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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의 숨은 상처
리차드 세넷.조너선 코브 지음, 김병순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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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여든 살, 계급 전사로서 나의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앞으로도 노동 계급의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인식하는 계급 의식이 더욱 투철한 사회가 도래하기를, 나는 희망한다. (p.15)

 

이 말은 마지막 부분인 나는 희망한다때문에 자크 데리다가 이야기 한 나는 해방이라는 위대한 고전적 담론을 버리는 것을 거부한다가 떠오른다. 같은 이야기지만 리처드 세넷은 좀 더 희망적이고, 자크 데리다는 좀 더 절망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리처드 세넷의 말은 지금의 시점에선 절망적이고, 자크 데리다의 말은 희망적이다.

 

이 책의 홍보 카드 뉴스를 보았을 때, 피가 끓었다. 계급의 숨은 상처라니, 노동자에 관한 이야기라니, 사회의 계급 구조라니, 그런 주제들은 언제나 흥분하게 만든다. 그래서 다른 책들보다 훨씬 전투적으로 읽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줄 알았지만 그보다는 굉장히 씁쓸하고 절망적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나의 상황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었고, 둘째는 50년 전에 쓰인 이 책이 주장하는 사회 문제는 지금은 문제가 아니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정당성 개념은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오늘날 훨씬 더 복잡해졌다. 어떤 사람이 복종해야 하는 누군가에게 스스로 순종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 자신의 자아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불황의 시기, 감독관은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시간 외 노동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 쉽다. 그러면 노동자의 자유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일 노동자가 자신의 자유를 앗아갈 권리가 감독관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그가 어떻게 자신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까? 잠정적으로나마 권력이 정당화되면, 사람들이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에게 어떤 존엄성을 부여하든 간에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규칙이 뒤따를 수 있다. (p.111)

 

이 위 문단이 SNS에 올라가면 무슨 댓글이 달릴까? 혹은 우연찮게 나와 생각이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무슨 말을 듣게 될까? 임금을 받은 노동자는 당연히 자유를 박탈당한 채로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 되돌아오지 않을까? 이런 말에 누군가는 좀 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노동환경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에 대한 반박으로 또 누군가는 능력의 차이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자본주의 논리는 50년 전보다 지금 훨씬 더 뿌리 깊게 박혀서 싱싱한 열매를 맺고 있다.

 

직상 상사들은 부하 직원들을 강압으로 밀어붙인다(그들에게 조지 코로나는 자신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검사다). 그러나 부하 직원들은 상사의 지배 아래서 보낸 시간의 의미를 생각할 때, 직장에서 자신이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자신에게 둔다. 그들은 자신이 더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업무에 전념한다면 그렇게까지 직장에서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고 뭔가 중요한 성과를 낼 테지만,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사람은 바로 코로나다. (p.132)

 

계급의 실질적인 충격은 한 인간이 인생에서 권력 관계의 양쪽에 다 있을 수 있어서, 그가 심판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개인이 되었다가 일반 대중 집단의 구성원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계급 갈등의 내면화를 의미하는데, 인간 사이의 투쟁이 각 개인 내면의 투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나타낸다. (p.138)

 

연봉협상을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회사가 어려워서 전체 연봉이 동결되어도 직원들은 자신을 탓한다. 자신이 성과를 내지 못해 회사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이 업종 혹은 회사에 들어온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 어떤 업황이 좋지 않거나 회사의 경영 상태가 좋지 않더라도 노동자들은 자신에게서 그 문제를 찾아 채찍질하는 성향이 있는 것이다. 과거와는 다르게 현대의 자본주의는 자유를 적극 활용한다. 억압의 시대에서 벗어난 지금은 모든 선택을 개인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철학자 한병철이 지적했듯, 자유는 더 큰 억압으로 되돌아와서 존엄을 더 짓밟아버린다.

 

내가 꿈꿔왔던 일, 그리고 했었던 일은 영화였다. 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하지만 여러 요인들과 산업 자체의 어려움으로 지금은 다른 업종의 회사를 다니고 있다. 이 회사는 급여가 적은 대신 나에겐 거의 모든 것이 완벽하다. 누군가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회사를 다니는 게 힘들다. 무언가가 나를 갉아먹는 느낌이 든다. 그 무언가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닌 직종이라는 것이 가장 크고, 또 하나는 나와 맞지 않는 계급의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다. 영화를 하면서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보았다. 삶이 어려운 사람을 보았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썩어빠진 사회에 분노하기도 했고, 광장에 나가 시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수십 억대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다. 수억 대의 인테리어를 하고, 고급 외제차를 모는 사람들을 상대한다. 물론 내가 직접 상대하는 건 아니지만.. 여하간 그런 일을 하는 회사에 있다 보니 이런 느낌이 든다. 내가 놀던 물보다 훨씬 급수가 높은 물인데, 숨쉬기가 힘들다.

 

일부 인류학자들은 특정 부족들에게서 일어나는 유사 종 분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정 부족의 내적 결속과 응집력이 너무 강한 나머지, 부족민들은 그들의 고유한 관습이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기준이 될 거라고 믿는다. 그 부족은 자신들과 다른 관습을 가진 다른 집단들과 우연히 마주칠 때 왜 그들을 관대하게 용인해야 하는지, 심지어 같은 부족민들끼리는 결코 행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잔혹함으로 그 이방인들을 대하더라도 왜 자기들이 이를 신경 써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특정 사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정의하는 극단적 조건이 될 때,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경멸과 적개심은 거꾸로 인간 존엄성을 찬양하는 것이 된다. (p.82)

 

그는 인생을 살면서 타인의 존중을 받기 위해 그들 수준으로 자신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은 그가 그냥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자기보다 더 높은 계급 사람들의 이미지와 자신의 이미지를 비교하지 않을 때 은행에서 함께 일하는 고학력 동료 직원들이 일하는 데 느끼는 혐오감, 그리고 육체노동이 더 존엄하다고 느끼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p.46)

 

외형상 성공한 지위에 오른 상황에서도 스스로 부족하고 무기력하다고 느끼는 리사로 같은 부모의 자식들은 정규 교육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느낀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p.47)

 

이와 관련해서, 육체노동자 가정의 자녀들이 들어갈 수 있는 한 지방 대학의 3학년생 청년 제임스의 예를 들어보자. 제임스의 아버지는 낮에는 시청 서기로 일하고, 밤과 주말에는 바닥에 까는 깔개를 수선하는 일을 한다. 제임스는 대학에서 어떻게 해야 성공하는지 알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받아 1학년에서 제적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제임스는 프랭크가 은행에서 하는 사무직 업무를 멸시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학교를 경멸한다. ‘고학력자는 기능공보다 지위가 높지만 그들이 하는 일에 내재된 만족은 낮아 보인다. 그러나 제임스는 무엇보다 아버지를 위해 대학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48)

