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패배의 기록 - 전후 일본의 비평, 민주주의, 혁명
김항 지음 / 창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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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받았을 때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던 것부터 고백해야겠다. 기대했던 내용과는 상이한 전개에 속으로 큰일났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과연 내가 서평을 성공적으로 쓸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앞섰다. 하지만 의외로 어렵게 느껴지던 몇 페이지를 지나자 술술 읽혔고, 무엇보다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어나갔다. 일본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비평으로 읽을 수 있지만 첫 챕터인 비평의 비평이나, 여러 의견들을 비평하는 것은 2차 문헌과도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주 개인적인 의견으로 책을 읽어나갔던 인상을 살펴보면,

 

1. 잘 알지 못했던 일본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재미. 그러니까 1930년대의 이토 이야기라던가, 일본의 공산당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는 내용이어서 더더욱 흥미로웠다. 그 시절을 이야기할 때면 군국주의자 일본, 징병, 위안부 문제, 2차 세계 대전으로 휩쓸려가는 상황 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1930년대의 일본의 공산당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들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2. 걸출한 일본의 비평가들을 2차 비평하는 것 또한 흥미로웠는데, 저자의 탁월한 식견 뿐만 아니라 이 내용이 현재 일본을 넘어서서 동아시아 문제로까지 이어서 생각할 수 있다는 점.


3.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 전후 민주주의의 실태를 바라보며 작금의 대한민국을 반추할 수 있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안전한가. 아니, 안전은커녕 사실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오히려 제국주의의 탐욕을 버리지 않은 일본보다도 지금 우리는 더 큰 질병에서 허덕이고 있다. 많은 것들이 중첩되어 보이고, 연결고리에 묶여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옛사람은 가만히 풍경을 보며 꿈꾸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의연한 산하가 싫증나 마음속 풍경을 마음대로 바꿔 그리고 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 바뀐 풍경이 눈앞에 있다. 우리도 옛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풍경을 보기는 본다. 옛사람보다 아마 더 가만히 앉아 있을 터인데, 이상하게도 앉아 있는 의자가 1초에 100미터의 속도로 움직인다. 창밖의 풍경은 현실임에 틀림없지만 사람은 꿈꾸는 것과 동일한 심리 상태가 아니면 어떻게 이 이상한 모습으로 변한 현실을 견딜 수 있을까? 묘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그야말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자동차에 타야 한다. 꿈에서 깰 순간 따위는 없는 것이다. (...) 덕분에 우리는 자기 힘으로 꿈을 창조하는 행복도 용기도 인내도 잃어버렸다."

 

이것이 고바야시가 본 근대적 삶의 근본 조건이다. 현실을 꿈꾸듯 살아야만 하는 현대인에게 불안은 객관적 정세 변화에 따라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삶의 근원 조건이라는 것이다. 고바야시는 도사카의 비판에 답하면서 정세에 좌지우지되는 불안에 맞서 현대적 삶의 근원적 조건으로서의 불안을 대립시킨다. 따라서 고바야시가 말하는 건전한 상식이란 도사카가 호들갑스럽게 조장하는 정세 불안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불안을 삶의 근원적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꿈같은 현실을 감내하는 정신의 태도다. (p.34-35)

 

그런데 근대 일본 작가들에게 북방으로의 여행은 단순한 이국체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으로 성립한 근대 일본의 발자취를 몸으로 확인하는 여정이었으며, 이국이지만 이국이 아닌, 동시에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닌, 기묘한 회색지대로 진입하는 모험이었다. 어떤 이는 그 과정에서 근대 일본이 상실한 전근대적 생활상을 발견하고는 노스탤지어에 젖었고, 어떤 이는 이주 일본인의 강인한 생활력에 감탄하며 조국의 저력을 확인했으며, 어떤 이는 자만에 빠진 일본인이 현지인에게 자행하는 차별과 멸시를 부끄러워했다. (p.37)

 

