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불평등 - 시간의 자유는 어떻게 특권이 되었나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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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우리는 나무늘보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속도가 나의 속도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따라 사고가 형성되고 습관이 심어진다. 밥도 빨리 먹어야 하고, 잠도 덜 자야 한다. 더 많이 움직여야 하고, 그게 무엇이든 더 많이 생산해 내야 한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생산물까지 더 많이.

 

또한 하층계급이 노동을 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것은 유랑 혹은 게으른 방랑으로 비난받았고, 1531년의 최초의 「방랑법」통과로 이어졌다. 이 법률은 ‘게으름’을 “만악의 어머니”로 서술하고, 바랑죄를 지은 사람은 채찍질을 당하고 “노동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그 이후의 방랑법들은 더욱 보복적이었다. 가장 가혹한 것은 1547년에 통과된 것으로 첫 번째 ‘위반’을 하면 V자 낙인을 찍고 2년간 강제 노동에 처하며, 두 번째 위반을 하면 사형했다. 겨우 몇 년 사이에 10만명 이상이 교수형을 당했다. 인구의 대부분은 노동을 ‘원하도록’ 강요당했다. 노동을 원한다는 것은 분명 자연적인 인간의 충동은 아니었다. (p.63)

 

저자의 주장처럼, 우리는 세뇌당했다. 요즘은 누구를 만나더라도 퇴사를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일을 하지 않고 먹고살 수 있을지 고민한다. 나는 특별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는데 특별한 일은커녕 내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노예 상태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이런 생각을 이야기하면 한편에서는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들의 입장에선 노동이 숭고한 걸까. 아니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먹고살려면 일(책의 주장대로라면 노동)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일까. 그들은 정말 평생 사용자의 지시를 받아 혹은 스스로 사용자가 되어 노동을 하고 싶은 걸까.

 

‘노동’이라는 마릐 기원은 노동이 피해야 할 어떤 것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노동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어 포노스는 고통과 노고를 의미했으며, 가난이라는 뜻의 페니아와 유사한 어원적 뿌리를 가졌다. 노동은 가난이라는 조건에서 수행되는 고통스럽고 힘든 활동을 의미했다. (p.24)

 

얼마 전에 노동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 그러면 노동을 할 시간이 주어지면 뭘 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 안에는 명백히 인간이 노동을 하지 않고 할 게 많은 건지 의문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 책을 읽은 덕분에 노동이 아니라 일을 하고 살 거라고 이야기했다.

 

노동시간이 주 40시간으로 주어지는 현재와 어떻게든 아득바득 프리랜서로 먹고살던 주 20시간 내외의 최근 몇 년 동안 나의 삶에서 중요한 건 일이었다. 나에겐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되는대로 일에 내 시간을 투자한다. 오죽하면 시간 확보를 위해 졸업 당시 취업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겠는가. 아직도 마찬가지다. 현재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기회만 주어진다면 회사를 퇴사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

 

일자리를 갖는 것이 심지어 자유와 같은 것이 되었는데, 이는 노벨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 취한 입장이기도 하다. 일자리를 갖지 못한 것은 ‘존엄성’의 부정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이코노미스트』의 ‘바틀비’는 말한다. “궂은일이라는 생각은 일자리를 갖는 게 존엄성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흐린다.” 그러나 부유한 논평가들이 하는 주장, 즉 불쾌한 일일지라도 일자리가 존엄성을 부여한다는 주장은 역겹다. (p.208)

 

그래서 이 책이 반가웠다. 시간 불평등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느끼던 중요한 논점이다. 물론 책의 원제는 시간 정치라고 하지만. 자본의 불평등보다 시간 불평등이 훨씬 나에겐 중요한 문제다. 물론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구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졸업 작품을 준비할 때 누구는 해외여행을 가고 졸업작품 비용도 부모가 지원해 준다. 그래놓고는 앞에서 졸작을 위해 힘들었다고 말한다. 가소로웠다. 가난을 전시하고자 하는 욕망일지언정 그 정도 말은 이 불평등한 사회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걸 시기나 혹은 질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불평등을 공고히 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짓눌리는 사회를 만드는 데 조력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분노. 이 분노는 어쩌면 내 삶의 방향성을 정해준 어떤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전환적 정치에는 공동의 적대자에 대한 계급 기반의 분노, 가치 있는 어떤 것의 상실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 더 나은 미래의 전망에 관한 명확한 표현 등의 조합이 필요하다. 분노는 불의와 부당한 불평등에 대한 지각에서 나온다. 그러한 의식이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지려면 명확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일부 불의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알게 되면 대중의 불만으로 이어진다. (p.369)

