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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턴의 그리스로마신화 ㅣ 현대지성 클래식 13
이디스 해밀턴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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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다시 관심이 생겼다. 정확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 때문이었다. 영화가 개봉하고 나니 오래전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가 다시 궁금해졌고, 자연스럽게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도 다시 찾아 읽게 됐다.


그런데 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곤혹스러워졌다. 기억나는 것이 생각보다 너무 없었다.


예전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는 일은 꽤나 고역이었다. 사람 이름 하나를 겨우 기억할 만하면 새로운 이름이 등장했고, 인간의 이름을 쫓다 보면 이번에는 신의 이름이 나타났다. 그 신이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연인이며 누구와 원수였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처음 읽었던 인물이 누구였는지조차 희미해지곤 했다. 당시에는 나름 열심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니 그 기억들이 엉켜 있었다.


그래서 <해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며 정리해보고 싶었다. 누가 누구인지, 어떤 신이 어떤 관계로 얽혀 있는지,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각각의 사건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다시 한번 천천히 따라가보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신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고 덮는 이야기책이라기보다, 잊을 때마다 다시 펼쳐보는 일종의 지도에 가까워 보였다. 책의 뒤에는 그리스와 로마에서 서로 다르게 불린 신들의 이름을 대조해놓은 표와 주요 가문의 계보가 정리되어 있다. 무엇보다 해밀턴은 하나의 신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새롭게 각색하기보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에우리피데스, 오비디우스와 베르길리우스 등 여러 고대 작가가 남긴 이야기를 비교하고 그 안에서 신화의 얼개를 다시 세운다.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이야기 하나를 완벽하게 기억하는 것보다, 그 조각들이 어디쯤 놓여 있는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반가웠다.


그런데 다시 읽어봐도 신화 그 자체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수천 년 동안 살아남은 이야기이니 재미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적어도 내가 익숙한 현대의 소설을 읽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그렇다. 사건은 너무 빠르게 일어나고, 그 사건의 크기는 또 지나치게 크다. 누군가 사랑에 빠지고, 배신하고, 저주하고, 죽이고, 복수한다. 한 인간의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놓을 만한 일이 몇 페이지 사이에서 연달아 일어난다.


아마 내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며 종종 딱딱하다고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내가 익숙한 소설에서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사건이 인물에게 어떤 감정을 남기는지를 꽤 오랫동안 따라간다. 사건이 발생하고, 인물의 감정이 움직이고, 그 감정이 다시 행동을 만들고, 그 행동이 다음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인물을 이해한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생략된다.


사건이 일어나고 곧바로 행동이 이어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타난다. 인물이 왜 그렇게까지 분노했는지, 사랑이 어떻게 집착으로 변했는지, 두려움이 어떤 과정을 거쳐 복수가 되었는지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애초에 그런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신화를 읽는 재미는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 이 신은 이 인간을 도왔을까. 왜 누군가는 이토록 가혹한 선택을 했을까. 사건과 행동 사이에서 어떤 감정이 있었을까. 행동과 결과 사이에서 인물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본문에 적혀 있지 않은 것들을 상상하며 읽기 시작하면 신화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찾아보고, 한 이야기의 뒤에 붙어 있는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보고, 서로 다른 신화 속에서 같은 인물이 어떻게 다시 등장하는지를 쫓아가는 일이 오히려 더 재미있어진다.


현대지성판에 실린 많은 그림도 그런 독서와 잘 어울린다. 글에서는 한두 문장 사이에 지나가버린 사건이 그림에서는 하나의 순간으로 멈춰 있다. 글로는 빠르게 지나갔던 인물의 표정이나 몸짓, 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 같은 것을 그림 앞에서는 잠시 더 바라보게 된다. 그림이 신화에 적혀 있지 않은 감정을 대신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글이 비워둔 자리를 눈앞에 한 번 펼쳐놓음으로써 그 안에 무엇이 있었을지를 다시 상상하게 만든다. 긴 신화를 계속 읽는 동안 잠깐씩 속도를 늦추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좋았다.


