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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나는 해부학 수업 - 머리털부터 발가락뼈까지 남김없이 정리하는 인체의 모든 것 드디어 시리즈 7
케빈 랭포드 지음, 안은미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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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이라고 하면 의대생들이 실습실에서 시체를 해부하거나 부검하는 장면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던 나는 해부학이라는 것에 흥미를 느꼈지만 해부학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다만, 평소 신체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어디가 아프고, 어디가 돌아가지 않고, 어디가 불편하다는 등. 그런 와중에 이 책을 접했다. 해부학이라고 하여서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지만, 그런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실용적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우리 몸에 뼈가 얼마나 있는지, 그 뼈들에 붙어 있는 근육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우리 눈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등등 말이다. 어떻게 보면 중고등학생 때 과학 시간에 배울 법한 내용들이었고, 또 다르게 보자면 이런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아주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나는 우리 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모르는데, 그 내용을 이야기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 몸은 70프로가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내용은 다 알지만, 우리 몸 안에 탄소가 있고 미네랄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다. 새삼스럽게 신기한 내용들이었다. 알았지만 몰랐던 내용이었고, 쉽지만 동시에 어려운 내용이었다. 


물론 뒤로 갈수록 전문적인 내용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이런 서적을 접할 때면 항상 처음 마주하곤 하는 명사들에 골치가 아프기 마련이다. 이 책도 비슷했는데, 그 명사들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맥락으로만 이해하고 넘어가더라도 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한 두번 반복해서 읽고 다른 서적에서 이런 단어를 마주할 때 다시 이 책을 펴보면 이해하기 쉬울 법하다. 


이 책은 하나하나 주의깊게 읽는 것보다는 쭉 읽어나가면서 내가 관심있는 부분에서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느꼈다. 화학이나 생리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같은 사람은 내가 관심있는 부분에 눈이 더 가기 마련이고, 그러면 굳이 이해가 안 가는 부분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주 단순한 내용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이런 것도 모르면 안 되겠다는 심보로 검색하며 읽기는 했다. (흠..) 중요한 건 내가 갖고 있었던 의문점들에 다가가는 입구가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소화가 잘 안 되는 체질이고, 특정 운동을 할 때 발에 쥐가 자주 난다. 손목은 가끔가다가 통증을 느낀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병원을 가면 특이한 부분은 없다는 진단만 내려진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좀 더 내 증상에 가까워질 수 있는 입구에 데려다 준 느낌이다. 예를 들어,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노뼈와 자뼈 바로 아래에 있는 불규칙한 모양의 작은 뼈 8개를 모두 손목뼈라고 부르며, 이 뼈들은 손바닥과 손가락에 있는 뼈들을 아래팔에 연결해줍니다."


언젠가 병원에서 특이한 부분은 없지만 손목에 미세한 골절이 있었을 수 있고, 그로 인해서 손목을 많이 사용하게 되면 통증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냥 그려러니 했는데, 아래팔과 손바닥을 연결해주는 8개의 뼈들 중 하나에 미세 골절이 있었던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책을 읽어나가며 내 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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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소포스의 책 읽기 - 철학의 숲에서 만난 사유들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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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약간의 강박이 있다.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볼 때 그 작가의 작품을 출시된 순으로 따라가고 싶다는 강박.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특히 지금처럼 먹고 살기 힘든, 바쁘디 바쁜 세상 속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나 소설은 그나마 따라갈 수 있지만 철학으로 넘어오면 엄두가 나질 않는다. 철학서는 소설에 비해 읽는 속도가 느리고, 또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게다가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내용 또한 많다보니 2차 저서를 이용하거나 강의를 들어야 할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고 싶은 철학자의 글들은 너무 많다. 칸트, 헤겔, 레비나스, 데리다, 랑시에르 등등.. 


그래서 철학은 더더욱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소피의 세계>를 한 번 읽고 한 명의 철학자를 고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피의 세계>를 읽자마자 나에게 <필로소포스의 책읽기>가 도착했다. 몇 장 읽지 않았는데 들뜬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소피의 세계>는 철학사를 관통하는 느낌이라면, <필로소포스의 책읽기>는 나에게 철학자들을 제안해주는 느낌이었다. 철학자들의 철학 핵심을 저자의 의견을 붙여서 해석해주는 몇 페이지의 짧은 내용들이 이어졌다. 예를 들어 내가 관심있는 프로이트라고 한다면, 프로이트의 이론을 짤막하게 소개하고 그 후로 당대의 비판들을 수렴하여 저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설명한다. 