 

위 상황이 공감되는 것은 내가 영화 스탭으로 일을 할 때는 현장에서 일을 했었다는 것이다. 이후 영화사에서 글을 썼기 때문에 위 문단의 상황들이 더 와닿았다. 육체노동에서 사무직 노동으로 전환되었을 때와 내가 원하는 일을 하다가 원치 않은 일을 할 때 모두를 경험한 나로서는 위 문단들을 읽으며 목이 메었다. 먼저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50년 전 미국의 상황을 알지는 못하지만 비슷할 거라고 추측한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무직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교육 수준이 자신보다 월등히 높고,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양가감정을 갖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다만,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탁상행정처럼 육체노동자들은 사무직 노동자를 아무것도 모르는 고상한 인간들이라는 시선이 명백히 존재한다. 그것이 어떤 호르몬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실제로 여러 육체노동을 해본 내가 솔직하게 그때의 심정을 돌이켜보면, 힘들게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는 분노와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저 사람이 할 수 없을 거라는 과시로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할수록 그러하다. 힘을 쓴다는 것, 공구를 다룬다는 것, 그 일들의 뿌듯함과 과시적인 측면은 나를 부리는 사람들에게 내가 쓸모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면서 내 자아를 방어하려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우리가 취하는 자세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배관공이든 대학교수든, 이 사회의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고 스스로 자존감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아를 입증해야 한다고 말하는 가치 체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관공이 그렇게 하려고 할 때 느끼는 감정은 대학교수가 그렇게 하려고 할 때 느끼는 감정과는 매우 다르다. 지금까지 우리가 가족 내에서 개인의 능력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제시한 예들은 그런 주장이 일반적으로 세 가지 결론을 보여준다는 것을 암시한다. 첫째, 존중을 추구하는 시도는 좌절된다. 둘째, 개인의 실패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셋째, 그러한 시도는 전체적으로 개인이 존중받으려면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p.109)

 

그렇기 때문에 육체노동자는 자아를 은폐하거나 혹은 버린다. 그 방식이야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우선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학교의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보통의학생들은 수업 시간이 마치 감옥살이인 것처럼, 학업과 수업이 빨리 끝나면 좋을 무언가인 것처럼, 즉 어ᄄᅠᇂ게든 살아남아서 떠날 날을 고대하는 그들 삶의 빈 공간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찾고 돈을 벌면, 그때 비로소 자기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학교생활을 그렇게 많이 지루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왓슨 학교의 많은 학생은 그들의 학급을 좋아하지만, 학교가 자신들을 도울 것이고 학교에서의 경험이 자신들을 변화시키거나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할 거라는 기대를 접었을 뿐이다. (p.117)

 

왓슨 학교의 대다수 아이들이 자기 능력을 발휘할 의무가 있는 학창 시절은 그들 삶에서 진짜 시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학교라는 기관을 떠나서 스스로 밖으로 나가 일할 때 비로소 활기찬 삶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성인이 되어 직장이라는 새로운 기관으로 옮겨 간 뒤에도 어릴 적 학교의 요구에 반응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직장의 능력 발휘 요구에 반응한다. 그들은 기관 밖에서 보낸 시간을 자기 삶에서 의미 있는 시간으로 생각한다. 예컨대, 코로나는 직장은 생활하기 위해 돈을 버는 곳일 뿐이에요. 하루하루 내게 중요한 것들은 가정에 있죠. (...) 가족과 이웃들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화가 나 있는 젊은 전기 기사 칼 도리언 또한 직장에서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학교에 다닐 때 일을 하면 딴생각을 멈출수 있을 거라고 늘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성인이 된 그는 직장에서도 딴생각을 한다. 직장 생활 외에 자신에게 진짜 시간이 무엇인지 그는 상상도 잘 안 된다. (p.130)

 

자아의 은폐는 일생 동안 일어난다. 자본주의의 톱니바퀴가 일초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것처럼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자는 지속적으로 자아를 은폐할 수밖에 없다. 내가 스무 살 때 했던 생각은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을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쏟아붓는 것은 인생의 3분의 1을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역설적으로 살기 위해서 행하는 일들이 아닌가. 물론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이 책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아가 제 모습을 드러내어 그 욕망에 솔직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다. 욕망의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정신분석으로 점핑해야 한다. 거기까지 가지 않고 소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초점을 맞추더라도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한다는 건 소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 소외를 어떻게 견디는 걸까? 저자의 논점은 미국으로 이주해 온 이방인들이 가진 소외감은 능력에 맞췄다는 걸 언급해야겠다. 여하간 저자가 이 글을 쓸 때의 노동자들은 자식에게 초점을 맞췄다.

 

따라서 여기서 그의 가족이 남편과 아버지에게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상호 호혜적 계약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단지 허위의 상호 관계에 불과하다. 가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사람이 가족에게 자신이 그들을 위해 희생하기를 원하는지 묻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일방적인계약의 위력은 바로 한 개인이 전적으로 남들에게 뭔가 주는 행위를 강탈해서 그들이 대항할 수 있는 권리 주장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에 있다. 강탈자를 비난하는 모든 행위는 그가 그들을 위해 자기 욕망을 억제한다는 사실 앞에서 우선권이 뒤로 밀린다. (p.173)

 

어디서 본 광경이지 않은가? 당시 미국과 한국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6.25 직후 오로지 자식 교육에만 힘쓰는 일들이 벌어졌다. 저자의 말처럼 그들이 자식 교육에 성공하건 성공하지 못했건 결국 배반당한다는 것이 분명하더라도 여하간 당시 노동자들은 자식들을 보며 버텼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 버티고 있는가? 여전히 가족에게 희망을 걸고 버티는 사람이 있지만 출산율은 떨어지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지금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보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정신 분석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기대가 배신당하더라도 그 기대는 인간의 삶을 버티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뿌리다. 그 뿌리가 허황된 것일지라도 분명하게 존재해야 한다. 다만, 그 뿌리가 좀 더 믿음직스러우면 좋은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지금 우리는 무엇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지금은 세상이 너무 복잡해져서 뿌리조차 분열되고 있지만 우리는 불로소득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열심히 벌어서 자식 교육시키는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는 열심히 벌어서 재테크를 한다. 그건 훨씬 더 큰 배신을 불러올 것이다. 이 세계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건 언제나 자본이기 때문에.