소년들의 표정은 기묘한 것이었다. 힘차게 보이는가 하면 축 처져 보이기도 했다. 가라앉아 보이는가 하면 쾌활하게도 보였다. 처음 그 느낌이 뭔지 잡아낼 수가 없었지만 머지않아 분명히 이해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동정심을 느꼈다. 소년들의 얼굴에는 아무런 난해함이 없었던 것이다. 보는 내 마음이 어지러웠던 것뿐이다. 그들의 얼굴은 그저 어린아이의 얼굴에 불과했다. 진정 어려운 경우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어린아이의 마음과 얼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소년에게는 어른처럼 곤란에 대처하는 의지가 없다. 그 대신 곤란을 곤란으로 느끼지 않는 젊은 에너지가 있다. 희망 속에 사는 재능을 가지지 않는 대신 절망이라는 관념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재능도 없다. 그 천진난만함을 소년들의 얼굴에서 분명히 읽었을 때 나는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을 받았다. 아마 그들의 반항도 복종도 천진난만한 것이었으리라. 그와 달리 지도자들은 소년들을 지도하기는커녕 소년들에게 이끌려 다닌다. 결핍도 하나의 훈련이라는 어른의 낭만주의를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결코 이해하지 않는다.

 

여기에 어떤 이론이나 정세에도 흔들리지 않는 실제와 생활을 보려는 고바야시의 눈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결핍이나 곤란을 슬로건으로 이겨내려는 어른의 낭만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하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 이 훈련생들의 생존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바야시는 여기서도 자신의 비평 원리를 관통시키고 있다. 여타의 만주 기행과 달리 고바야시의 기행은 역사의 분기점을 확인하고 미래의 일본상을 투영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재 일본의 상황을 만들고 이해해온 논리적 지적 도덕적 전제들을 효력 정지시키는 방식으로 만주를 기록한다. 그것은 고바야시에게 1930년대 후반의 폭주하는 비상 상황을 견디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p.42-43)

 

이 책의 묘미 중 하나인데, 저자는 고바야시의 이론들을 하나하나 비평한다. 고바야시의 주장과 저자의 주장을 대입하면서 읽어나가며 나만의 독해를 하게 되는 과정을 겪은 뒤, 저자의 결론에서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이론이란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위대한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론을 비평하는 이들의 또 다른 이론이 나오는 것이니. 여하간 그런 상황에서 당시 일본의 한 이면을 엿본다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결국 우리(혹은 나만..)는 일제의 식민주의를 옹호하느냐 옹호하지 않느냐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세계관은 의미로 가득 차 있으며, 자명한 것이란 이미 언제나 의미를 통한 해석일 뿐이다. 따라서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의미를 벗어나야 한다. 인간이 의미를 붙잡아 현실을 해석하기에 의미를 제거하고 원래 인식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인식이란 이미 언제나 의미를 통과한 것이기에 의미로부터 벗어나는 도약 혹은 용기가 요청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가 이 에세이를 연합적군 사건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사실이다. 가라타니는 연합적군 사건 속에서 의미라는 질병의 극한 사례를 봤다. 그들에게 세계는 이념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던 것이기에, 곁에 있는 존재마저도 고유한 시간을 함께한 동료라기보다는 이념을 통해 평가하고 단죄해야 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가라타니는 여기서 현실의 혼돈, 즉 동료를 포함한 인간과 변혁 대상인 세계의 예측 불가능한 복잡함을 한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박적인 의미의 질병을 본 셈이다. (p.60-61)

 

위 대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건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의 흐름은 전세계적으로 흘러가는 이상함이 존재한다. 지금 새롭게 급부상한 극우들과 극단주의의 세력은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만이 아니다. 20세기부터 지구 내부의 국가들은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 걸까.