이건 아주 오래 전 비디오 가게에서 어떤 영화를 볼 지 고르던 매월 책자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책자는 객관적 스토리만 나열되어 있다면, 이 책에서는 저자가 생각하는 철학자의 쟁점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저자의 주장을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는데까지 간다. 그러므로 이 책은 철학으로 진입하려는 이들의 첫 번째 책이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정말 좋은 경험을 했다. 문제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한 철학자들의 리스트가 많아졌다는 것 뿐이다.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고, 앞으로의 시간들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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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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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외근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대표가 나에게 물었다. 당황스러우면서 불안했지만, 조심스럽게 탄핵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사실 속마음은 탄핵에 반대하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서부지법 폭동 사태가 일어나기 전이었다. 대표는 이어 자신은 탄핵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 몇 가지를 제시했는데, 대부분이 극우 유튜버들이 하는 주장과 일맥상통했다. 나의 업무는 회사 유튜브 관리를 하는 일이고, 회사 유튜브 아이디는 대표가 개인으로 운영하던 채널이어서 대표의 아이디로 로그인이 되어있다. 그의 알고리즘에 뜨는 영상들 중 정치적인 영상은 80프로 정도가 보수 쪽 유튜브였다. 참고로 우리는 서로의 의견을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그 대화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극우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았다.


1.유튜브를 통해 부정선거를 의심.

2.사법 리스크의 이재명.

3.검찰총장 출신의 대통령이 된 사람이기에 계엄의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쓴 저자들은 민주주의에 관해 몇 가지 관점을 제시하는데, 그러한 관점과 대표의 주장을 연결시켜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 번째 주장인 부정선거의 경우 수없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이미 150번이 넘는 선관위 압수수색이 이루어졌고, 대부분이 윤석열 정권에서 진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은 계속해서 부정선거를 거론했고, 그의 지지자들은 그에 대한 말도 안 되는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패배를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게임의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돌이켜봐도 어렵다. 지난 대선 때, 어떻게 대통령으로 저런 사람을 뽑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표의 두 번째 주장은 전적으로 자신의 적을 제거하려는 반민주 세력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민주주의자인 척하는 사람들이 법치주의를 이용한다고 말한다. 법의 허점을 이용하고, 법을 선택적으로 집행한다고 주장한다. 4년 남짓한 기간 동안 조국혁신당 전 대표 조국과 현 이재명 후보에 관한 일 아니던가. 검찰은 막강한 기소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선택적 기소뿐만 아니라 막무가내 기소로 정치인에게 범죄자 이미지를 부여하는 일을 서슴없이 벌이고 있다. 본인은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혀 아닌 우리 대표는 언론이 받아 적고 있는 이재명에 관한 이야기들을 사실이라고 보는 듯하다.


세 번째 대표의 주장은 개인적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다. 책의 말미에 헌법이 기계처럼 작동할 거라는 환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사회의 능력주의 사고방식에 대한 문제다. 아직까지도 대통령, 판사, 검사, 변호사 등 고위공직자 및 우리가 유능하다고 믿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지혜롭다고 보는 편견이 있다. 그들이 알아서 잘 할 거라는 믿음이 도사린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저자들이 미국 사회의 가장 큰 병폐로 지적하는 것도 다수결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 아니던가.


저자는 미국 사회를 걱정하며 몇 가지 개혁안들과 방안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난 저자들의 방안보다는 저자들이 인용한 로웰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헌법이 공정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저절로 돌아가는 기계를 개발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략) 우리는 정치적 의무를 소홀히 여기게 되었다.