 

많은 노동자가 학생들에게 느끼는 분노는 부분적이나마 그와 같은 뿌리에서 분출된다. 능력과 특권의 왕좌에 앉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런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거부당한 사람들에게는 개인적 모독이다. 특권을 부여받은 아이가 존경받을 수 있는 자리에 앉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내게 현재의 결핍 상황을 탈출할 기회가 올 거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들은 미래를 상징하는데, 그 미래가 나를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p.188)

 

자본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은 인간을 잠식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것인데, 누군가 재테크를 하지 않으면 바보 같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예적금을 하는 사람도 바보 취급을 한다. 과거에는 능력과 특권의 자리에 앉는 걸 거부하는 사람을 그렇게 취급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또한 자아의 방어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 격언은 격언일 뿐, 이 상황에 적용하면 참으로 하찮은 인간이 될 뿐이다. 하지만 그 하찮은 인간은 불쌍한 인간이다. 자식들이 성공하길 바랐던 부모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난 그들의 희생이 숭고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았다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라는 점도 동시에 생각한다.

 

그 결과, 우리는 계급 사회 안에서 사람들을 계속해서 이동하게 하는, 즉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소유, 더 높은 신분을 찾아 움직이게 만드는 활동들이 물질적 욕망 또는 심지어 감각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계급 구조가 그들의 삶에 초래한 심리적 박탈감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계급 사회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신분 상승을 추구하게 만드는 심리적 동기는 외부 세계의 사물과 사람을 지배하는 더 큰 권력을 갖겠다는 데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의심을 치유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 (p.227)

 

한 가지를 더 첨언하자면, 욕망은 휴식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욕망이 계급과 만나는 순간, 진짜 욕망은 사라지고 가짜 욕망만이 떠다니게 된다. 저자의 말대로 그 욕망이 자신을 치유하고자 함이라면 욕망이 끊임없이 활동할 수 있게 우리는 우리를 끊임없이 상처 내야 한다. 상처를 낼 흉기를 계급사회가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보았을 때 사회는 점점 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흉기를 전달할 것이고, 인간은 점점 더 그 흉기가 자신의 손에 원래부터 들려있던 것처럼 착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한 상황은 그와 달리 신발 판매원이나 사무직 노동자가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그들의 머리와 지적 수준을 인증하는 자격증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2년 동안의 문과교육 과정은 아마도 청년들이 그것 없이는 취직하기 힘들다는 사실 빼고는, 근본적으로 생산 기능이 없는 일종의 통과 의례다. 우리가 아는 천박한 공리주의의 측면에서, 이러한 장벽의 용도는 기대와 현실이 서로 충돌하게 만들어 결국 신발 판매원이나 사무직 노동자가 자신의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자책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러한 충돌은 노동자들을 착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훈육하기 위해서 쓰인다. (p.242)

 

자아를 분열시키는 행위는 끔찍한 고통과 괴로움을 낳는데, 그것을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면에, 마치 노동 상황이나 상사의 인정이 자신의 진짜 자아와 전혀 무관한 것처럼 행동하는 육체노동자의 삶에서는 그런 내면의 분열이 수그러진다. 자기 능력을 의식적으로 외부로분리하는 태도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책임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한계선을 제공한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취약하고 불안으로 가득하게 만드는 사회에 아무 저항없이 복종해야 하는 경우, 자아를 분열시키는 것은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느껴야 할 고통을 막아낸다. 이런 의미에서, 진짜 자아와 조직을 위해 업무 수행을 하는 자아의 분리는 정신 분열을 겪을 때 수반되는 고통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p.272)

 

저자는 마지막으로 몇 가지를 더 지적한다. 자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노동자는 소외를 덜 느끼고, 작업 지시를 받지 않고 혼자 일하는 노동자들은 위의 노동자들과는 다르게 자아를 은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덧붙여서 존엄의 이미지가 오히려 인간의 계급을 나누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50년 전, 이런 문제들은 이제 달라진 형상을 보인다. 자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노동자는 스스로를 억압하고, 혼자 일하는 노동자들은 자아를 드러낼 수 있을지언정 자아가 부서지고 있다(현재 자영업자들과 전문직 기술자들을 보라). 계급은 존엄을 여전히 품고 있는 걸까? 저자가 이 책을 쓸 당시 그들이 보았던 상층 계급들의 존엄은 어떤 이미지였을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상층 계급들에게는 존엄이라는 것은 없고 자본에 먹힌 이미지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다시 한번, 데리다의 말로 마무리를 해야겠다. ‘나는 해방이라는 위대한 고전적 담론을 버리는 것을 거부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자주 듣는 말이 있다. ‘그건 너무 이상적이잖아.’ 난 그 순간 내 말이 옳다는 걸 느낀다. 이상적이어서 할 수 없다는 건 실패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방이라는 이상에 닿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아니다. 이상은 언제나 저 너머에 존재하고, 우리는 저 너머에 있는 존재를 향해 달려간다. 그 존재는 신기루일 수도 있고, 우리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이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이상으로 향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저자는 50년 전에 능력주의의 문제를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나는 그 문제가 현재 자본으로 변형되었다고 본다. 지금의 시대는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없는 것이 문제다. 이제는 아무리 스펙이 좋아도 돈을 더 잘 버는 사람이 장땡인 사회가 도래했다. 심지어 역겨운 유튜브 광고 멘트까지 등장한다. 지금 가난한 것은 죄가 맞다는 그런 멘트들. <생활의 발견>에서의 대사가 떠오른다.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얼마 전 문형배 헌법재판관의 청문회가 회자되었다. 그는 말했다. 보통 사람의 재산 수준이 3억 원 정도여서 그 정도를 넘지 않으려 했다고. 4억이 좀 넘은 재산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요즘은 문형배 헌법재판관의 그 말이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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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클 - 제18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34
최현진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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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모르게 투박한 문장들은 어색함을 불러오지만, 동시에 꾹꾹 눌러쓴 작가의 고민이 느껴진다. 유려하진 않지만 인물들의 마음에 가닿으려는 흔적들이 보이고, 몇몇 설정들은 부유하면서도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단연코 그 '부유하는 감각'이다. 어딘가로 떠밀려가는 듯한 10대 시절의 그 아득한 감각은 유리의 눈에 맺힌 눈송이, 겹겹이 쌓인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 꿈속의 설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를 그 부유감은 죄책감과 채무감을 지나,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한 소녀의 여정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15년 뒤를 상상하는 유리의 소설은 결국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단언컨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일은 돌고 돌아 결국 일어날 것이라고도 말할 것이다. 우리가 지켜본 유리의 여정처럼, 앞으로의 유리 역시 정해진 길로만 달려나갈 순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응원할 것이다. 아니, 응원해야 마땅하다. 언젠가 이영준이 썼을지도 모를 숟가락으로 밥을 퍼먹는 유리처럼, 언젠가 내가 겪었던 그 나날들을 유리가 겪을 테니까. 힘내라. 세상이 녹록지 않아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결국 카트만두에 도착할 것이다.

