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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불평등 - 시간의 자유는 어떻게 특권이 되었나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 창비 / 2024년 12월
평점 :
언제나 우리는 나무늘보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속도가 나의 속도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따라 사고가 형성되고 습관이 심어진다. 밥도 빨리 먹어야 하고, 잠도 덜 자야 한다. 더 많이 움직여야 하고, 그게 무엇이든 더 많이 생산해 내야 한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생산물까지 더 많이.
또한 하층계급이 노동을 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것은 유랑 혹은 게으른 방랑으로 비난받았고, 1531년의 최초의 「방랑법」통과로 이어졌다. 이 법률은 ‘게으름’을 “만악의 어머니”로 서술하고, 바랑죄를 지은 사람은 채찍질을 당하고 “노동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그 이후의 방랑법들은 더욱 보복적이었다. 가장 가혹한 것은 1547년에 통과된 것으로 첫 번째 ‘위반’을 하면 V자 낙인을 찍고 2년간 강제 노동에 처하며, 두 번째 위반을 하면 사형했다. 겨우 몇 년 사이에 10만명 이상이 교수형을 당했다. 인구의 대부분은 노동을 ‘원하도록’ 강요당했다. 노동을 원한다는 것은 분명 자연적인 인간의 충동은 아니었다. (p.63)
저자의 주장처럼, 우리는 세뇌당했다. 요즘은 누구를 만나더라도 퇴사를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일을 하지 않고 먹고살 수 있을지 고민한다. 나는 특별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는데 특별한 일은커녕 내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노예 상태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이런 생각을 이야기하면 한편에서는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들의 입장에선 노동이 숭고한 걸까. 아니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먹고살려면 일(책의 주장대로라면 노동)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일까. 그들은 정말 평생 사용자의 지시를 받아 혹은 스스로 사용자가 되어 노동을 하고 싶은 걸까.
‘노동’이라는 마릐 기원은 노동이 피해야 할 어떤 것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노동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어 포노스는 고통과 노고를 의미했으며, 가난이라는 뜻의 페니아와 유사한 어원적 뿌리를 가졌다. 노동은 가난이라는 조건에서 수행되는 고통스럽고 힘든 활동을 의미했다. (p.24)
얼마 전에 노동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 그러면 노동을 할 시간이 주어지면 뭘 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 안에는 명백히 인간이 노동을 하지 않고 할 게 많은 건지 의문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 책을 읽은 덕분에 노동이 아니라 일을 하고 살 거라고 이야기했다.
노동시간이 주 40시간으로 주어지는 현재와 어떻게든 아득바득 프리랜서로 먹고살던 주 20시간 내외의 최근 몇 년 동안 나의 삶에서 중요한 건 일이었다. 나에겐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되는대로 일에 내 시간을 투자한다. 오죽하면 시간 확보를 위해 졸업 당시 취업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겠는가. 아직도 마찬가지다. 현재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기회만 주어진다면 회사를 퇴사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
일자리를 갖는 것이 심지어 자유와 같은 것이 되었는데, 이는 노벨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 취한 입장이기도 하다. 일자리를 갖지 못한 것은 ‘존엄성’의 부정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이코노미스트』의 ‘바틀비’는 말한다. “궂은일이라는 생각은 일자리를 갖는 게 존엄성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흐린다.” 그러나 부유한 논평가들이 하는 주장, 즉 불쾌한 일일지라도 일자리가 존엄성을 부여한다는 주장은 역겹다. (p.208)
그래서 이 책이 반가웠다. 시간 불평등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느끼던 중요한 논점이다. 물론 책의 원제는 시간 정치라고 하지만. 자본의 불평등보다 시간 불평등이 훨씬 나에겐 중요한 문제다. 물론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구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졸업 작품을 준비할 때 누구는 해외여행을 가고 졸업작품 비용도 부모가 지원해 준다. 그래놓고는 앞에서 졸작을 위해 힘들었다고 말한다. 가소로웠다. 가난을 전시하고자 하는 욕망일지언정 그 정도 말은 이 불평등한 사회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걸 시기나 혹은 질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불평등을 공고히 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짓눌리는 사회를 만드는 데 조력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분노. 이 분노는 어쩌면 내 삶의 방향성을 정해준 어떤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전환적 정치에는 공동의 적대자에 대한 계급 기반의 분노, 가치 있는 어떤 것의 상실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 더 나은 미래의 전망에 관한 명확한 표현 등의 조합이 필요하다. 분노는 불의와 부당한 불평등에 대한 지각에서 나온다. 그러한 의식이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지려면 명확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일부 불의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알게 되면 대중의 불만으로 이어진다. (p.369)
자본주의 시대의 불평등을 야기하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 시스템을 많이 이야기했다. 아직 우리나라는 그곳에 서있다. 아니, 어쩌면 윤석열로 인해 50년을 후퇴한 민주주의처럼 우리 경제는 고꾸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건 두고 봐야 할 문제지만 여하간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던 그 시절로부터 아직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주 52시간이 도입된 지 벌써 6년 남짓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착취의 시스템이다.