우리는 다수의 지성으로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걸 목격했다. 헌법을 수호할 대통령을 뽑자는 이야기로는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건 싸우는 일뿐이다. 독일처럼 전투적 민주주의를 확산하고, 필요에 따라 권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수밖엔 없다. 지금의 시간이 지나가면 결선투표제 등의 개헌까지 논의해야 한다. 관용의 민주주의는 끝났다. 다시 쿠데타의 시대가 도래했고, 나라를 망가뜨린 세력들은 처벌 받아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절대 원칙에 도전하면 남은 삶 자체를 잃을 수도 있다는 강력한 처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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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의 숨은 상처
리차드 세넷.조너선 코브 지음, 김병순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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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여든 살, 계급 전사로서 나의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앞으로도 노동 계급의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인식하는 계급 의식이 더욱 투철한 사회가 도래하기를, 나는 희망한다. (p.15)

 

이 말은 마지막 부분인 나는 희망한다때문에 자크 데리다가 이야기 한 나는 해방이라는 위대한 고전적 담론을 버리는 것을 거부한다가 떠오른다. 같은 이야기지만 리처드 세넷은 좀 더 희망적이고, 자크 데리다는 좀 더 절망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리처드 세넷의 말은 지금의 시점에선 절망적이고, 자크 데리다의 말은 희망적이다.

 

이 책의 홍보 카드 뉴스를 보았을 때, 피가 끓었다. 계급의 숨은 상처라니, 노동자에 관한 이야기라니, 사회의 계급 구조라니, 그런 주제들은 언제나 흥분하게 만든다. 그래서 다른 책들보다 훨씬 전투적으로 읽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줄 알았지만 그보다는 굉장히 씁쓸하고 절망적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나의 상황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었고, 둘째는 50년 전에 쓰인 이 책이 주장하는 사회 문제는 지금은 문제가 아니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정당성 개념은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오늘날 훨씬 더 복잡해졌다. 어떤 사람이 복종해야 하는 누군가에게 스스로 순종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 자신의 자아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불황의 시기, 감독관은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시간 외 노동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 쉽다. 그러면 노동자의 자유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일 노동자가 자신의 자유를 앗아갈 권리가 감독관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그가 어떻게 자신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까? 잠정적으로나마 권력이 정당화되면, 사람들이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에게 어떤 존엄성을 부여하든 간에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규칙이 뒤따를 수 있다. (p.111)

 

이 위 문단이 SNS에 올라가면 무슨 댓글이 달릴까? 혹은 우연찮게 나와 생각이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무슨 말을 듣게 될까? 임금을 받은 노동자는 당연히 자유를 박탈당한 채로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 되돌아오지 않을까? 이런 말에 누군가는 좀 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노동환경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에 대한 반박으로 또 누군가는 능력의 차이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자본주의 논리는 50년 전보다 지금 훨씬 더 뿌리 깊게 박혀서 싱싱한 열매를 맺고 있다.

 

직상 상사들은 부하 직원들을 강압으로 밀어붙인다(그들에게 조지 코로나는 자신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검사다). 그러나 부하 직원들은 상사의 지배 아래서 보낸 시간의 의미를 생각할 때, 직장에서 자신이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자신에게 둔다. 그들은 자신이 더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업무에 전념한다면 그렇게까지 직장에서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고 뭔가 중요한 성과를 낼 테지만,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사람은 바로 코로나다. (p.132)

 

계급의 실질적인 충격은 한 인간이 인생에서 권력 관계의 양쪽에 다 있을 수 있어서, 그가 심판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개인이 되었다가 일반 대중 집단의 구성원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계급 갈등의 내면화를 의미하는데, 인간 사이의 투쟁이 각 개인 내면의 투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나타낸다. (p.138)

 

연봉협상을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회사가 어려워서 전체 연봉이 동결되어도 직원들은 자신을 탓한다. 자신이 성과를 내지 못해 회사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이 업종 혹은 회사에 들어온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 어떤 업황이 좋지 않거나 회사의 경영 상태가 좋지 않더라도 노동자들은 자신에게서 그 문제를 찾아 채찍질하는 성향이 있는 것이다. 과거와는 다르게 현대의 자본주의는 자유를 적극 활용한다. 억압의 시대에서 벗어난 지금은 모든 선택을 개인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철학자 한병철이 지적했듯, 자유는 더 큰 억압으로 되돌아와서 존엄을 더 짓밟아버린다.