 

같은 반 아이에게 고백을 받았는데

내 갈색 머리가 좋대

내가 입는 옷들이 자기 취향이래

눈을 마주치지 않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늘 궁금하대

얘기를 듣고 나는 놀랐어

다른 사람의 눈으로 나를 본다는 건 꽤 낯선 일이야

나는 사진도 잘 찍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동안 내가 어떤지 잘 모르고 지낸 거 같아

어쩌면 그만큼 스스로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거겠지

거울을 들여다봤어

분명 나인데도 눈을 맞추기가 힘들어

(p.31)

 

시온이 자기가 밥을 사겠다고 했다. 눈송이처럼 하얀 고슬밥이 나오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영준도 친구와 와서 밥을 먹었을까. 나는 언젠가 이영준이 썼을지도 모르는 숟가락으로 밥을 펐다. (p124)

 

빛은 0.5 밀리미터밖에 되지 않는 얇은 막을 통해 들어온다. 각막은 눈의 창문이다. x의 창은 금이 가거나 깨어진 적 없었다. 창은 나의 일부가 됐다. (p.189)


*출판사에서 가제본을 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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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윌킨스 지음, 김수민 옮김, 김준홍 감수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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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소설이나 인문학, 예술 서적을 즐겨 읽었던 터라, 과학에 대한 지식은 솔직히 많이 부족하다. 그 유명한 『이기적 유전자』도 읽지 못했고, 몇몇 과학책들은 어렵고 따분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읽은 『인간얼굴』 역시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나에게는 낯선 방식의 신기한 경험이 찾아왔다. ‘인간은 어디서 왔을까?’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런 생각을 가끔 해보긴 했지만, 그 질문이 ‘공부’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냥 막연히,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다윈의 진화론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그 ‘원숭이 같은 동물’은 또 어디서부터 나온 걸까? 이 책은 인간이 언제부터 ‘얼굴’을 갖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면서,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는 본래 물속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인간은 ‘물고기였다’는 것이다.

최초 육상 동물의 진정한 조상은 육기어류 또는 총기어류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며, 이 중에서도 5천만 년 전에 멸종된 것으로 여겨졌다가 1938년에 현존하고 있음이 밝혀진 실러캔스가 좋은 예다. 이들의 외제는 연골성 지느러미가 아닌 바다나 강하구의 진흙 바닥 같은 땅에서 움직일 수 있게 해 주는 근육질의 지느러미였다. 느리고 머뭇거렸다고는 해도 새로운 환경에 첫발을 내디딘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이런 물고기들이었다. (p.231)

이 사실이 묘하게 흥미로웠다. 이 책은 이런 흥미를 계속해서 이어간다. 당시 물고기들은 턱이 없어 미생물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턱’이 생기게 되었고, 그 후부터 물고기들은 무언가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턱’의 등장을 진화의 핵심 전환점으로 강조한다. 무언가를 씹어 먹기 위해 발달한 턱, 그로 인해 생겨난 능력들. 그리고 그런 턱을 가진 생물체들이 육지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포유류 사촌들이 공유하는 얼굴 표정은 진화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얼굴 표정의 활용, 특히 말을 하면서 짓는 표정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 혈통이나 진화 계통안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얼굴과 뇌를 연관시키는, 전에 없던 진화적 사건들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 과정에서 인류 이전의 유인원에 더 가까웠던 조상들은 오늘날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런 혈통을 호미닌 계통이라고 하며, 침팬지에서 갈라져 나와 현대 인류의 조상이 되는 영장류의 분파를 의미한다. 인류 진화의 전모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영장류와 포유류, 비영장류, 심지어 척추동물까지 광범위하게 공유하는 요소들과 인간의 얼굴만이 가진 특별한 요소들을 모두 고려 해야 한다. (p.30-31)

하지만 ‘턱’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인간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었던 이유는 단연 ‘뇌’다. 아직 뇌에 대해 밝혀진 것은 많지 않지만,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고,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한 유일한 동물이다. 놀라운 점은 뇌와 얼굴이 ‘공진화’했다는 사실이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다른 요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굴의 표정을 표현하고 읽어내기 위해 뇌의 기능이 함께 진화했다는 것이 인상 깊다.

감정 표현을 하거나 다른 개체들이 이를 “읽기” 위해서는 두뇌를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하므로 얼굴과 얼굴 표정의 진화적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뇌의 진화를 이해해야 한다. 얼굴이 어떻게 진화했는가를 설명하는 일에는 뇌의 기능들, 특히 얼굴 표정을 만들고 이해하는 일과 관련된 두뇌의 특성이 어떻게 얼굴과 나란히 진화했는가를 분석하는 작업이 포함된다. 이처럼 생명체가 가진 뚜렷이 구별되는 두 개의 특성이 함께 진화하는 현상을 공진화라고 하며, 얼굴-뇌 공진화는 얼굴의 진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p.57)

그렇다면 ‘주둥이’는 왜 사라졌을까? 인간 이전의 종들은 주둥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역시 점점 덜 필요해지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저자는 그 이유를 ‘손의 발달’에서 찾는다. 무언가를 입으로가 아니라 손으로 조작할 수 있게 되면서, 점점 입이 줄어들고 얼굴의 형태가 지금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뇌와 손의 발달.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문명을 만든 진짜 이유가 아닐까? 저자는 그 변화의 근본 원인을 ‘기후 변화’에서 찾는다. 극심한 환경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조상들은 협력하고, 그에 따라 언어를 발전시켜야 했다. 그렇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뇌가, 또 그 언어를 전달할 손과 표정이, 진화해온 것이다.

털과 털가죽의 진화와 인간, 특히 인간의 얼굴 사이에는 서로 상반된 방향으로 진화하는 특이한 관계가 존재한다... 얼굴 털의 퇴화에 따른 한 가지 결과는 얼굴이 털로 덮여 있지 않기 때문에 표정을 더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얼굴을 매개로 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은 얼굴에서 털이 사라지면서 더욱 향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p.248)

이처럼 인간의 얼굴은 진화의 복합적인 결과물이다. 포식자를 구별하거나 식량을 구분하는 기능에서 시작해, 점차 감정과 의도를 전달하는 사회적 기능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표정’이라는 언어가 존재한다.


물론 이 책에서 주장하는 모든 내용이 정답일 수는 없다. 여러 가설과 복잡한 이론들이 등장하고, 개념도 많아 읽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처음 100페이지는 용어를 찾아보며 읽었고, 그 이후부터는 속도가 많이 더뎌졌다. 다만 책 뒤쪽에 정리된 단어 설명을 꼭 참고하길 추천한다. 또 요즘엔 유튜브나 웹에서도 유전자, 신경세포에 대한 설명 영상이 많으니, 함께 보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나 역시 네이버 사전과 유튜브 영상을 참고하며 읽어 나갔다.