이번에는 오디오북 서평단으로 참여했지만 뜻밖에도 종이책도 함께 받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오디오북보다 책을 더 많이 읽었다. 신들의 이름과 인물 관계를 계속 따라가야 하는 책이다 보니 오디오로만 듣고 있으면 생각보다 쉽게 지쳤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한 명을 놓치게 되고, 그 한 명을 놓치면 이후 관계까지 함께 놓치는 경우가 있었다. 다시 앞으로 돌려 듣는 것도 종이책에서 몇 줄을 되짚어 읽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디오북이 이 책과 맞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두 방식의 역할이 조금 달랐다. 복잡한 관계를 확인하고 앞뒤 이야기를 되짚을 때는 종이책이 편했고, 이미 읽었던 이야기나 큰 흐름을 계속 이어갈 때는 오디오북이 좋았다. 특히 출퇴근 시간이나 이동 중처럼 책 한 권을 꺼내 들고 보기에는 애매한 시간에도 신화 속 이야기를 계속 따라갈 수 있었다. 잠깐씩 끊기는 자투리 시간이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는 시간으로 바뀐다는 것은 분명 오디오북이 가진 장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야기를 기억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어떤 신이 누구의 편이었는지, 어떤 영웅이 어떤 모험을 했는지를 기억하는 것이 신화를 읽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꼭 그럴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또 잊어버릴 것이다. 수많은 이름도, 복잡한 족보도 다시 뒤섞일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잊어버리더라도 다시 찾아볼 곳이 생겼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과만 기억하기보다 그 사이에 비어 있는 부분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


어쩌면 내가 지금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시 읽는 이유는 신화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그 빈칸들을 다시 읽어보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2026년 10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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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잠에서 깨다 -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이 새긴 기억의 공공인류학
정병호 지음 / 푸른숲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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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군대에 입대하였을 때 이상한 임무를 받았다. 부대 전원이 지방으로 이동하여 산을 파야 한다는 임무. 알고 보니 유해발굴이었다. 군대에서 그런 일을 하는 줄 처음 알았다. 시키니까 했고, 지켜보지 않을 땐 쉬었다. 땡볕에서 뭐 하는 일인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해발굴단은 우리에게 이미 이 산에서 유해발굴을 실시했지만, 건진 건 없다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 2인 1조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팀들 중 오로지 우리 팀만이 유해를 발굴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처음은 부분 유해로 정강이뼈와 허벅지 쪽 뼈만 나왔다. 그 사실 자체도 신기했지만, 그때는 포상휴가를 받을 생각에 신이 났었다. 다음 날 우리 팀은 두 번째 유해를 발굴했다. 두개골부터 시작하여 발끝까지 뼈의 대부분이 맞춰졌고, 당시 사용하던 총과 탄피, 만년필과 수첩까지 나왔다. 현장에서 유해발굴 감식단은 뼈들을 사람의 몸으로 맞추고 고인에 대한 예를 표했다. 첫 번째 유해를 발굴했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내가 밟고 있는 땅에서 동포들끼리 죽고 죽였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수십 년 전에 벌어진.. 어쩌면 나와 같이 군에 끌려온 청년들의 기구한 삶이었다. 잔혹한 시대에 태어나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그 상황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안쓰러웠고, 그들의 희생으로 인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며칠 뒤 정식적인 영결식이 진행됐고, 유가족들이 영결식에 참여했다. 한 사람을 온전하게 떠나보내는 그 일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이 책을 펼쳤을 때는 유해발굴이 갖는 의의가 애도뿐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배웠다. 특히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일본 홋카이도에 매장된 유해다. 즉,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다 사망하신 분들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6.25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한 뒤 그분들의 모습이나 상황 등을 유추하는 것보다는 강제징용 당한 분들을 찾아내고, 그분들을 다시 한국으로 귀향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놀라운 것은 그 과정을 정부 당국이 한 것이 아니라 민간이 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의로운 일의 시작은 정부 당국보다는 사람이 먼저였기 때문에 놀랍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90년대를 아는 사람이라면, 책에도 잠시 소개되었지만, 당시 도쿄도 아닌 홋카이도에 가서 유해를 발굴한다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놀라운 것은 이 과정을 한국의 학생들과 일본의 학생들, 그리고 재일교포들과 함께 했다는 사실이다. 피해자의 후손들과 가해자의 후손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의 후손들.