 

내가 꿈꿔왔던 일, 그리고 했었던 일은 영화였다. 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하지만 여러 요인들과 산업 자체의 어려움으로 지금은 다른 업종의 회사를 다니고 있다. 이 회사는 급여가 적은 대신 나에겐 거의 모든 것이 완벽하다. 누군가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회사를 다니는 게 힘들다. 무언가가 나를 갉아먹는 느낌이 든다. 그 무언가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닌 직종이라는 것이 가장 크고, 또 하나는 나와 맞지 않는 계급의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다. 영화를 하면서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보았다. 삶이 어려운 사람을 보았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썩어빠진 사회에 분노하기도 했고, 광장에 나가 시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수십 억대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다. 수억 대의 인테리어를 하고, 고급 외제차를 모는 사람들을 상대한다. 물론 내가 직접 상대하는 건 아니지만.. 여하간 그런 일을 하는 회사에 있다 보니 이런 느낌이 든다. 내가 놀던 물보다 훨씬 급수가 높은 물인데, 숨쉬기가 힘들다.

 

일부 인류학자들은 특정 부족들에게서 일어나는 유사 종 분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정 부족의 내적 결속과 응집력이 너무 강한 나머지, 부족민들은 그들의 고유한 관습이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기준이 될 거라고 믿는다. 그 부족은 자신들과 다른 관습을 가진 다른 집단들과 우연히 마주칠 때 왜 그들을 관대하게 용인해야 하는지, 심지어 같은 부족민들끼리는 결코 행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잔혹함으로 그 이방인들을 대하더라도 왜 자기들이 이를 신경 써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특정 사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정의하는 극단적 조건이 될 때,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경멸과 적개심은 거꾸로 인간 존엄성을 찬양하는 것이 된다. (p.82)

 

그는 인생을 살면서 타인의 존중을 받기 위해 그들 수준으로 자신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은 그가 그냥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자기보다 더 높은 계급 사람들의 이미지와 자신의 이미지를 비교하지 않을 때 은행에서 함께 일하는 고학력 동료 직원들이 일하는 데 느끼는 혐오감, 그리고 육체노동이 더 존엄하다고 느끼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p.46)

 

외형상 성공한 지위에 오른 상황에서도 스스로 부족하고 무기력하다고 느끼는 리사로 같은 부모의 자식들은 정규 교육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느낀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p.47)

 

이와 관련해서, 육체노동자 가정의 자녀들이 들어갈 수 있는 한 지방 대학의 3학년생 청년 제임스의 예를 들어보자. 제임스의 아버지는 낮에는 시청 서기로 일하고, 밤과 주말에는 바닥에 까는 깔개를 수선하는 일을 한다. 제임스는 대학에서 어떻게 해야 성공하는지 알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받아 1학년에서 제적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제임스는 프랭크가 은행에서 하는 사무직 업무를 멸시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학교를 경멸한다. ‘고학력자는 기능공보다 지위가 높지만 그들이 하는 일에 내재된 만족은 낮아 보인다. 그러나 제임스는 무엇보다 아버지를 위해 대학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48)

 

위 상황이 공감되는 것은 내가 영화 스탭으로 일을 할 때는 현장에서 일을 했었다는 것이다. 이후 영화사에서 글을 썼기 때문에 위 문단의 상황들이 더 와닿았다. 육체노동에서 사무직 노동으로 전환되었을 때와 내가 원하는 일을 하다가 원치 않은 일을 할 때 모두를 경험한 나로서는 위 문단들을 읽으며 목이 메었다. 먼저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50년 전 미국의 상황을 알지는 못하지만 비슷할 거라고 추측한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무직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교육 수준이 자신보다 월등히 높고,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양가감정을 갖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다만,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탁상행정처럼 육체노동자들은 사무직 노동자를 아무것도 모르는 고상한 인간들이라는 시선이 명백히 존재한다. 그것이 어떤 호르몬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실제로 여러 육체노동을 해본 내가 솔직하게 그때의 심정을 돌이켜보면, 힘들게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는 분노와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저 사람이 할 수 없을 거라는 과시로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할수록 그러하다. 힘을 쓴다는 것, 공구를 다룬다는 것, 그 일들의 뿌듯함과 과시적인 측면은 나를 부리는 사람들에게 내가 쓸모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면서 내 자아를 방어하려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우리가 취하는 자세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배관공이든 대학교수든, 이 사회의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고 스스로 자존감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아를 입증해야 한다고 말하는 가치 체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관공이 그렇게 하려고 할 때 느끼는 감정은 대학교수가 그렇게 하려고 할 때 느끼는 감정과는 매우 다르다. 지금까지 우리가 가족 내에서 개인의 능력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제시한 예들은 그런 주장이 일반적으로 세 가지 결론을 보여준다는 것을 암시한다. 첫째, 존중을 추구하는 시도는 좌절된다. 둘째, 개인의 실패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셋째, 그러한 시도는 전체적으로 개인이 존중받으려면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p.109)