 

평화에 대한 범죄라는 법규범은 일본과 독일이 일으킨 전쟁을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범죄행위로 다뤘다. 그 범죄가 처벌되는 법규는 어느 나라의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것이었다. 그런 한에서 이 범죄는 키케로 시대부터 서양의 법사상에 익숙한 해적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키케로가 해적이란 어떤 권리도 의무도 없다고 했듯, 또 카를 슈미트가 인류에게 적은 없고 적을 철저하게 비인간으로 취급한다고 말했듯 인류의 평화를 침해한 범죄자는 인류 보편의 법정에서 단죄받는 해적이자 비인간으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인간 집단을 비인간으로서 규탄하고 비인간인 한에서 섬멸할 수 있다는 궁극의 전쟁을 내포한다.

이렇게 인류를 전제로 한 보편주의는 적을 범죄자로 취급하여 비인간으로서 추방하는 근원적인 섬멸전쟁으로 성립한다. 그런 한에서 일본 정부의 견해는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고 후자를 섬멸/추방하는 전쟁을 국가 안전보장으로 내새우는 것이다. 따라서 신안보법제는 보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뿌리내리던 섬멸전쟁을 체현하고 실현한다. 이런 사정에 비춰보면 전후 헌법과 민주주의를 저버렸다는 저항과 비판의 목소리는 보편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는 섬멸전쟁에 무지했다. (p.104)

 

박유하에 따르면 이들은 위안부 문제를 오랫동안 민주주의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어 피해 사례의 역사적 다양성을 모두 민족의 딸에 대한 모욕이란 서사로 환원했으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향한 일본 정부 및 일본 국민의 노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 맥락에서 박유하는 전후민주주의교육을 받고 그 안에서 자율적인 한 개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관료나 일반 국민의 선량한 마음을 무시했다고 규탄한다. 그것은 전후 대다수의 일본 국민을 일부 과격한 우익과 동일시하는 일이었으며, 그런 한에서 전후 일본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하는 원리주의적 비판을 휘두르는 도덕의 경직성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서 알 수 있듯,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박유하의 접근은 전후 일본에 대한 신뢰에 뿌리내리고 있다. 물론 이때 전후 일본이란 국민 대다수를 자율적으로 자립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한 개인으로서 길러내는 전후민주주의를 요체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소/고발 이후 역사학적인 실증이나 정치적 논쟁 수준에서 여러 논점이 제기되었지만, 박유하가 스스로의 입장을 흔들림 없이 유지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인식론적 전제가 여기 있다. 바로 일본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굳건한 신뢰 말이다. (p.109-110)

 

이 대목을 읽으며,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했다. 당시 박유하가 쓴 책 <제국의 위안부>는 이런 모욕적인 내용으로 고소당했고, 검색해 보니 몇 부분이 삭제된 채로 재출판된 것 같다. 저자는 박유하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일본 전후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드러낸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지만 우리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후 민주주의 또한 실패했으며, 그 실패를 굳건하게 믿고 있는 건 아닐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불과 1년 전에 이런 주장을 했으면 너무 과도한 걱정이라거나 혹은 무시할만한 의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은 이미 실패한 국가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 들어서서 그렇게 떠들어대던 최악이지만 최선이라는 민주주의, 그걸 굳건하게 믿는다는 지식인들은 여전히 방송에 나와 우리는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는 국가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서 위험할 수 있는, 어쩌면 상대방을 비판하고자하는 욕망일 수도 있는, 그런 말을 뱉고 싶다. 지금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파시즘으로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민주주의로 치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윤석열 정권이 탄생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법을 이용해서 공정과 상식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민주주의에게 신뢰를 느끼는 것처럼 법에도 신뢰를 느낀다. 하지만 민주주의건 법이건 아주 허약하다는 것을 2025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뼈저리게 느꼈다.

