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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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1년생인 나는 어렸을 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수도 없이 들었다. 어렴풋하지만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도 몇 번이나 봤고, 주변에는 금강산을 다녀온 친구들도 꽤나 많다. 하지만 남북전쟁은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었고, 연좌제나 빨갱이라는 단어는 영화나 소설에서 접했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2017년 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시위에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까지 갈라놓는 정치적 갈등이 분단 직후 상황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음을 실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비극적인 근현대사에 가장 깊숙하게 발을 디뎠던 것은 13년 전 군 복무 시절이다. 후방에 근무하던 나는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말 그대로 전역만 기다리던 병사였다. 그날도 무슨 유해를 찾겠다고 땡볕에 산에 올라 땅에 삽질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우리 부대에서 아무도 유해를 찾지 못했지만 한조였던 나와 맞선임은 유해를 두 구나 찾았다. 한 구는 완전 유해였다. 탄피에 만년필, 수첩까지 나왔다. 추후 영결식까지 거행됐다. 어쩌면 60여 년을 차가운 땅속에서 영겁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그분도 누군가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문득 <유령의 시간>을 읽고 그날을 떠올려본다.

 

고작 15년을 아버지와 함께 했을 지형은 아버지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45년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이섭은 격동기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낸 인물이다. 아니, 이렇게 표현하는 건 실례다. 어떤 언어로도 이섭이 살아온 세월을 표현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형은, 혹은 작가 김이정은 이섭의 삶을 글로 써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것이 오빠 지석과 한 약속 때문인지, 딸로서의 도리인지, 혹은 작가로서의 사명인지는 알 수 없다. 때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느껴졌던 많은 감정들 중 부끄러움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나한테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이섭은 말한다. “인간의 생이여, 헛되고 헛되도다. 하물며 이념과 꿈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지 않는 생은 또 얼마나 헛될 것인가

 

이섭의 삶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치열했다. 어쩌면 얼굴에 침을 뱉은 운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삶은 달라졌을까. 숙부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면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하지만 인생이 헛된 것처럼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부질없다. 다만 그는 숙부의 영향을 받았고, 운식을 만났다. 그 삶 속에서 그는 치열하게 살아갔다. 이념을 가지고 꿈을 꿨으며 꿈이 박살 났을 때도 인간을 믿고 살아갔다. 진과 아이들을 하염없이 기다렸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미자를 호적에 올렸다. 모든 걸 잊기로 다짐했지만 남북의 상황이 좋아지니 실낱같은 희망을 다시금 품었다. 그는 끝내 떠났지만 진과 지용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지형이 듣는다.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결말이었다고 하면 너무 싱거울까. 하지만 나는 지형이 지용에게 편지를 쓴 대목에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결말은 단순한 판타지라고 치부해선 안 되는 무언가가 담겨있다. 매일 같이 양조장에서 하염없이 진과 아이들을 기다리던 이섭의 시간이 담겨있고, 가족들의 생사를 모르는 채 떨어져 있는 이산가족들의 현재가 담겨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비극적 근현대사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담겨있다.


이제 어린아이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랫말을 모른다. 심지어 대학생인 친구들을 만나봐도 북한과의 통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부표처럼 쓸려왔을까라고 생각한 이섭처럼 어쩌다가 이 나라는 이지경까지 왔을까 생각해본다. 무수히 많은 유령들이 한반도를 떠다니고 있다. 이제 어떡할 것인가. 도착하지 못한 편지는 반송될 것이다. 이제 곧 우리는 반송료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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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1 1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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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0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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