 

인간이 언제 어떻게 해서 감정을 느끼고, 생각을 하고, 행동으로 이어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은 때로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내 조상의 일은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우리는 일본에 대해 가끔 분노한다. 또, 동시에 베트남에 가서 무슨 짓을 했던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더라도 우리는 가끔 죄책감을 느낀다. 그 모든 것이 나와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자주 어떤 감정을 느낀다. 아니,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통해 무언가를 느낀다.

 

2024년 12월 3일 이후 우리에게 각인된 한강 작가의 말.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 말은 이 책을 읽은 뒤에도 맴돈다. 과거에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현재는 지금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에 비극은 발생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과거에 얽매인다. 얽매인 과거를 풀기 위해선 올바른 매장을 해야 한다. 만약 박근혜 정부에서 70년 만에 귀향한 희생자들과 희생자들의 유가족분들에게 사과를 했다면 어떠했을까.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고. 국가가 챙기지 못해 죄송하다고. 그리고 일본 정부에게 전쟁 범죄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으면 어떠했을까. 그들이 사과를 했으면 어떠했을까. 하지만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가 되었다. 얽힌 매듭은 풀리다가 다시 꼬여버렸고, 우리의 현재가 되었다. 이제 박근혜 정부도 윤석열 정부도 과거가 되었다. 현재가 미래를 도울 수 있을까? 2016년부터 일본은 자위대의 무력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안보 법안을 시행했다. 공격 전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소환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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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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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또한 영화 같은 면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보면 그냥 저절로 영화를 보게 된다. 물론 어떤 감독은 아주 철저하게 능동적인 관람을 관객에게 요구한다. 요즘 나오는 소설들은 대부분 영화와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술술 읽힌다. 그것 또한 글발이라고 하고, 공모전에서 수상이라도 하려면 그런 글을 써야 한다. 하지만 클레어 키건의 글을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어나가기 시작하면, 멈춰 세운다. 카프카가 문장 자체에서 부조리함을 드러내어 표면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을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었다면, 클레어 키건은 쓰여있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상상하도록 한다. 이것은 미학일까?


<맡겨진 소녀>를 읽었을 땐 미학이라고 생각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을 읽었을 땐 무언가 서늘함이 느껴졌다.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우리가 보지 않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푸른 들판을 걷다>의 첫 번째 단편 <작별 인사>에서 분명하게 일어난 ‘성폭력’을 묘사하지 않는 것은 미학이 아니고, 또 그렇다고 작가의 확고한 철학으로 꽁꽁 싸맨 윤리적 태도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는 ‘폭력’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은 안 보이는, 아니, 분명 그곳에 있다는 걸 누구나 알지만, 그것을 들추려고 하지 않는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클레어 키건의 글을 읽는데 좋은 지침서가 된다. 맨 처음의 이야기 <남극>은 여성의 욕망을 따라가게 되면 그 욕망은 안전을 담보로 해야 한다는 걸 이야기한다. 누구나 갖기 쉬운 욕망이지만, 마치 그런 욕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라는 듯, 어쩌면 누군가는 그런 욕망을 품은 여성은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읽을 수도 있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투박함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20대의 클레어 키건이 분노하고, 실험하고, 질문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키 큰 풀숲의 사랑>은 잊을 수 없는 엔딩을 선사한다. 배경을 보면 21세기의 사랑은 가능할 것인가를 묻는 것 같기도 하다. 불륜이 만들어내는 묘한 관계성을 암시하는데, 그건 어쩌면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질문하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이미 우리가 본 장편들과 비교하면 미성숙하고, 군더더기가 있는 문장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투박함과 더해져서 끓어오르는 에너지와 20대의 도발적인 질문과 마주할 수 있다.