 

이것이 난바라가 생각한 전후민주주의다. 일본 민족이 스스로의 정신 함양을 통해 인류 보편 이념을 실현하고자 세계의 최전선에 서야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자유주의적 계약에 기초한 국가 구성 논리는 부정되어야만 한다. 대립이나 갈등이 잠재하는 정치제도를 잔존시켜서는 안 되고, 진정한 의미의 민족공동체 형성을 목표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족공동체 형성은 정치제도가 아니라 정신 함양에 뿌리내려야 한다. 정치제도는 아무리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라도 갈등과 반목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교육이 전후 개혁의 중심에 자리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황실을 국민통합의 중심에 놓고, 그렇게 통합된 국민이 인류 보편 이념을 실현할 사명을 깨닫고 떠맡으며, 교육이 곧 그 모든 과정이 이뤄지는 장으로 성립하는 일, 이렇듯 난바라의 전후 민주주의는 민족주의와 보편주의가 결합한, 그야말로 숭고하고 고결한 기획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난바라 개인의 인격적 완성이나 삶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민족주의와 보편주의의 결합은 식민주의와 섬멸전쟁으로 이미 침식되어 있었다. 난바라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가 말하는 민족주의와 보편주의는 야만과 해적이라는 비인간의 형상을 전제하는 법사상 계보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그렇다. 다음 난바라의 발언을 보자.

 

일본 국가 최고의 권위이자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천황제는 영구히 유지될 것이며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천황제는 우리나라의 긴 역사에서 민족 결합을 근원에서 지탱해왔고, 군주와 인민 양측의 세대가 거듭해도 군주주권/인민주권의 대립을 넘어선 군민일체라는 일본 민족공동체 불변의 본질입니다. 외지이종족이 떨어져나가 순수일본으로 되돌아온 지금, 이것을 상실한다면 일본 민족의 역사적 개성과 정신의 독립은 소멸할 것입니다.

 

난바라에게 천황제는 외지이종족이 떨어져나가 순수일본으로 되돌아온 지금.” 국민통합과 민족공동체의 근본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이런 발언이 천황제를 정점으로 성립한 식민주의에 대한 무지와 무책임의 발로라 비판하는 일은 손쉽다. 하지만 전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난바라가 아시아에 대한 책임을 주장했던 일을 상기한다면, 이 발언을 단순한 식민주의의 반복이며 무책임의 발로라고만 힐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더 근원적인 곳에 있다. 이 발언의 문제는 순수일본이 민족공동체로 재생되어야 한다고 할 때, 난바라에게 세계는 여러 민족의 국가들로 이뤄진 인류공동체로 사념된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p.133-134)

 

그러므로 난바라가 일본 민족을 인류라는 보편 이념을 선도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타민족도 모두 각자의 전통에 걸맞는 정신적 각성을 거쳐 보편 이념의 실현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필연적으로 아직 그런 민족통합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집단을 진보하지 못한‘, 이상적인 인류의 모습에서 탈각된 존재로 사념할 수밖에 없었다. 난바라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뜻이 아니다. 일본정신에 대한 그의 순수하고, 무구한 열정이 타자에 대한 악의 없는 배제를 필연적으로 불러온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형상은 아직 민족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여 인류의 이념을 떠안을 수 없는 외지이종족과 중첩된다. 이것이야말로 보편주의와 결합한 식민주의다. (p.137)

 