휴가는 에너지를 보충하고, 개인적 관계와 가족관계를 강화하고 노동으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회복하고, 더 넓은 사회적 전망을 줄 가능성이 있다. 휴가의 축소는 건강을 악화한다. 미국 질명통제예방센터는 휴가가 거의 없는 여성은 관동맥성 심장병이 생길 가능성이나 심장마비가 올 가능성이 매년 최소한 두차례 휴가를 가는 사람보다 8배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위험의 심장질환이 있는 1만 2천명 이상의 남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언례 휴가를 가지 않는 사람은 언례 휴가를 가는 사람에 비해 모든 종류의 원인에 따른 사망 위험이 21퍼센트 더 높고, 심장마비로 사망할 위험이 32퍼센트 더 높다. (p.214)
나도 휴가를 가지 않았었다. 간단했다. 프리랜서는 그런 휴가란 항상 불안요소였으니까. 혹시라도 일이 끊길 수도 있었고, 휴가를 가게 될 경우 일당은 끊겼다. 우리 사회는 휴가에 관해 논할 수 있는 사회일까. 아직 거기까지 못 가지 않았을까. 이 책에서는 영국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역시 선진국이라고 해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재택근무와 주 4일제를 거쳐서 기본소득을 논하고 있는 장에 들어섰을 때는 부러움이 밀려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 기본소득을 주장하던 이재명 대표는 기본소득 철회를 논의하고 있다. 분하고 억울하다. 만약 기본소득이 있는 사회라면 어쩌면 내 삶도 더 열정적이고 즐거움이 넘쳐나지 않았을까. 물론 그 또한 알 수는 없다.
프레카리아트화된 정신은 또한 청원자가 된다는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대부분이 프레카리아트로 구성된 예술가 공동체에서 심한데, 프로젝트를 위해 자금 제공 기관에 지원하는 데 의존하기 때문이다. 지원 및 전체 과정이 예술가들을 청원자로 바꾸고, 일시적인 꿈과 희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문화 관련 관료들에게 청원을 한다. 이 꿈과 희망은 많은 경우 예술가 내부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라 관료들에게 팔기 위한 것이다. (p.237)
이 책을 읽다 보면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나름 진보적인 나조차도 반성하게 만드는 주장들. 위 문단이 그러하다.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서류 작업을 하면서 매번 생각한다. 심사하는 사람들이 항상 좋은 작품을 선보인 것도 아니고, 그들의 자질을 의심할 때도 많다. 무엇보다 시간을 엄청나게 쏟아야 하는 서류들이다. 그 정도 지원을 받으려면 당연히 서류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매번 불만이었다. 작품은 작품으로만 봐야지 적어 낼 게 너무나도 많다. 도대체 부가 서류들은 왜 내는 걸까.
이건 저자가 주장하는 다른 국가 지원 사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업급여를 받거나 취업지원을 받을 때 너무 많은 시간을 쏟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돈을 받으려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는데 내가 안일한 것이었다. 이 또한 불평등하다는 걸 저자가 일깨워 줬다.
일자리 보장 정책은 가부장주의적일 것이다. (중략) 그리고 일자리 보장 지지자들은 훈련도 받지 않고 십중팔구 보장된 일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급여를 상실하게 되어 분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나이 든 친척이 사회적 돌봄을 받는 것을 진짜로 원하는가? (p.344)
그들은 수백만명이 가질 것이라고 예상되는 일자리에서 자신이나 친구들이 일하기를 바라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좋은 급료와 좋은 노동조건의 괜찮은 일자리를 갖길 바란다고 그들이 응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일자리가 생래적으로 시시하고 따분하며 따분하게 만들고, 그런 일을 수행하도록 밀어 넣어지거나 유도된 사람들의 시간을 잡아먹고, 그런 다음 물질적 궁핍의 공포로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p.358)
결국 우리 사회의 윤리다. 나와 남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내가 싫은 건 남도 싫다는 걸 인식하기. 차별하지 않는 것. 자본주의 논리는 차별과 혐오를 지속적으로 생산한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은 젊었을 때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노년을 보내는 거라는 역겨운 말들. 그들이 베트남 참전 용사였는지, 공부를 잘했는지, 혹은 어떻게 삶을 살았는지 알고 그런 말을 내뱉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한 가지를 지적한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가 잠도 자지 않고 하루 24시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대한민국 TOP10에 들 수 있는 부자가 될 수 있는가.
2001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포르투갈, 에스파냐에서 이루어진 유고브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분의 2가 기본소득을 지지했으며, 모든 나라에서 다수였다. 응답자가 생각하기에 기본소득이 어떤 이점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공통된 대부분의 대답은 분노를 줄인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본소득 혹은 보장소득이 분노와 정신적 불건강을 줄인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준 실험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p.404)
희망. 누구나 부자가 되진 않아도 누구나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가 올 수 있다는 희망. 어쩌면 이 책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에서 시작되어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반성을 부여했고, 공감과 연대를 지나쳐서 희망을 건넸다.
나는 해방이라는 위대한 고전적 담론을 버리는 것을 거부한다. - 자크 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