작품별로 리뷰를 남길까 했지만, 그보다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으로 끝마치는 것이 앞으로 이 글을 읽을 분들에게 더 도움이 될 거 같다. 개인적으로 이번 단편집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것 중 하나가 대문을 누가 여는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맡겨진 소녀>의 영화를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항상 키건이 묘사하는 곳은 차고에서 시작하여 울타리로 둘러싸인 대문을 지나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차를 타고 얼마 못가 차가 멈추고, 대문을 연 뒤, 차가 통과한 후 다시 차에 올라야 한다. 여기서 대문을 여는 사람은 항상 운전자인 남성이 아니라 조수석에 타고 있는 여성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나온다. 가장 먼저, 대문을 누가 여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즉, 문제 자체의 사소함이다. 크나큰 사회 문제들이 널리고 널렸다. 대문 따위 누가 여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누군가 이 질문을 들고 와서 토론하기 시작한다면, 그 토론은 시시하고 하찮은 시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 사회 또한 그러하다. 이 하찮은 질문을 하나 던지는 순간, 둘 중 하나다. 엑셀 결혼, 반반 결혼까지 별의별 사연들이 넘치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 쫌팽이들의 불바다가 되거나, 누군가는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백수 나부랭이의 하소연으로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겐 사무친 한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떡할 것인가? 그 또한 무시당하기 쉬울 것이다. 그때 이 소설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마주하고, 한탄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할 것이며, 또 어떤 작품에서는 심심한 위로를 얻을 것이다. 어떤 영화감독이 말했다. 영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걸 표현하는 매체라고.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말로 하면 부서질 수 있는 감정들을 전달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꼭 소리 내어 읽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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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의 빛을 따라 ㅣ 암실문고
나탈리 레제 지음, 황은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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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1년 동안 연애를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한 사람을 그렇게 오래 만날 수 있냐며 놀란다. 하지만 내가 놀라는 지점은 11년이 속절없이 흘렀다는 것이다. 덧없이 흘러간 시간. 아니, 덧없진 않다. 아직 내 옆엔 그 사람이 있다. 우리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이따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둘 중 한 사람이 죽어도 남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만나 살아가겠지.” “아니, 그래선 안 돼. 평생 나를 그리워하라고.” “내가 먼저 죽는 게 낫겠어.” “아니야, 같이 죽자.” 언젠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죽음. 그것은 사라지는 것. 없음. 부재. 소멸. 무.

 

천국과 지옥, 환생, 이승과 저승, 혹은 남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는다, 필름에 새겨진 영원성, 불멸의 작품.. 나는 그런 걸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단 하나, 지구..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언젠가 사라진다.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 너도 나도, 사라진다.

 

너가 사라진 나를 생각해 봤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 아니 감각. 그건 비유가 아니다. 생각만으로도 내 일부가 뜯겨져 나가는 감각. 고통, 상실, 슬픔, 분노, 그리고 고독. 누구나,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진다. 그래서 어차피 사라질 것인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 그것은 충만함. 하고자 하는 것, 즐거운 것, 보고, 듣고, 느끼며 사는 것. 하지만 너가 사라지는 것만큼은 느끼고 싶지 않다. 슬픔이 있어야 행복이 있다.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너를 잃는 것만큼의 행복은 원치 않는다. 너를 잃는 것, 그건 일종의 소멸이다.

 

너의 임종을 생각해 봤다. 죽음 이후는 없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순 없다. 두려움에 떠는 너의 앞에서 내가 믿는 하찮은 진실 따위는 말할 수 없다. 그러면 난 진실을 버릴 수 있을까?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말, 온전한 진심은 “사랑해.” 그 말뿐. 사랑. 사랑.. 나의 임종을 생각해 본다. 너가 해주는 말. “사랑해.” 사랑은 무엇인가? 알 수 없다. 그것은 존재하는가? 천국도 지옥도 저승도 환생도 아무것도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은 느낄 수 있다. 느끼고 있다. 소멸 직전까지 그 사랑을 느낄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의 글을 읽으며 떠오른 단상들.

 

 


아주 오래전, 만남의 자명함 속에서 우리는 서로 이렇게 말했었다. “너야.” 바로 너, 있는 그대로의 너, 당신. 가장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너의 이름으로 불리는 너. 그 모든 세세한 것들로 이루어진 너라는 세계. 믿을 수 없을 만큼 너인 너. 바로 너. 충만함 속에서 말하게 되는 너. (p.19)

 

임종을 이틀 남긴 날 아침, 잠에서 깬 그가 말했다. 무서워.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정확한 중심이 소리 없이 무너졌다. 나는 몹시 부드럽게 그의 손을 잡으며 할 말을 가늠해 보았다. 나는 공포가 낸 그 끔찍한 상처를 씻어 주고 또 싸매 주고 싶었다. 그 일은 오로지 말로만 할 수 있었다. 나는 말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내게는 말을 찾아낼 힘이 없었다. 한 사람의 삶의 의미가 거기에, 그때 내놓을 말에 달려 있었는데도. 그게 바로 배신이었다. 그 말이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피난처였음에도, 그걸 찾아낼 힘이 내겐 없었다. (p.27)