이후 저자는 레오폴트 2세의 콩고 지배의 명분을 진보로 잡고 야만을 구제하려 한다는 것을 사례로 든다. 또한 이어 2015년 안보법제 개정에서 아베 정권의 적극적 평화주의의 근원적으로 음산한 폭력을 드러낸다. 분명 최근 수년간 일본의 움직임은 극도로 수상했고, 아니 어쩌면 너무 분명했고, 여전히 세상은 끔찍함으로 가득하다. 보편이라는 것. 누군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말이 인류가 만든 가장 역겨운 말이라고 했다. 같은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보편과 특수(여기선 야만)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고결한 계획이었던 교육으로 이런 시선을 바꿀 수 있을까? 글쎄, 불과 5년 전이라면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연은 질서를 용납하지 않는다. 넓은 시선에서 인류 역사는 질서를 위해 억압한 쪽이 도덕 혹은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쪽이었다면, 20세기 이후 올바름을 내세우는 쪽이 도덕 혹은 윤리적인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결국 난바라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내세우는 올바름 안에는 저자가 드러낸 윤리적으로 큰 결함이 드러난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 윤리적으로 큰 결함은 더 이상 결함이 아니라 올바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곳엔 민주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큰 맥락에서 세 번째 주제인 혁명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특히 이토의 이야기나 요도호 납치 사건의 사례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옳고 그름을 떠나 혁명적 주장이라는 것이 음모와 스펙타클로 점철된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현실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결국 1960대에서 80년대를 거쳐 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난 뒤 현실에서 이 혁명은 끝을 맺는다. 다만 저자가 이 주제들로 비평을 전개한 것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가 포스트 3.11로 이어지면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이다. 저자는 극우주의자들이 승리의 함성을 쏟아내고 있다고 본다. 그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루야마가 내란의 픽션 상태를 마음에 품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아니, 한국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의 상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설립된 국가들 중 한국만큼 성장한 국가는 없다. 윤석열이 망가뜨린 민주주의는 어쩌면 민주주의의 실체이자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픽션의 상태를 가정하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져도 세상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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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국의 노동자들 - 노동인권 변호사가 함께한 노동자들의 법정투쟁 이야기
윤지영 지음 / 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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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단숨에 읽고 느낀 첫인상은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아름답다고 느낀 나조차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있었다. 도대체 뭐가 아름다웠던 것일까. 어쩌면 내가 느낀 아름다움이라는 인상이 이 세상을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2014년에 나는 처음으로 영화 스태프로 일을 하게 되었다. 노동 문제에 관심이 생긴 것은 그때부터였다. 내가 느끼는 가장 큰 노동 문제는 딱 하나였다. 구조. 내가 말하는 구조라는 것은 피용자가 일을 하면 사용자가 가져가는 구조를 말한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피용자는 정해진 금액을 가져가는 반면에 사용자는 피용자가 일을 더 하는 만큼 가져간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피용자가 가져가는 금액에 비해 일을 너무 많이 한다. 그 기준을 어떻게 아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법정으로 혹은 계약서 상에서 정한 시간당 임금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또한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이름 아래.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이 구조가 폭넓게 잔인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피용자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외주, 파견, 비정규직 등등의 이름 아래. 우리는 종종 법은 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대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겪은 세상은 법에 구멍이 있을 뿐 법을 만든 사람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 거 같다. 난 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무지한 내가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어쩌면 주제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회에서 입법이 되는 과정이나 그 과정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법은 누군가를 보호하거나 제한할 필요가 있어서 만드는 것 아닌가. 노동법도 그러하다. 법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용자의 권리 또한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용자와 피용자가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다. 대등하지 않다고 반박할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나도 대등하지 않다고 느끼지만, 책에서도 나와있듯이 법은 대등한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야기했던 말로 기억한다. 사용자와 피용자의 평화 관계란 비극이다. 사용자와 피용자는 끊이질 않는 긴장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관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에서 지향하는 대등한 관계도, 사회학자가 말하는 긴장 관계도 우리 사회는 허락하지 않는다. 갑과 을. 그건 단순히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권력관계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안다. 노동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의 행사는 파업이다. 하지만 파업은 엄청난 법적 책임이 따른다는 걸 책에서 엿볼 수 있다. 심지어 노조 자체가 없어서 파업을 할 수가 없는 직업들도 많다. 첫 번째 사례인 아파트 경비원은 당장 해고가 두려운 파리 목숨 같은 존재고, 두 번째 사례인 핸드폰 판매 노동자는 파업은커녕 빚 같지도 않은 빚(또 열받는데..)을 갚기 위해 노동을 멈출 수 없다. 방송국의 실태를 어느 정도 아는 나로서 세 번째 사례의 경우 정말 참담했다. 네 번째 사례의 경우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번째 사례를 제외하고 보면 모두가 단번에 이해된다. 욕망. 크게 보았을 때 사용자와 피용자의 관계가 만들어낸 계급 구조에서 인간의 욕망이 일으킨 파국이다. 첫 번째 사례는 권력의 폭력적 남용, 두 번째 사례는 금전 착취, 세 번째 문제는 돈과 권력이 함께 얽힌 일이었고, 다섯 번째 사례는 역시 돈, 여섯 번째 사례는 권력, 일곱 번째 사례는 돈, 여덟 번째 사례는 권력, 아홉 번째 사례는 굉장히 독특한 케이스인데 법 자체가 계급 구조(내국인과 외국인의 관계)를 옹호하고 있는 사례다. 열 번째와 열한 번째 사례 또한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네 번째는 사건의 본질을 알기가 쉽지 않았다. 정년을 앞당긴 것은 회사의 금전적 이익 때문일까? 근속이 쌓일수록 퇴직금 등의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것이 이유였을까? 여성 노동 문제에서 등장하는 유리천장은 이해할 수 있다. 기업이 주장하는 의견에 동의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만 정년을 앞당기는 것은 어떤 이익을 위한 것인지 잘 납득되지 않는다. 단순히 가부장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뿌리 깊은 어떤 혐오에 의한 상황이었을까.