 

자본주의 시대의 불평등을 야기하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 시스템을 많이 이야기했다. 아직 우리나라는 그곳에 서있다. 아니, 어쩌면 윤석열로 인해 50년을 후퇴한 민주주의처럼 우리 경제는 고꾸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건 두고 봐야 할 문제지만 여하간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던 그 시절로부터 아직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주 52시간이 도입된 지 벌써 6년 남짓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착취의 시스템이다.

 

휴가는 에너지를 보충하고, 개인적 관계와 가족관계를 강화하고 노동으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회복하고, 더 넓은 사회적 전망을 줄 가능성이 있다. 휴가의 축소는 건강을 악화한다. 미국 질명통제예방센터는 휴가가 거의 없는 여성은 관동맥성 심장병이 생길 가능성이나 심장마비가 올 가능성이 매년 최소한 두차례 휴가를 가는 사람보다 8배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위험의 심장질환이 있는 1만 2천명 이상의 남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언례 휴가를 가지 않는 사람은 언례 휴가를 가는 사람에 비해 모든 종류의 원인에 따른 사망 위험이 21퍼센트 더 높고, 심장마비로 사망할 위험이 32퍼센트 더 높다. (p.214)

 

나도 휴가를 가지 않았었다. 간단했다. 프리랜서는 그런 휴가란 항상 불안요소였으니까. 혹시라도 일이 끊길 수도 있었고, 휴가를 가게 될 경우 일당은 끊겼다. 우리 사회는 휴가에 관해 논할 수 있는 사회일까. 아직 거기까지 못 가지 않았을까. 이 책에서는 영국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역시 선진국이라고 해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재택근무와 주 4일제를 거쳐서 기본소득을 논하고 있는 장에 들어섰을 때는 부러움이 밀려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 기본소득을 주장하던 이재명 대표는 기본소득 철회를 논의하고 있다. 분하고 억울하다. 만약 기본소득이 있는 사회라면 어쩌면 내 삶도 더 열정적이고 즐거움이 넘쳐나지 않았을까. 물론 그 또한 알 수는 없다.

 

프레카리아트화된 정신은 또한 청원자가 된다는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대부분이 프레카리아트로 구성된 예술가 공동체에서 심한데, 프로젝트를 위해 자금 제공 기관에 지원하는 데 의존하기 때문이다. 지원 및 전체 과정이 예술가들을 청원자로 바꾸고, 일시적인 꿈과 희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문화 관련 관료들에게 청원을 한다. 이 꿈과 희망은 많은 경우 예술가 내부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라 관료들에게 팔기 위한 것이다. (p.237)

 

이 책을 읽다 보면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나름 진보적인 나조차도 반성하게 만드는 주장들. 위 문단이 그러하다.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서류 작업을 하면서 매번 생각한다. 심사하는 사람들이 항상 좋은 작품을 선보인 것도 아니고, 그들의 자질을 의심할 때도 많다. 무엇보다 시간을 엄청나게 쏟아야 하는 서류들이다. 그 정도 지원을 받으려면 당연히 서류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매번 불만이었다. 작품은 작품으로만 봐야지 적어 낼 게 너무나도 많다. 도대체 부가 서류들은 왜 내는 걸까.

 

이건 저자가 주장하는 다른 국가 지원 사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업급여를 받거나 취업지원을 받을 때 너무 많은 시간을 쏟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돈을 받으려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는데 내가 안일한 것이었다. 이 또한 불평등하다는 걸 저자가 일깨워 줬다.