책을 덮고 난 후, 문득 옆 사람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그 사람도 태아일 때는 코 아래부터 얼굴이 자라났겠지. 그렇게 한 점에서 시작해 위로, 아래로 얼굴의 형태가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 이전에는 얼굴이 없었고, 우리 모두는 물속에 살았다. 나는 미신도, 전생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는 확실히 느꼈다. 우리 몸 속 유전자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기원을 추적하며,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이지, 묘한 독서 경험이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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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나는 지리학 수업 - 돈의 흐름부터 도시의 미래까지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지리로 통한다 드디어 시리즈 4
이동민 지음 / 현대지성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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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어렸을 때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어른들의 말처럼 직업이나 수입에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알고자 하는 욕망에 의한 후회였다.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대학의 타이틀이나 직업, 수입에 연연하지 않고 순수하게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고 공부할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다. 하루 8시간, 40시간의 노동은 인간을 너무나도 지치게 만든다. 그런 상황에서 <드디어 만나는 지리학 수업>은 반가웠다. 기초부터 탄탄히 지리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 그랬다. 책을 읽자마자 탄식이 터졌다. , 제리미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를 읽기 전에 읽을걸. <총균쇠>를 읽었을 때가 벌써 8년이나 지났다. 당시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하며 넘기고, 어떤 부분은 검색에 의존하였고, 어떤 부분은 내 멋대로 받아들였다. 물론 <드디어 만나는 지리학 수업>을 읽는다고 <총균쇠>를 이해하기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좀 더 친근한 상태에서 몇몇 용어들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 것 같다. 이 책은 중고등학생 정도의 수준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오히려 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된 나 같은 사람은 등고선이라는 반가운 단어가 곳곳에 등장하여 신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열대기후 (생태계의 보고이자 인류의 고향) 쾨펜은 최한월 평균기온이 섭씨 18도 이상인 기후를 열대기후라 분류.

열대우림기후 일 년 내내 많은 비가 내리는 유형. 연평균 강수량 2000밀리미터가 넘고, 매월 고르게 내린다.

건조기후(나무와 작물이 자라지 않는 땅) 기온이 아니라 강수량으로 구분. 연평균 강수량이 500밀리 미만인 경우.

온대기후 (서구 문명을 꽃피운 살기 좋은 땅) - 최한월 평균기온이 영하 3도에서 영상 18, 최난월 평균기온이 영상 10도 이상인 기후.

냉대기후 (혹한의 겨울과 최소한의 여름) - 최한월 평균기온이 영하 3도 미만이되, 최난월 평균기온이 영상 10도 이상. 온대기후보다 겨울이 확실히 춥지만, 길든 짧든 여름이 있는 기후.

한 대기후 (순록의 땅 툰드라와 영구동토의 남북극) - 최난월 기온이 영상 10도에 미치지 못하는 기후. 여름다운 여름이 없는, 일 년 내내 추운 기후.

고산기후 (잉카 문명을 꽃피운 고원) - 강수량은 적지만 고산기후 덕분에 기온이 비교적 온화.

 

여행을 갈 때면 그 나라의 날씨를 검색하지만 위 내용처럼 기후별로 나와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확한 뜻은 몰라도 누구나 대충 알지 않나. 하지만 이번 기회에 정확한 정의를 정리했다. 물론 곧 까먹겠지만.

 

(...)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제국 정부는 독일을 온전히 통합할 해답을 지리학에서 찾습니다. 독일의 지리를 제대로 교육함으로써 독일제국 내의 사람들이 다 같은 땅에 사는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인식을 확실하게 심어주겠다는 발상이었지요. 그로 인해 독일의 여러 대학에 지리학과가 개설되었고, 초중등학교에서도 지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근대 지리학과 지리교육은 이렇게 국가와 국토의 와전한 통일이라는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비로소 결실을 맺기 시작합니다. (p.121)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기하게도 지리학은 내집단으로 묶어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북한 사람들과 한민족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38선이 그어진 지 70년이 넘은 지금은 완전히 다른 국가라고 인식하고 있다. 물론 구분 지음이 대부분 나쁜 쪽으로 흘러가지만, 이러한 특성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독일 근대 지리학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라첼은 인간 사회와 문명이 각 지역의 다양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을 토대로 형성되며 서로 다른 문화의 지리적 전파를 통해 변화 발전한다는 논의를 펼쳤습니다. 이를 통해 지리학의 핵심 주제인 인간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지리적으로 연구하는 방식을 한층 더 체계화했습니다.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 각 문화와 지역의 특성으로 이어진다는 관점은 이미 이전부터 존재해왔지만, 라첼은 문화의 전파라는 새로운 요인을 더함으로써 단순히 환경이 좋은 곳은 문명이 발달하고 그렇지 못한 곳은 문명이 덜 발달한다는 식의 단순하고 일방적인 도식을 벗어납니다. 이를 통해 지표공간에 존재하는 다양한 지역과 문화, 문명의 지리적 의미를 한층 현실적이고 깊이 있게 이해하는 길을 열었지요. 나아가 그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지리적 영역의 확보가 국가나 민족집단의 흥망성쇠에 직경된다는 레벤스라움 이론을 발표했고, 이 이론은 스웨덴의 루돌프 쉘렌, 독일의 카를 하우스호퍼 등이 계승하여 근대 지정학의 기초가 됩니다. 이러한 라첼의 이론들은 인간 활동이 자연환경에 강한 영향을 받아 결정된다는 환경결정론의 성격이 강하며, 실제로 라첼은 환경결정론적 지리학의 제창자라고 평가받습니다. (p.124)

 

개인적으로 환경결정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한국 내부에서도 이러한 의견을 지지한다. 서울과 인천, 경기라는 수도권 지역의 세 곳만 구분해 봐도 알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서울과 인천만 비교해놓고 보아도 교육 수준의 차이가 크며 인식의 간극은 엄청나다.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인천의 교실 분위기는 지극히 공부를 하면 이상한 아이로 치부되었었다. 2가 지나면서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그 분위기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한 분위기였다. 서울에서 자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이 이상한 친구로 치부되었다고 한다. 이 뿌리를 찾아보진 않았지만 환경은 다양한 요소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수많은 지리학자가 활약하던 20세기 초반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지리학자를 꼽으라면 바로 미국의 리처드 하츠혼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하츠혼은 대표 저서인 <지리학의 본질>에서 지리학을 지역의 고유하면서도 종합적인 속성인 지역성을 규명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지역성이란 그 지역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 의식을 바탕으로 구성된 속성이라고 규정하지요. (p.129)

 

실존주의가 전 세계를 매료하던 1970년대에는 인간주의 지리학이 큰 주목을 받습니다. 인간주의 지리학은 지표공간을 객관적인 실체인 공간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애착 감정 정체성과 같은 주관적인 성격도 결부된 장소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장소에 대한 주관적인 감수정, 즉 장소감을 강조한 인간주의 지리학은 지표공간을 인간이 지닌 정서와 감정, 심리의 차원에서 바라보게 하여 지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p.134)

 

자본주의의 모순과 불평등을 지리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데이비드 하비이지요. 마르크스주의를 지리학에 접목한 하비는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노동과 생산, 자본의 축적(자본의 1차 순환)은 토지 위에 세워진 건물, 시설, 인프라 등의 건조환경을 통해서 화폐 신용 금융 경제의 형태로 구체화(자본의 2차 순환)하며, 그러한 지리적 토대 위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은폐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기술 혁신과 사회적 지출이 이루어진다(자본의 3차 순환)고 설명합니다. , 자본주의를 이해하려면 노동, 생산, 자본과 같은 추상적인 경제 요인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간 환경적 맥락까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울러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되어 교환가치를 부여받은 토지와 건조환경이 그 자체로 투기 수단이 되면서 사회의 불평등을 악화하고 결국에는 부동산 거품의 붕괴에 따른 공항과 경제 위기를 불러온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p.136)

 

실존주의와 자본주의까지 지리학과 연계된 점은 참 신기했다.