 

어쩌면 우리가 글을 쓰는 것도 스트랜섬이 애도의 밤에 빛을 밝혔던 것과 같은 원초적 이유 때문일 것이다. 헌신이 아니고, 성찰도 아니며, 심지어 위안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가 글을 쓰는 건 서사에 대한 취향 때문이 아니라 권태 때문, 일상 사이사이의 무미건조한 시간의 흐름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당을 짓겠다고, 제단을 세우겠다고, 불을 밝히겠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시간을 소모하기 위해 글을 쓴다. (p.40)

 

그는 죽었다. 나는 버림받지 않았다. 내겐 계속해서 되씹어야 할 분노도, 회한도, 비난도, 씁쓸함도 없다. 내겐 오직 하나뿐, 없음뿐이다.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가 다시 형성되고 또다시 무너져 내리는, 거대하고 끔찍한 없음. 여기에 생각은 부재한다. 내겐 오직 두터운 물질뿐, 휘저어야 할 만큼 두껍게 들어차 있는 온 하루의 일과뿐이다.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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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나는 해부학 수업 - 머리털부터 발가락뼈까지 남김없이 정리하는 인체의 모든 것 ㅣ 드디어 시리즈 7
케빈 랭포드 지음, 안은미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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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이라고 하면 의대생들이 실습실에서 시체를 해부하거나 부검하는 장면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던 나는 해부학이라는 것에 흥미를 느꼈지만 해부학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다만, 평소 신체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어디가 아프고, 어디가 돌아가지 않고, 어디가 불편하다는 등. 그런 와중에 이 책을 접했다. 해부학이라고 하여서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지만, 그런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실용적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우리 몸에 뼈가 얼마나 있는지, 그 뼈들에 붙어 있는 근육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우리 눈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등등 말이다. 어떻게 보면 중고등학생 때 과학 시간에 배울 법한 내용들이었고, 또 다르게 보자면 이런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아주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나는 우리 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모르는데, 그 내용을 이야기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 몸은 70프로가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내용은 다 알지만, 우리 몸 안에 탄소가 있고 미네랄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다. 새삼스럽게 신기한 내용들이었다. 알았지만 몰랐던 내용이었고, 쉽지만 동시에 어려운 내용이었다. 


물론 뒤로 갈수록 전문적인 내용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이런 서적을 접할 때면 항상 처음 마주하곤 하는 명사들에 골치가 아프기 마련이다. 이 책도 비슷했는데, 그 명사들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맥락으로만 이해하고 넘어가더라도 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한 두번 반복해서 읽고 다른 서적에서 이런 단어를 마주할 때 다시 이 책을 펴보면 이해하기 쉬울 법하다. 


이 책은 하나하나 주의깊게 읽는 것보다는 쭉 읽어나가면서 내가 관심있는 부분에서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느꼈다. 화학이나 생리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같은 사람은 내가 관심있는 부분에 눈이 더 가기 마련이고, 그러면 굳이 이해가 안 가는 부분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주 단순한 내용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이런 것도 모르면 안 되겠다는 심보로 검색하며 읽기는 했다. (흠..) 중요한 건 내가 갖고 있었던 의문점들에 다가가는 입구가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소화가 잘 안 되는 체질이고, 특정 운동을 할 때 발에 쥐가 자주 난다. 손목은 가끔가다가 통증을 느낀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병원을 가면 특이한 부분은 없다는 진단만 내려진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좀 더 내 증상에 가까워질 수 있는 입구에 데려다 준 느낌이다. 예를 들어,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노뼈와 자뼈 바로 아래에 있는 불규칙한 모양의 작은 뼈 8개를 모두 손목뼈라고 부르며, 이 뼈들은 손바닥과 손가락에 있는 뼈들을 아래팔에 연결해줍니다."


언젠가 병원에서 특이한 부분은 없지만 손목에 미세한 골절이 있었을 수 있고, 그로 인해서 손목을 많이 사용하게 되면 통증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냥 그려러니 했는데, 아래팔과 손바닥을 연결해주는 8개의 뼈들 중 하나에 미세 골절이 있었던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책을 읽어나가며 내 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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