 

여하간 위 사례들 대부분은 구조가 만들어 낸 권력관계에서 사용자의 이익을 위해 피용자가 착취당한 사례들이다. 사용자가 기업으로 대표되는 사례가 아닌 경우는 그들이 법을 공부해서 법의 구멍을 찾아 악행을 저지른 건 아닐 것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사용자와 피용자의 관계를 느꼈을 것이고, 그 권력 구조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지했음이 분명하다. 사용자가 기업이라면 법의 구멍을 너무 잘 알고 그 구멍을 파고들어 권력의 우위를 선점했음이 분명하다.

 

내가 아름다움을 느낀 이유는 윤지영 변호사가 피용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 그러니까 피용자와 법의 사이를 벌려놓으려는 행위를 어떡해서든 막고, 노동자를 법 안으로 집어넣어 보호받을 수 있게 노력한 것이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기록 그 자체만으로 건져낼 수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있을 수 없는 곳에 카메라가 있을 때 종종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니까 최루탄이 난무하고 심지어 총알까지 날아다니는 그 현장에서 카메라가 가해자 쪽에 서있지 않고, 피해자 쪽에 서있을 때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왜 항상 비극에서 건져 올리는 것일까. 끝내 풀리지 않는 모순이겠지만 어차피 이 끔찍한 세상은 계속될 것이다. 그곳에서 아름다움을 건져올리는 이들을 응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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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 브레인 - 우리 몸과 마음을 컨트롤하는 제2의 뇌, ‘장(腸)’
에머런 마이어 지음, 서영조 외 옮김 / 레몬한스푼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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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나의 독서 분야는 소설이나 인문학, 예술, 철학 등에 속해있다. 자기개발서는 10년 넘게 한 권도 읽은 적이 없고,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받는 사람의 에세이가 아닌 에세이는 읽지 않는다. 건강 서적도 물론 잘 읽지 않는다. 다만 건강 서적의 경우는 좀 다른데, 개인적으로 인간의 몸에 관심이 많아서 꼭 읽고 싶었던 분야다. 수면이나 인간의 근육, , 장의 경우는 항상 나의 관심사였지만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좋은 기회로 처음으로 장에 관한 책을 읽어 보았다. 수면이나 뇌과학의 경우 몇 권의 책을 읽었지만 다른 분야들처럼 계속 이어가진 못했다. 게다가 난 문과 출신이고, 과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 의학 관련 서적은 벅차다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분야에 어떤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어 나가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생각보다는 쉬웠으며, 저자의 주장이 정신분석학 분야의 책을 즐겨 읽는 나에게는 좀 반가운 면도 있어서 흥미롭게 읽어 나갔다.