 

그렇기 때문에 육체노동자는 자아를 은폐하거나 혹은 버린다. 그 방식이야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우선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학교의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보통의학생들은 수업 시간이 마치 감옥살이인 것처럼, 학업과 수업이 빨리 끝나면 좋을 무언가인 것처럼, 즉 어ᄄᅠᇂ게든 살아남아서 떠날 날을 고대하는 그들 삶의 빈 공간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찾고 돈을 벌면, 그때 비로소 자기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학교생활을 그렇게 많이 지루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왓슨 학교의 많은 학생은 그들의 학급을 좋아하지만, 학교가 자신들을 도울 것이고 학교에서의 경험이 자신들을 변화시키거나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할 거라는 기대를 접었을 뿐이다. (p.117)

 

왓슨 학교의 대다수 아이들이 자기 능력을 발휘할 의무가 있는 학창 시절은 그들 삶에서 진짜 시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학교라는 기관을 떠나서 스스로 밖으로 나가 일할 때 비로소 활기찬 삶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성인이 되어 직장이라는 새로운 기관으로 옮겨 간 뒤에도 어릴 적 학교의 요구에 반응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직장의 능력 발휘 요구에 반응한다. 그들은 기관 밖에서 보낸 시간을 자기 삶에서 의미 있는 시간으로 생각한다. 예컨대, 코로나는 직장은 생활하기 위해 돈을 버는 곳일 뿐이에요. 하루하루 내게 중요한 것들은 가정에 있죠. (...) 가족과 이웃들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화가 나 있는 젊은 전기 기사 칼 도리언 또한 직장에서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학교에 다닐 때 일을 하면 딴생각을 멈출수 있을 거라고 늘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성인이 된 그는 직장에서도 딴생각을 한다. 직장 생활 외에 자신에게 진짜 시간이 무엇인지 그는 상상도 잘 안 된다. (p.130)

 

자아의 은폐는 일생 동안 일어난다. 자본주의의 톱니바퀴가 일초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것처럼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자는 지속적으로 자아를 은폐할 수밖에 없다. 내가 스무 살 때 했던 생각은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을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쏟아붓는 것은 인생의 3분의 1을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역설적으로 살기 위해서 행하는 일들이 아닌가. 물론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이 책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아가 제 모습을 드러내어 그 욕망에 솔직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다. 욕망의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정신분석으로 점핑해야 한다. 거기까지 가지 않고 소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초점을 맞추더라도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한다는 건 소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 소외를 어떻게 견디는 걸까? 저자의 논점은 미국으로 이주해 온 이방인들이 가진 소외감은 능력에 맞췄다는 걸 언급해야겠다. 여하간 저자가 이 글을 쓸 때의 노동자들은 자식에게 초점을 맞췄다.

 

따라서 여기서 그의 가족이 남편과 아버지에게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상호 호혜적 계약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단지 허위의 상호 관계에 불과하다. 가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사람이 가족에게 자신이 그들을 위해 희생하기를 원하는지 묻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일방적인계약의 위력은 바로 한 개인이 전적으로 남들에게 뭔가 주는 행위를 강탈해서 그들이 대항할 수 있는 권리 주장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에 있다. 강탈자를 비난하는 모든 행위는 그가 그들을 위해 자기 욕망을 억제한다는 사실 앞에서 우선권이 뒤로 밀린다. (p.173)

 

어디서 본 광경이지 않은가? 당시 미국과 한국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6.25 직후 오로지 자식 교육에만 힘쓰는 일들이 벌어졌다. 저자의 말처럼 그들이 자식 교육에 성공하건 성공하지 못했건 결국 배반당한다는 것이 분명하더라도 여하간 당시 노동자들은 자식들을 보며 버텼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 버티고 있는가? 여전히 가족에게 희망을 걸고 버티는 사람이 있지만 출산율은 떨어지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지금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보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정신 분석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기대가 배신당하더라도 그 기대는 인간의 삶을 버티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뿌리다. 그 뿌리가 허황된 것일지라도 분명하게 존재해야 한다. 다만, 그 뿌리가 좀 더 믿음직스러우면 좋은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지금 우리는 무엇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지금은 세상이 너무 복잡해져서 뿌리조차 분열되고 있지만 우리는 불로소득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열심히 벌어서 자식 교육시키는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는 열심히 벌어서 재테크를 한다. 그건 훨씬 더 큰 배신을 불러올 것이다. 이 세계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건 언제나 자본이기 때문에.