 

이처럼 동종의 산업체나 기업체가 한곳에 집중해 있는 현상을 집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메뉴를 판매하는 가게들이 집적해 있는 먹자골목이 가게가 하나하나 떨어져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현상을 공간적 외부성에 따른 집적경제라고 부릅니다. (p.197)

 

어머니가 지방에서 카페를 하는데, 어느 날 그 근처에 카페가 들어왔다고 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위 부분을 읽고는 안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윈윈이라는 말이 옳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코로나 때 외국인들 대상으로 무료 백신 접종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들었었지만, 누군가 외국인들이 백신을 맞아야 우리가 코로나로부터 안전하지 않겠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혐오와 차별, 구분 지음은 결국 비극만 불러온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 요즘이다.

 

또 하나 놀라웠던 점은 서원을 이야기할 때였다. 과거 교실에서 앞문은 선생님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뒷문은 학생들만 출입할 수 있었던 공간이 떠올랐다. 물론 학교 건물을 들어갈 때도 중앙 현관은 교사들이 들어갈 수 있었고 양쪽 끝에는 학생들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런 점이 성리학적 질서에서 온 것이었다니. 놀라운 사실이었다.

 

사실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가 확대되면서 낙후된 구도심이 재생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 구도심은 세월이 오래되어 건물들이 낡고 도로 폭도 좁은 경우가 많지만, 여ᄀᆞ 깊은 구도심일수록 오래전에는 화려하게 번영했던 곳이기 때문에 그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공간이기도 하지요. 접근성도 좋은 편이어서 낡은 건물과 시설을 정비하면 마치 고품스럽게 차려입은 영국 신사와도 같은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사실 애당초 글래스가 젠트리피케이션과 관련하여 문제의식을 가졌던 부분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구도심에 거주하던 노동자 계층과 저소득층이 역으로 구도심에서 밀려나 외곽으로 이주하는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은 글래스가 착안했던 방향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바로 지대, 즉 땅값이지요. (p.289-291)

 

이 책은 기초 개념이기 때문에 술술 읽히지만 순간 멈칫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워낙 우리나라는 땅에 예민한 나라이며, 여러 역사적 사실들이 지정학적 문제로 발생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섬뜩하기까지 한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기술은 선악이 없고, 기술을 사용하는 자의 문제이듯 학문 또한 마찬가지다. 이 책은 그저 사실을 서술한다. 그뿐이다. 기본에 충실하다. 그래서 누구나 읽기 좋다. 이제 이 책을 다 읽었으니 다음 스텝으로 넘어간다. 이푸 투안의 <공간과 장소>가 흥미로워졌고, 그리고.. 다시 책꽂이에 꽂혀있는 <총균쇠>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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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패배의 기록 - 전후 일본의 비평, 민주주의, 혁명
김항 지음 / 창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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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받았을 때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던 것부터 고백해야겠다. 기대했던 내용과는 상이한 전개에 속으로 큰일났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과연 내가 서평을 성공적으로 쓸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앞섰다. 하지만 의외로 어렵게 느껴지던 몇 페이지를 지나자 술술 읽혔고, 무엇보다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어나갔다. 일본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비평으로 읽을 수 있지만 첫 챕터인 비평의 비평이나, 여러 의견들을 비평하는 것은 2차 문헌과도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주 개인적인 의견으로 책을 읽어나갔던 인상을 살펴보면,

 

1. 잘 알지 못했던 일본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재미. 그러니까 1930년대의 이토 이야기라던가, 일본의 공산당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는 내용이어서 더더욱 흥미로웠다. 그 시절을 이야기할 때면 군국주의자 일본, 징병, 위안부 문제, 2차 세계 대전으로 휩쓸려가는 상황 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1930년대의 일본의 공산당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들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2. 걸출한 일본의 비평가들을 2차 비평하는 것 또한 흥미로웠는데, 저자의 탁월한 식견 뿐만 아니라 이 내용이 현재 일본을 넘어서서 동아시아 문제로까지 이어서 생각할 수 있다는 점.


3.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 전후 민주주의의 실태를 바라보며 작금의 대한민국을 반추할 수 있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안전한가. 아니, 안전은커녕 사실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오히려 제국주의의 탐욕을 버리지 않은 일본보다도 지금 우리는 더 큰 질병에서 허덕이고 있다. 많은 것들이 중첩되어 보이고, 연결고리에 묶여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옛사람은 가만히 풍경을 보며 꿈꾸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의연한 산하가 싫증나 마음속 풍경을 마음대로 바꿔 그리고 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 바뀐 풍경이 눈앞에 있다. 우리도 옛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풍경을 보기는 본다. 옛사람보다 아마 더 가만히 앉아 있을 터인데, 이상하게도 앉아 있는 의자가 1초에 100미터의 속도로 움직인다. 창밖의 풍경은 현실임에 틀림없지만 사람은 꿈꾸는 것과 동일한 심리 상태가 아니면 어떻게 이 이상한 모습으로 변한 현실을 견딜 수 있을까? 묘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그야말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자동차에 타야 한다. 꿈에서 깰 순간 따위는 없는 것이다. (...) 덕분에 우리는 자기 힘으로 꿈을 창조하는 행복도 용기도 인내도 잃어버렸다."