 

일자리 보장 정책은 가부장주의적일 것이다. (중략) 그리고 일자리 보장 지지자들은 훈련도 받지 않고 십중팔구 보장된 일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급여를 상실하게 되어 분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나이 든 친척이 사회적 돌봄을 받는 것을 진짜로 원하는가? (p.344)

 

그들은 수백만명이 가질 것이라고 예상되는 일자리에서 자신이나 친구들이 일하기를 바라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좋은 급료와 좋은 노동조건의 괜찮은 일자리를 갖길 바란다고 그들이 응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일자리가 생래적으로 시시하고 따분하며 따분하게 만들고, 그런 일을 수행하도록 밀어 넣어지거나 유도된 사람들의 시간을 잡아먹고, 그런 다음 물질적 궁핍의 공포로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p.358)

 

결국 우리 사회의 윤리다. 나와 남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내가 싫은 건 남도 싫다는 걸 인식하기. 차별하지 않는 것. 자본주의 논리는 차별과 혐오를 지속적으로 생산한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은 젊었을 때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노년을 보내는 거라는 역겨운 말들. 그들이 베트남 참전 용사였는지, 공부를 잘했는지, 혹은 어떻게 삶을 살았는지 알고 그런 말을 내뱉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한 가지를 지적한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가 잠도 자지 않고 하루 24시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대한민국 TOP10에 들 수 있는 부자가 될 수 있는가.

 

2001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포르투갈, 에스파냐에서 이루어진 유고브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분의 2가 기본소득을 지지했으며, 모든 나라에서 다수였다. 응답자가 생각하기에 기본소득이 어떤 이점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공통된 대부분의 대답은 분노를 줄인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본소득 혹은 보장소득이 분노와 정신적 불건강을 줄인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준 실험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p.404)

 

희망. 누구나 부자가 되진 않아도 누구나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가 올 수 있다는 희망. 어쩌면 이 책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에서 시작되어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반성을 부여했고, 공감과 연대를 지나쳐서 희망을 건넸다.

 

나는 해방이라는 위대한 고전적 담론을 버리는 것을 거부한다. - 자크 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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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ㅣ 문예 인문클래식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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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은 필독서로 손꼽히는 도서 중 하나다. 이런 도서들은 무수히 많지만 살면서 이런 도서를 접하는 건 쉽지 않다.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좋은 책을 읽어볼 기회를 가졌다.

 

어렵다고 정평이 나있지만 사실 어려운 건 없다. 어렵다고 한다면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알지 못하는 무지함에서 오는 막막함이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다만 이 클래식이 지금까지 필독서로 자리 잡고 있는 이유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봄 직하다.

 

우리는 비상계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아니, 살게 되었다. 우리는 공화국이지만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서 이런 국면을 맞이했다. 순식간에 군사 독재 시절로 회귀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다. 애초에 보수당이 3분의 2 이상 의석을 가지게 되었다면 무슨 일이 펼쳐졌을까.

 

<군주론>에 따라서 만약을 가정해 보자는 것이다. 대통령이 정말 정치를 잘 해서 민중을 위했고, 자신의 측근들에게 적절한 두려움을 주었으며 그들의 힘을 적절하게 억압했다면 어떠한 결과를 맞이했을까. 그땐 군주제가 됐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터무니없는 소리일까? 비상계엄 또한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군주론>은 단순히 500년 전의 이탈리아 사회에서만 적용된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회사에서도 적용될 법한 문제다. 용병의 문제. 식민지의 문제. 원군의 문제. 민중의 문제 등. 집단에서는 모두 적용할 수 있는 문제다. 게다가 심리적인 문제가 포함된 아주 고차원적인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500년이 지난 세월의 우리들에게는 당시와 다른 인류애가 존재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부분은 숙고해 볼 만하다. 특히 다음 대목이 그러하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보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을 해칠 때 덜 주저합니다. 사랑은 감사의 끈으로 유지되지만 사람은 저열해서 이익을 챙길 기회가 생기면 얼마든지 관계를 깨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의 공포로 유지되며 당신을 결코 저버리지 않습니다. (17장)

 

오늘 뉴스에서 비상계엄 당일 탱크를 막은 시민의 영상을 보았다. 지금 우리는 두려움에 맞선 시대에 살고 있다. <군주론>은 인간 본성과 심리를 꿰뚫는 명서지만 우리 사회는 <군주론>을 다시 써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고 싶다.