 

많은 노동자가 학생들에게 느끼는 분노는 부분적이나마 그와 같은 뿌리에서 분출된다. 능력과 특권의 왕좌에 앉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런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거부당한 사람들에게는 개인적 모독이다. 특권을 부여받은 아이가 존경받을 수 있는 자리에 앉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내게 현재의 결핍 상황을 탈출할 기회가 올 거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들은 미래를 상징하는데, 그 미래가 나를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p.188)

 

자본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은 인간을 잠식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것인데, 누군가 재테크를 하지 않으면 바보 같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예적금을 하는 사람도 바보 취급을 한다. 과거에는 능력과 특권의 자리에 앉는 걸 거부하는 사람을 그렇게 취급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또한 자아의 방어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 격언은 격언일 뿐, 이 상황에 적용하면 참으로 하찮은 인간이 될 뿐이다. 하지만 그 하찮은 인간은 불쌍한 인간이다. 자식들이 성공하길 바랐던 부모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난 그들의 희생이 숭고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았다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라는 점도 동시에 생각한다.

 

그 결과, 우리는 계급 사회 안에서 사람들을 계속해서 이동하게 하는, 즉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소유, 더 높은 신분을 찾아 움직이게 만드는 활동들이 물질적 욕망 또는 심지어 감각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계급 구조가 그들의 삶에 초래한 심리적 박탈감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계급 사회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신분 상승을 추구하게 만드는 심리적 동기는 외부 세계의 사물과 사람을 지배하는 더 큰 권력을 갖겠다는 데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의심을 치유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 (p.227)

 

한 가지를 더 첨언하자면, 욕망은 휴식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욕망이 계급과 만나는 순간, 진짜 욕망은 사라지고 가짜 욕망만이 떠다니게 된다. 저자의 말대로 그 욕망이 자신을 치유하고자 함이라면 욕망이 끊임없이 활동할 수 있게 우리는 우리를 끊임없이 상처 내야 한다. 상처를 낼 흉기를 계급사회가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보았을 때 사회는 점점 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흉기를 전달할 것이고, 인간은 점점 더 그 흉기가 자신의 손에 원래부터 들려있던 것처럼 착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한 상황은 그와 달리 신발 판매원이나 사무직 노동자가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그들의 머리와 지적 수준을 인증하는 자격증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2년 동안의 문과교육 과정은 아마도 청년들이 그것 없이는 취직하기 힘들다는 사실 빼고는, 근본적으로 생산 기능이 없는 일종의 통과 의례다. 우리가 아는 천박한 공리주의의 측면에서, 이러한 장벽의 용도는 기대와 현실이 서로 충돌하게 만들어 결국 신발 판매원이나 사무직 노동자가 자신의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자책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러한 충돌은 노동자들을 착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훈육하기 위해서 쓰인다. (p.242)

 

자아를 분열시키는 행위는 끔찍한 고통과 괴로움을 낳는데, 그것을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면에, 마치 노동 상황이나 상사의 인정이 자신의 진짜 자아와 전혀 무관한 것처럼 행동하는 육체노동자의 삶에서는 그런 내면의 분열이 수그러진다. 자기 능력을 의식적으로 외부로분리하는 태도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책임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한계선을 제공한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취약하고 불안으로 가득하게 만드는 사회에 아무 저항없이 복종해야 하는 경우, 자아를 분열시키는 것은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느껴야 할 고통을 막아낸다. 이런 의미에서, 진짜 자아와 조직을 위해 업무 수행을 하는 자아의 분리는 정신 분열을 겪을 때 수반되는 고통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p.272)

 

