나 리호는 자신의 성별을 찾기 위해 몰두한다.

어릴 때부터 예쁜 외모로 인기가 있는 츠바키는 밤에도 자외선 차단제를 바를 만큼 여성성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천생 여자인 츠바키는 아르바이트생 리호와 독서실에서 만나면서 그녀의 고민을 공유하지만 치카코는 전혀 리호를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별의 한 조각이라고 믿는 치카코. 그녀는 모든 것을 인간이 아닌 물체로 감각하는 사람이다. 같은 사람과의 연애보다 우주, 별과의 연애를 하는 사람- 그런 그녀에게 독서실에서 알게 된 남자가 고백해온다.
리호)
하루라도 빨리 무언가 자신을 설명할 단어를 찾고 싶었다 그렇게만 되면 메이에 대한 그 행동의 잘잘못도 밝혀질 터였다.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에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서 무언가에 소속되고 싶어졌다. p63
치카코)
혼자 있으면 다시 영원히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돌아가버린다. 다른 사람들처럼 혼자서 아침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우주를 떠도는 별과 별 사이에 영원히 흐르고 있는 시간 속에서 익사해버릴 것 같았다. p68
리호 - 츠바키)
"그래서 2차 성징을 찾는 건 어떻게 됐어?"
"아직. 이제 시작이니까요."
"도대체 왜 그런 걸 시작한 거야?"
"저는 섹스가 너무 고통스러워요.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도 힘들고 괴롭기만 해요.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것뿐이야? 그런 거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잖아. 그러니까 너는 자신이 남자라는 결론을 바라는 거지. 그래서 2차 성징을 다시 찾고 싶은 거고. 하지만 단지 섹스가 괴롭다는 이유 때문이라면 그냥 여자로 있어도 상관없지 않아? .... 그리고 가끔은 섹스가 싫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어. 여자는 그런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걸. 그런데 너는 그 이유만으로 그런 짓을."
"그것만이 아니에요! 저는 평소에도 여자로서 힘든 일이 많았어요. 여자라는 성이 너무 힘들어요. 성적인 시선을 받고, 얼굴이나 몸매로 가치를 평가받기도 하고, 당연하게 여성스러움을 강요당하고, 그 모든 것들이 숨 막히고 싫어요."
"그러니까 그건 모든 여자들이 그렇다니까. 네가 하고 있는 생각을 다른 여자들도 똑같이 하고 있단 말이야." P121-122
리호 - 치카코)
"대체 왜 남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냥 그대로 있어도 되잖아. 리호는 무언가 단단한 줄에 묶여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오히려 리호가 그 줄을 스스로 묶고 있는 것처럼 보여. 사람을 꽁꽁 동여매는 줄을 손에 들고 자신을 묶어버린 거지. 그러니까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거 아닐까?" p135
"저 독서실에서, 배에서, 어디가 멀리 자유로운 곳으로 나가고 싶었어요. 나에게는 노아의 방주였거든요.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로 데리고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타지 않는 노아의 방주,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하멜른의 피리일 뿐이라고 누가 그러더라고요. 새로운 세계를 항해하는 배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어요. 무성이라는 건 결국 피난처에 불과했던 거예요." p168
여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힘든 것인지 깨닫게 되는 요즘
다시 한번 여자라는 존재에 대해 되새겨보게 되는 책인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