 

이번 문예출판사의 <군주론>은 당시 군주들의 초상화 등 그림이 실려있어서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훌륭한 군주라고 평가하지만 그토록 잔인하고 냉철한 인물들의 얼굴을 보니 오싹함까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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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간 ㅣ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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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1년생인 나는 어렸을 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수도 없이 들었다. 어렴풋하지만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도 몇 번이나 봤고, 주변에는 금강산을 다녀온 친구들도 꽤나 많다. 하지만 남북전쟁은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었고, 연좌제나 빨갱이라는 단어는 영화나 소설에서 접했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2017년 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시위에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까지 갈라놓는 정치적 갈등이 분단 직후 상황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음을 실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비극적인 근현대사에 가장 깊숙하게 발을 디뎠던 것은 13년 전 군 복무 시절이다. 후방에 근무하던 나는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말 그대로 전역만 기다리던 병사였다. 그날도 무슨 유해를 찾겠다고 땡볕에 산에 올라 땅에 삽질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우리 부대에서 아무도 유해를 찾지 못했지만 한조였던 나와 맞선임은 유해를 두 구나 찾았다. 한 구는 완전 유해였다. 탄피에 만년필, 수첩까지 나왔다. 추후 영결식까지 거행됐다. 어쩌면 60여 년을 차가운 땅속에서 영겁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그분도 누군가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문득 <유령의 시간>을 읽고 그날을 떠올려본다.

 

고작 15년을 아버지와 함께 했을 지형은 아버지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45년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이섭은 격동기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낸 인물이다. 아니, 이렇게 표현하는 건 실례다. 어떤 언어로도 이섭이 살아온 세월을 표현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형은, 혹은 작가 김이정은 이섭의 삶을 글로 써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것이 오빠 지석과 한 약속 때문인지, 딸로서의 도리인지, 혹은 작가로서의 사명인지는 알 수 없다. 때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느껴졌던 많은 감정들 중 부끄러움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나한테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이섭은 말한다. “인간의 생이여, 헛되고 헛되도다. 하물며 이념과 꿈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지 않는 생은 또 얼마나 헛될 것인가”

 

이섭의 삶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치열했다. 어쩌면 얼굴에 침을 뱉은 운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삶은 달라졌을까. 숙부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면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하지만 인생이 헛된 것처럼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부질없다. 다만 그는 숙부의 영향을 받았고, 운식을 만났다. 그 삶 속에서 그는 치열하게 살아갔다. 이념을 가지고 꿈을 꿨으며 꿈이 박살 났을 때도 인간을 믿고 살아갔다. 진과 아이들을 하염없이 기다렸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미자를 호적에 올렸다. 모든 걸 잊기로 다짐했지만 남북의 상황이 좋아지니 실낱같은 희망을 다시금 품었다. 그는 끝내 떠났지만 진과 지용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지형이 듣는다.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결말이었다고 하면 너무 싱거울까. 하지만 나는 지형이 지용에게 편지를 쓴 대목에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결말은 단순한 판타지라고 치부해선 안 되는 무언가가 담겨있다. 매일 같이 양조장에서 하염없이 진과 아이들을 기다리던 이섭의 시간이 담겨있고, 가족들의 생사를 모르는 채 떨어져 있는 이산가족들의 현재가 담겨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비극적 근현대사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담겨있다.


이제 어린아이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랫말을 모른다. 심지어 대학생인 친구들을 만나봐도 북한과의 통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부표처럼 쓸려왔을까라고 생각한 이섭처럼 어쩌다가 이 나라는 이지경까지 왔을까 생각해본다. 무수히 많은 유령들이 한반도를 떠다니고 있다. 이제 어떡할 것인가. 도착하지 못한 편지는 반송될 것이다. 이제 곧 우리는 반송료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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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1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23 0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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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전설의 모든 것
얀 해럴드 브룬반드 지음, 박중서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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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책을 제공받고 쓴 글입니다.


오래된 습관 중 하나는 온라인 서점 사이트 서핑이다. 이 책이 신간 목록에 떳을 때 자연스럽게 보관함에 옮겨두었다. 이유는 하나다. 이야기를 쓰는 입장에서 이런 책들은 아이템 서치에 유용하기 때문. 하지만 가격이 가격인지라 쉽게 결제를 하지 못할 때 서평 이벤트가 열렸고, 응모해서 당첨됐다.