 

이것이 고바야시가 본 근대적 삶의 근본 조건이다. 현실을 꿈꾸듯 살아야만 하는 현대인에게 불안은 객관적 정세 변화에 따라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삶의 근원 조건이라는 것이다. 고바야시는 도사카의 비판에 답하면서 정세에 좌지우지되는 불안에 맞서 현대적 삶의 근원적 조건으로서의 불안을 대립시킨다. 따라서 고바야시가 말하는 건전한 상식이란 도사카가 호들갑스럽게 조장하는 정세 불안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불안을 삶의 근원적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꿈같은 현실을 감내하는 정신의 태도다. (p.34-35)

 

그런데 근대 일본 작가들에게 북방으로의 여행은 단순한 이국체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으로 성립한 근대 일본의 발자취를 몸으로 확인하는 여정이었으며, 이국이지만 이국이 아닌, 동시에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닌, 기묘한 회색지대로 진입하는 모험이었다. 어떤 이는 그 과정에서 근대 일본이 상실한 전근대적 생활상을 발견하고는 노스탤지어에 젖었고, 어떤 이는 이주 일본인의 강인한 생활력에 감탄하며 조국의 저력을 확인했으며, 어떤 이는 자만에 빠진 일본인이 현지인에게 자행하는 차별과 멸시를 부끄러워했다. (p.37)

 

소년들의 표정은 기묘한 것이었다. 힘차게 보이는가 하면 축 처져 보이기도 했다. 가라앉아 보이는가 하면 쾌활하게도 보였다. 처음 그 느낌이 뭔지 잡아낼 수가 없었지만 머지않아 분명히 이해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동정심을 느꼈다. 소년들의 얼굴에는 아무런 난해함이 없었던 것이다. 보는 내 마음이 어지러웠던 것뿐이다. 그들의 얼굴은 그저 어린아이의 얼굴에 불과했다. 진정 어려운 경우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어린아이의 마음과 얼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소년에게는 어른처럼 곤란에 대처하는 의지가 없다. 그 대신 곤란을 곤란으로 느끼지 않는 젊은 에너지가 있다. 희망 속에 사는 재능을 가지지 않는 대신 절망이라는 관념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재능도 없다. 그 천진난만함을 소년들의 얼굴에서 분명히 읽었을 때 나는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을 받았다. 아마 그들의 반항도 복종도 천진난만한 것이었으리라. 그와 달리 지도자들은 소년들을 지도하기는커녕 소년들에게 이끌려 다닌다. 결핍도 하나의 훈련이라는 어른의 낭만주의를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결코 이해하지 않는다.

 

여기에 어떤 이론이나 정세에도 흔들리지 않는 실제와 생활을 보려는 고바야시의 눈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결핍이나 곤란을 슬로건으로 이겨내려는 어른의 낭만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하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 이 훈련생들의 생존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바야시는 여기서도 자신의 비평 원리를 관통시키고 있다. 여타의 만주 기행과 달리 고바야시의 기행은 역사의 분기점을 확인하고 미래의 일본상을 투영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재 일본의 상황을 만들고 이해해온 논리적 지적 도덕적 전제들을 효력 정지시키는 방식으로 만주를 기록한다. 그것은 고바야시에게 1930년대 후반의 폭주하는 비상 상황을 견디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p.42-43)

 

이 책의 묘미 중 하나인데, 저자는 고바야시의 이론들을 하나하나 비평한다. 고바야시의 주장과 저자의 주장을 대입하면서 읽어나가며 나만의 독해를 하게 되는 과정을 겪은 뒤, 저자의 결론에서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이론이란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위대한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론을 비평하는 이들의 또 다른 이론이 나오는 것이니. 여하간 그런 상황에서 당시 일본의 한 이면을 엿본다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결국 우리(혹은 나만..)는 일제의 식민주의를 옹호하느냐 옹호하지 않느냐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세계관은 의미로 가득 차 있으며, 자명한 것이란 이미 언제나 의미를 통한 해석일 뿐이다. 따라서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의미를 벗어나야 한다. 인간이 의미를 붙잡아 현실을 해석하기에 의미를 제거하고 원래 인식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인식이란 이미 언제나 의미를 통과한 것이기에 의미로부터 벗어나는 도약 혹은 용기가 요청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가 이 에세이를 연합적군 사건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사실이다. 가라타니는 연합적군 사건 속에서 의미라는 질병의 극한 사례를 봤다. 그들에게 세계는 이념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던 것이기에, 곁에 있는 존재마저도 고유한 시간을 함께한 동료라기보다는 이념을 통해 평가하고 단죄해야 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가라타니는 여기서 현실의 혼돈, 즉 동료를 포함한 인간과 변혁 대상인 세계의 예측 불가능한 복잡함을 한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박적인 의미의 질병을 본 셈이다. (p.60-61)

 

위 대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건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의 흐름은 전세계적으로 흘러가는 이상함이 존재한다. 지금 새롭게 급부상한 극우들과 극단주의의 세력은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만이 아니다. 20세기부터 지구 내부의 국가들은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 걸까.

 

평화에 대한 범죄라는 법규범은 일본과 독일이 일으킨 전쟁을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범죄행위로 다뤘다. 그 범죄가 처벌되는 법규는 어느 나라의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것이었다. 그런 한에서 이 범죄는 키케로 시대부터 서양의 법사상에 익숙한 해적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키케로가 해적이란 어떤 권리도 의무도 없다고 했듯, 또 카를 슈미트가 인류에게 적은 없고 적을 철저하게 비인간으로 취급한다고 말했듯 인류의 평화를 침해한 범죄자는 인류 보편의 법정에서 단죄받는 해적이자 비인간으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인간 집단을 비인간으로서 규탄하고 비인간인 한에서 섬멸할 수 있다는 궁극의 전쟁을 내포한다.

이렇게 인류를 전제로 한 보편주의는 적을 범죄자로 취급하여 비인간으로서 추방하는 근원적인 섬멸전쟁으로 성립한다. 그런 한에서 일본 정부의 견해는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고 후자를 섬멸/추방하는 전쟁을 국가 안전보장으로 내새우는 것이다. 따라서 신안보법제는 보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뿌리내리던 섬멸전쟁을 체현하고 실현한다. 이런 사정에 비춰보면 전후 헌법과 민주주의를 저버렸다는 저항과 비판의 목소리는 보편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는 섬멸전쟁에 무지했다. (p.104)

 

박유하에 따르면 이들은 위안부 문제를 오랫동안 민주주의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어 피해 사례의 역사적 다양성을 모두 민족의 딸에 대한 모욕이란 서사로 환원했으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향한 일본 정부 및 일본 국민의 노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 맥락에서 박유하는 전후민주주의교육을 받고 그 안에서 자율적인 한 개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관료나 일반 국민의 선량한 마음을 무시했다고 규탄한다. 그것은 전후 대다수의 일본 국민을 일부 과격한 우익과 동일시하는 일이었으며, 그런 한에서 전후 일본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하는 원리주의적 비판을 휘두르는 도덕의 경직성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서 알 수 있듯,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박유하의 접근은 전후 일본에 대한 신뢰에 뿌리내리고 있다. 물론 이때 전후 일본이란 국민 대다수를 자율적으로 자립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한 개인으로서 길러내는 전후민주주의를 요체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소/고발 이후 역사학적인 실증이나 정치적 논쟁 수준에서 여러 논점이 제기되었지만, 박유하가 스스로의 입장을 흔들림 없이 유지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인식론적 전제가 여기 있다. 바로 일본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굳건한 신뢰 말이다. (p.109-110)