저자는 마지막으로 몇 가지를 더 지적한다. 자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노동자는 소외를 덜 느끼고, 작업 지시를 받지 않고 혼자 일하는 노동자들은 위의 노동자들과는 다르게 자아를 은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덧붙여서 존엄의 이미지가 오히려 인간의 계급을 나누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50년 전, 이런 문제들은 이제 달라진 형상을 보인다. 자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노동자는 스스로를 억압하고, 혼자 일하는 노동자들은 자아를 드러낼 수 있을지언정 자아가 부서지고 있다(현재 자영업자들과 전문직 기술자들을 보라). 계급은 존엄을 여전히 품고 있는 걸까? 저자가 이 책을 쓸 당시 그들이 보았던 상층 계급들의 존엄은 어떤 이미지였을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상층 계급들에게는 존엄이라는 것은 없고 자본에 먹힌 이미지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다시 한번, 데리다의 말로 마무리를 해야겠다. ‘나는 해방이라는 위대한 고전적 담론을 버리는 것을 거부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자주 듣는 말이 있다. ‘그건 너무 이상적이잖아.’ 난 그 순간 내 말이 옳다는 걸 느낀다. 이상적이어서 할 수 없다는 건 실패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방이라는 이상에 닿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아니다. 이상은 언제나 저 너머에 존재하고, 우리는 저 너머에 있는 존재를 향해 달려간다. 그 존재는 신기루일 수도 있고, 우리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이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이상으로 향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저자는 50년 전에 능력주의의 문제를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나는 그 문제가 현재 자본으로 변형되었다고 본다. 지금의 시대는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없는 것이 문제다. 이제는 아무리 스펙이 좋아도 돈을 더 잘 버는 사람이 장땡인 사회가 도래했다. 심지어 역겨운 유튜브 광고 멘트까지 등장한다. 지금 가난한 것은 죄가 맞다는 그런 멘트들. <생활의 발견>에서의 대사가 떠오른다.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얼마 전 문형배 헌법재판관의 청문회가 회자되었다. 그는 말했다. 보통 사람의 재산 수준이 3억 원 정도여서 그 정도를 넘지 않으려 했다고. 4억이 좀 넘은 재산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요즘은 문형배 헌법재판관의 그 말이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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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클 - 제18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34
최현진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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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모르게 투박한 문장들은 어색함을 불러오지만, 동시에 꾹꾹 눌러쓴 작가의 고민이 느껴진다. 유려하진 않지만 인물들의 마음에 가닿으려는 흔적들이 보이고, 몇몇 설정들은 부유하면서도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단연코 그 '부유하는 감각'이다. 어딘가로 떠밀려가는 듯한 10대 시절의 그 아득한 감각은 유리의 눈에 맺힌 눈송이, 겹겹이 쌓인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 꿈속의 설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를 그 부유감은 죄책감과 채무감을 지나,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한 소녀의 여정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15년 뒤를 상상하는 유리의 소설은 결국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단언컨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일은 돌고 돌아 결국 일어날 것이라고도 말할 것이다. 우리가 지켜본 유리의 여정처럼, 앞으로의 유리 역시 정해진 길로만 달려나갈 순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응원할 것이다. 아니, 응원해야 마땅하다. 언젠가 이영준이 썼을지도 모를 숟가락으로 밥을 퍼먹는 유리처럼, 언젠가 내가 겪었던 그 나날들을 유리가 겪을 테니까. 힘내라. 세상이 녹록지 않아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결국 카트만두에 도착할 것이다.

 

같은 반 아이에게 고백을 받았는데

내 갈색 머리가 좋대

내가 입는 옷들이 자기 취향이래

눈을 마주치지 않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늘 궁금하대

얘기를 듣고 나는 놀랐어

다른 사람의 눈으로 나를 본다는 건 꽤 낯선 일이야

나는 사진도 잘 찍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동안 내가 어떤지 잘 모르고 지낸 거 같아

어쩌면 그만큼 스스로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거겠지

거울을 들여다봤어

분명 나인데도 눈을 맞추기가 힘들어

(p.31)

 

시온이 자기가 밥을 사겠다고 했다. 눈송이처럼 하얀 고슬밥이 나오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영준도 친구와 와서 밥을 먹었을까. 나는 언젠가 이영준이 썼을지도 모르는 숟가락으로 밥을 펐다. (p124)

 

빛은 0.5 밀리미터밖에 되지 않는 얇은 막을 통해 들어온다. 각막은 눈의 창문이다. x의 창은 금이 가거나 깨어진 적 없었다. 창은 나의 일부가 됐다. (p.189)


*출판사에서 가제본을 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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