두께에 비해 책은 술술 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운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짤막한 이야기가 묶여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도시전설이라니. 언제 어디에서나 돌고 도는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라니. 이런 이야기들엔 보통 욕망이 서려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비오는 날 멈춰선 차량에 커플이 타고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남자는 잠시 차에서 내려 용변을 보러 갔다. 돌아오지 않는 남자친구를 걱정하고 있는 여자는 무슨 일이 생겼을까 차에서 내린다. 그런 뒤 발견한 남자의 시체는 차량 위에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이 사건의 범인은 인디언이다. 


이러한 이야기들. 책에서 발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읽었었고, 어딘가에서 들었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일부러 책을 펼치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서 적었다. 변형되는 이야기엔 변화하는 욕망 또한 깃들테니. 여하간 인디언에 대한 혐오와 혼자 남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게다가 미국에서는 차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지역과 문화까지 아주 짤막한 이야기에 스며들어있다. 결국 핵심은 우리 사회의 욕망이다. 불과 몇년전 난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무렵 국내에서는 난민들이 그들의 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뉴스가 퍼졌다. 물론 일부 사실을 기초로한 가짜 뉴스다. 우리나라의 의료 보험 혜택을 외국인이 전부 가져가고 있다는 뉴스도 많이 퍼져있다. 물론 일부 사실을 기초로한 가짜 뉴스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퍼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욕망을 보여준다. 


우리의 생활과 아주 비슷한 사례들도 많다. 첫 이야기는 에어컨이 고장난 교실에서 시험을 치루던 학생이 창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선생님이 달려들어 막았다는 이야기다. 선생님은 어려운 시험에 학생이 자살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던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든다. 또 강아지에 관련된 이야기는 분명 어딘가에서 들어본 이야기들이다. 집에 돌아온 새댁이 죽어있는 갓난 아이를 보고 경악한다. 키우던 강아지 입 주변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결국 강아지를 죽인다. 하지만 집을 둘러본 결과 도둑이 들었던 것이었다. 도둑과 싸우던 강아지를 죽인 주인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강아지 관련 이야기는 대부분 강아지는 의로운 동물이고, 주인에게 충성한다는 내용들로 가득 차있다. 이 또한 우리가 강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각각의 이야기에 주석을 달아 놓는다. 내게 큰 도움이 되었던 주석은 각 사례들이 어떤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에서 변형해서 쓰고 있는지를 알려준 것이다. 각 이야기들을 찾아보진 못했지만 열심히 적어뒀다.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들은 참조해볼 필요성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흥미롭게 봤던 이야기들을 따로 적어뒀다. 책의 저자는 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다고 서술했지만 오히려 난 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재밌었다. 미국에서 많이 퍼져있는 자동차 테마는 문화가 살짝 빗겨간 느낌이 있고, 동물과 관련된 일화들은 개인적 취향과 맞지 않았다. 하지만 성과 관련된 이야기는 만국 공통이니 오히려 더 재미를 느꼈다. 


꼭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이 아니어도 평소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재밌게 볼만한 책이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짤막한 분량으로 정리해준 저자가 고맙기도 하다. 최근의 경향보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일파만파 퍼진 이야기들이지만 여전히 현재에도 유효한 이야기들이 많다. 마치 동화를 보며 교훈을 느끼는 것처럼 이 책을 보면서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들여다보는 것도 이 책의 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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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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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순히 표지가 너무 예뻤다. 읽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읽을 책이 산더미였다. 표지에 이끌려 클릭했을 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다른 것도 아닌 “로버트 레드포드”란 이름이었다. 의아한 이름. <내일을 향해 쏴라>의 선댄스, 혹은 <보통 사람들>의 감독, 혹은 <흐르는 강물처럼>의 감독, 혹은 그 유명한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에서의 기자 밥 우드워드, 그 로버트 레드포드였다. 제임스 설터는 그에게 영화 시나리오로 이 이야기를 제안했다고 한다. 내가 이 부분에 끌렸던 이유는 내 꿈이 영화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문학이, 웹툰이, 때때로는 시가 영화로 옮겨지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그렇게 집어든 책은 처음부터 미국 소설이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캘리포니아의 빛을 그린다. 난 캘리포니아의 빛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션 베이커의 영화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에서 수없이 캘리포니아를 봤다. 누군가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그 분위기를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느껴진다. 이건 제임스 설터의 재능이라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미지의 세계가 느껴진다. 카프카의 문체에서는 적어도 난 프라하의 공간을 느끼지 못한다. 미지의 세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는 빼쩨르부르그가 느껴진다. 하지만 난 빼쩨르부르그를 가본 적도 없고 거의 그 지역을 느껴보지도 못했다. 그냥 책을 읽다보면 마치 내가 상상하고 있는 공간이 빼쩨르부르그라는 감각만 남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건 감각이다.