 

이 대목을 읽으며,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했다. 당시 박유하가 쓴 책 <제국의 위안부>는 이런 모욕적인 내용으로 고소당했고, 검색해 보니 몇 부분이 삭제된 채로 재출판된 것 같다. 저자는 박유하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일본 전후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드러낸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지만 우리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후 민주주의 또한 실패했으며, 그 실패를 굳건하게 믿고 있는 건 아닐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불과 1년 전에 이런 주장을 했으면 너무 과도한 걱정이라거나 혹은 무시할만한 의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은 이미 실패한 국가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 들어서서 그렇게 떠들어대던 최악이지만 최선이라는 민주주의, 그걸 굳건하게 믿는다는 지식인들은 여전히 방송에 나와 우리는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는 국가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서 위험할 수 있는, 어쩌면 상대방을 비판하고자하는 욕망일 수도 있는, 그런 말을 뱉고 싶다. 지금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파시즘으로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민주주의로 치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윤석열 정권이 탄생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법을 이용해서 공정과 상식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민주주의에게 신뢰를 느끼는 것처럼 법에도 신뢰를 느낀다. 하지만 민주주의건 법이건 아주 허약하다는 것을 2025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뼈저리게 느꼈다.

 

이것이 난바라가 생각한 전후민주주의다. 일본 민족이 스스로의 정신 함양을 통해 인류 보편 이념을 실현하고자 세계의 최전선에 서야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자유주의적 계약에 기초한 국가 구성 논리는 부정되어야만 한다. 대립이나 갈등이 잠재하는 정치제도를 잔존시켜서는 안 되고, 진정한 의미의 민족공동체 형성을 목표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족공동체 형성은 정치제도가 아니라 정신 함양에 뿌리내려야 한다. 정치제도는 아무리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라도 갈등과 반목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교육이 전후 개혁의 중심에 자리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황실을 국민통합의 중심에 놓고, 그렇게 통합된 국민이 인류 보편 이념을 실현할 사명을 깨닫고 떠맡으며, 교육이 곧 그 모든 과정이 이뤄지는 장으로 성립하는 일, 이렇듯 난바라의 전후 민주주의는 민족주의와 보편주의가 결합한, 그야말로 숭고하고 고결한 기획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난바라 개인의 인격적 완성이나 삶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민족주의와 보편주의의 결합은 식민주의와 섬멸전쟁으로 이미 침식되어 있었다. 난바라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가 말하는 민족주의와 보편주의는 야만과 해적이라는 비인간의 형상을 전제하는 법사상 계보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그렇다. 다음 난바라의 발언을 보자.

 

일본 국가 최고의 권위이자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천황제는 영구히 유지될 것이며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천황제는 우리나라의 긴 역사에서 민족 결합을 근원에서 지탱해왔고, 군주와 인민 양측의 세대가 거듭해도 군주주권/인민주권의 대립을 넘어선 군민일체라는 일본 민족공동체 불변의 본질입니다. 외지이종족이 떨어져나가 순수일본으로 되돌아온 지금, 이것을 상실한다면 일본 민족의 역사적 개성과 정신의 독립은 소멸할 것입니다.

 

난바라에게 천황제는 외지이종족이 떨어져나가 순수일본으로 되돌아온 지금.” 국민통합과 민족공동체의 근본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이런 발언이 천황제를 정점으로 성립한 식민주의에 대한 무지와 무책임의 발로라 비판하는 일은 손쉽다. 하지만 전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난바라가 아시아에 대한 책임을 주장했던 일을 상기한다면, 이 발언을 단순한 식민주의의 반복이며 무책임의 발로라고만 힐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더 근원적인 곳에 있다. 이 발언의 문제는 순수일본이 민족공동체로 재생되어야 한다고 할 때, 난바라에게 세계는 여러 민족의 국가들로 이뤄진 인류공동체로 사념된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p.133-134)

 

그러므로 난바라가 일본 민족을 인류라는 보편 이념을 선도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타민족도 모두 각자의 전통에 걸맞는 정신적 각성을 거쳐 보편 이념의 실현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필연적으로 아직 그런 민족통합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집단을 진보하지 못한‘, 이상적인 인류의 모습에서 탈각된 존재로 사념할 수밖에 없었다. 난바라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뜻이 아니다. 일본정신에 대한 그의 순수하고, 무구한 열정이 타자에 대한 악의 없는 배제를 필연적으로 불러온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형상은 아직 민족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여 인류의 이념을 떠안을 수 없는 외지이종족과 중첩된다. 이것이야말로 보편주의와 결합한 식민주의다. (p.137)

 

이후 저자는 레오폴트 2세의 콩고 지배의 명분을 진보로 잡고 야만을 구제하려 한다는 것을 사례로 든다. 또한 이어 2015년 안보법제 개정에서 아베 정권의 적극적 평화주의의 근원적으로 음산한 폭력을 드러낸다. 분명 최근 수년간 일본의 움직임은 극도로 수상했고, 아니 어쩌면 너무 분명했고, 여전히 세상은 끔찍함으로 가득하다. 보편이라는 것. 누군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말이 인류가 만든 가장 역겨운 말이라고 했다. 같은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보편과 특수(여기선 야만)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고결한 계획이었던 교육으로 이런 시선을 바꿀 수 있을까? 글쎄, 불과 5년 전이라면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연은 질서를 용납하지 않는다. 넓은 시선에서 인류 역사는 질서를 위해 억압한 쪽이 도덕 혹은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쪽이었다면, 20세기 이후 올바름을 내세우는 쪽이 도덕 혹은 윤리적인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결국 난바라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내세우는 올바름 안에는 저자가 드러낸 윤리적으로 큰 결함이 드러난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 윤리적으로 큰 결함은 더 이상 결함이 아니라 올바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곳엔 민주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큰 맥락에서 세 번째 주제인 혁명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특히 이토의 이야기나 요도호 납치 사건의 사례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옳고 그름을 떠나 혁명적 주장이라는 것이 음모와 스펙타클로 점철된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현실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결국 1960대에서 80년대를 거쳐 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난 뒤 현실에서 이 혁명은 끝을 맺는다. 다만 저자가 이 주제들로 비평을 전개한 것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가 포스트 3.11로 이어지면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이다. 저자는 극우주의자들이 승리의 함성을 쏟아내고 있다고 본다. 그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루야마가 내란의 픽션 상태를 마음에 품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아니, 한국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의 상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설립된 국가들 중 한국만큼 성장한 국가는 없다. 윤석열이 망가뜨린 민주주의는 어쩌면 민주주의의 실체이자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픽션의 상태를 가정하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져도 세상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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