 

<고독한 얼굴>에서 처음으로 대면하는 것은 내리쬐는 햇빛, 물론 강렬하면서도 때때로는 부드럽게 퍼지는, 물안개가 섞인, 그런 햇빛이 교회 지붕에 있는 노동자들을 비치고 있는 이상하리만치 나른하면서도 고통스러운 괴리감이다. 이 괴리감이 느껴지는 까닭은 내가 지붕 위에서 강렬한 태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일 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 떠올려보면 나른할 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익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괴리감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것이 기시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하지만 중요한 무대는 드뤼이다. 캘리포니아가 느껴지는 문체는 여전한데 장소는 프랑스로 변했고, 마치 이 문체가 묘사하는 드뤼를 포함한 산들과 풍경들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장소에 도착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느낌이 마치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주인공 랜드의 감각과 닮아있는데 이러한 기시감이 사라지는 순간들은 랜드가 등반을 할 때다. 그때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공간에 낯선 모습으로 들어온 랜드보다는 랜드의 눈 앞에 보이는 산의 아주 작은 일부분과 랜드의 행동만이 머릿속에서 그려질 뿐이다. 그래서 독자들에게는 괴리감에서 기시감으로, 기시감에서 안정감으로 옮겨가는 감각이 느껴진다. 이것의 입체감은 동시에 가장 안전하고 익숙한 장소에서 낯선 장소로, 낯선 장소에서 위험한 장소로 옮겨가는 이상한 모순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제임스 설터는 이러한 부분이 영화라는 매체와 이 이야기가 어울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는 그것을 이미지로 보여준다. 소설은 이미지를 그리게 만드는 것이기에 공간을 이동하면서 랜드의 감정이 점점 안정감을 찾는다는 것을 얼굴(face)로 보여줄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제작되지 않았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제임스 설터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그 이유를 주인공이 너무 과묵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글쎄. 영화감독들의 인터뷰를 믿지 말라는 평론가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생각할 때는 랜드가 과묵해서가 아니라 이 이야기를 시각화시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랜드가 과묵하다고 하더라도 랜드의 심리상태는 소설에서(물론 시나리오는 읽어보지 않아서 모른다) 충실히 묘사된다. 예를 들어 랜드의 꿈이 소설 전반에 걸쳐 몇 번 묘사되는데 맨 처음 묘사되는 꿈인 챕터 10에서 정확하게 꿈을 충족하는 꿈이라는 문장을 사용한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이 묘사하는 꿈이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개념을 빌려왔다라는 것을 명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뒤에 나오는 꿈은 랜드의 소망이다. 지적해야 할 가장 중요한 꿈은 당연히도 챕터 20에서 나오는 캐벗이 죽는 꿈이다. 랜드는 캐벗의 죽음을 소망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챕터 18에서 캐벗의 등반에서 랜드는 제외됐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과묵한 주인공은 영화로 찍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묵한 인물을 찍은 영화감독들은 수도 없이 많다. 문득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이거 빙벽>이 떠오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1975년에 찍은 <아이거 빙벽>은 스위스 알프스를 등반하는 첩보 요원에 관한 이야기다. <고독한 얼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영화 역사상 등반 장면 중 가장 리얼하고 세심하게 찍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부분을 자신있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등반 장면을 찍다가 한 명의 스태프가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이 출간된 것이 1979년이니 제임스 설터가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시나리오를 건넨 건 197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이거 빙벽>은 단순 첩보 스릴러물이다. 하지만 <고독한 얼굴>은 등반 장면 자체가 삶의 투쟁처럼 보여야 한다.

 

「그곳에는 도시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돈과 소유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결코 거세될 수 없는 남성성이 있다. 이것을 위해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을 바친다. (p.174)」

 

랜드를 포함한 그들이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 것을 보고 오드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드리의 남편 브레이는 목숨을 잃고, 캐벗은 하반신을 잃는다. 하반신을 잃는다는 것과 남성성을 잃는다는 것의 동질감을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산의 의미는 더 다의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는 산에 대한 욕망에 가장 강렬한 애착(내가 생각했을 때는 집착이 아니다)을 보인 것은 당연코 랜드다.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른다고 하여 모두가 다 순수한 애착으로 인해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브레이의 친구 데니스 하트는 이탈리아인들을 구하러 갈 때 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건 정말 내려가고 싶다는 뜻이다. 하지만 랜드는 내려가지 않는다. 그리고 물론 데니스 하트도 같이 올라간다. 랜드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캐벗의 경우도 애착이라기 보다는 거기에는 랜드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이 묻어있다. 오로지 랜드만이 산 그 자체를 사랑해서 오른다. 우리는 산을 정복했을 때의 어떤 정복감, 승리감 혹은 도취 등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냥 감격스러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퉁친다. 보통의 이야기 꾼들은 이런 순간을 지나치지 못한다. 그 순간 독자들 혹은 관객들의 감정을 고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다가 멈췄다. 이렇게 퉁친다라는 것은 작가가 결코 산을 성공적으로 오르는 것에 인물의 욕망을 투사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이 순간까지 이야기를 잘못 따라왔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멈춘 다음 앞의 이야기들을 복기한 뒤 다시 읽었다.

 

랜드의 욕망은 무엇일까. 산에 오르는 것이었다면 산 정상에서 끝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는 산이 아니라 캐벗의 집이다. 그리고 랜드는 캐벗을 일으켜 세웠다. 작가는 이 순간 또한 퉁치고 넘어간다. 캐벗은 소파에 앉아있었고 휠체어는 비어있었다는 식으로. 랜드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순간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투쟁 자체가 중요한 인간이다. 문득 나따위를 랜드와 비교해본다. 나는 왜 영화를 찍고 싶어하는가라는 질문. 영화가 좋아서? 혹은 좋은 영화를 찍고 싶어서?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그 이유를 설명하는 순간 내가 영화를 찍어야 하는 이유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영화를 찍고 싶은 수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는 분명하게 인정투쟁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러나 그들은 랜드에 대해 얘기했다. 랜드가 항상 원해온 것이었다. 그의 업적을 능가하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비범한 인물은 계속 살아남는다. 이윽고 어느 때에 이르러 그들은 그의 소식을 제대로 알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랜드는 어떻게든 성공했다. 커다란 상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사라졌다. (p.272)」

 

그렇다고 랜드의 욕망을 인정투쟁에만 두는 것은 아니다. 랜드는 드뤼를 정복했고, 이탈리아 인들을 구조했으며, 캐벗을 일으켜세웠다. 그 순간들은 항상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랜드를 덮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랜드는 산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 속에 스며든 죽음 또한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짜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더 이상 산을 오르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풍기는 마지막 챕터에서 랜드는 더 이상 “랜드”가 아니라 “그”라고만 묘사된다. 새로운 여자를 만난 그. 그는 이번에는 가정을 꾸리거나 연인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제 2의 삶을 시작하는 그에게 새로운 이름이 부여되고, 새로운 욕망을 투쟁하기에 충분히 비범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생각하는 랜드라는 인물은 영화로 표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그 욕망이 얽히고섥혀 있다. 아마도 랜드라는 인물을 표현하려면 적어도 존 포드가 살아 돌아와야 할 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고독한 얼굴>을 훌륭한 영화로 찍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거인을 다루는 소설을 만났을 때 어떤 영화감독들은 거절하기도 한다. 나는 그 거절이 일종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로버트 레드포드의 훌륭한 영화로 만났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지금의 제임스 설터의 <고독한 얼굴>을 지지한다. 가끔은 영화 연출 지망생인 나같은 독자조차도 랜드의 얼굴을 배우의 얼굴로 그리고 싶지 않다. 나에게 랜드는 껍질같은 단단한 피부와 매섭지만 동시에 애정어린 눈빛, 얼굴을 다 뒤덮고 있을만한 수염, 두터운 입술과 제멋대로 생긴 뭉뚝한 코를 가지고 있는 오롯이 나만의 인물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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