 

교통체증으로 짜증이 나면, 뇌는 얼굴 근육에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특정 신호를 소화계에도 보낸다. 그러면 소화계 역시 극적으로 반응한다. 갑자기 끼어든 차 때문에 화가 났다면, 위는 격렬하게 수축하면서 위산을 더 많이 분비하며, 아침에 먹은 음식의 소화 작용을 늦춘다. 그동안 장은 뒤틀리면서 점액과 여러 소화액을 분비한다. 불안하거나 심란할 때도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패턴이 나타난다. 우울할 때는 장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사실, 장은 뇌에서 생기는 모든 감정을 거울처럼 비춘다. (p.45)

 

이 책의 주장이 신기한 것은 어쩌면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이나 언어 속에 묻어있는 것들을 전문가가 믿을 수 있게 이야기해 주는 것만 같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화가 난 채로 음식을 먹으면 체한다는 것은 모두가 어려서부터 들었던 말이지 않은가. 추운 날 밖에서 거리 음식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가. 하지만 신기한 건 다음 문단이다.

 

입사 면접을 앞두고 걱정하거나, 교통 체증에 갇혀서 잠깐 짜증이 나거나, 약속에 늦어서 마음이 급하고 불안한 경우의 장반응은 정상적이며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화, 슬픔, 되풀이되는 공포 같은 감정이 만성적으로 나타날 때는 그런 감정이 장과 장내 미생물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에 유념해야 한다. (p.69)

 

저자는 급성 스트레스는 이따금 우리 몸에 도움이 된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급성 스트레스가 반복되어서 만성 스트레스로 변화하면 그때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급성 스트레스가 몸에 좋을 수 있다는 것도 어쩌면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알고 있는 것 아닐까. 나는 3-4개월 단위로 일을 하는 프리랜서로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일의 강도는 무척 높았고, 잠을 못 자는 건 부지기수며 몸에 좋지 않은 음식도 많이 먹었다. 하지만 일을 하는 동안 아팠던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일을 마치고 난 다음 1-2주의 휴지기를 가질 때 아팠던 적이 많다. 몸이란 건 참 신기하다.

 

톡소포자충은 오직 한 장소에서만 번식할 수 있다. 바로 고양이의 위장관이다. 톡소포자충은 원치 않는 영향으로부터 뇌를 격리하고 보호하는 방화벽 역할을 하는 혈액뇌장벽을 속임으로써 인간을 포함한 모든 포유동물의 뇌에 침투할 수 있다.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고양이는 배설물을 통해 이 미생물을 몸 밖으로 내보낸다. 그래서 산부인과 의사는 임산부에게 고양이와 고양이 화장실을 접촉하지 말고, 고양이가 배설물을 흙 속에 묻을 수 있는 정원에도 가까이 가지 않도록 권고한다.

톡소포자충의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고양이가 톡소포자충이 든 배설물을 배설하면, 쥐가 그 배설물을 섭취한다. 그러면 그 기생충은 쥐의 몸 전체에서, 특히 뇌에서 둥그런 형태의 낭종을 형성한다. 다음에는 톡소포자충에 감연된 쥐를 고양이가 잡아먹는다. 소화된 낭종은 고양이의 위장관 안에서 번식하고, 고양이는 새로 부화한 기생충을 배설물로 배출하며, 이렇게 톡소포자충의 생명은 순환하며 계속된다.

여기서 이갸기가 흥미로운 방향으로 전환되며 이 미생물의 놀라운 영리함을 증명해준다. 정상적인 환경에서 쥐는 본능적으로 고양이를 피해 다니므로 톡소포자충은 감염된 쥐에서 고양이에게 되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쥐는 고양이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잃어버릴 뿐 아니라 고양이 소변 냄새가 나는 장소를 좋아하게 된다. (p.110-111)

 

굉장히 흥미로운 세균인데, 세균 자체가 번식을 위해 숙주의 뇌를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새겠지만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의 주인은 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그 유명한 이론이 이제는 프로이트가 주장한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실들로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뇌가 유년기의 불운한 경험에 반응해서 재정렬되며, 이 상태가 평생 지속될 수 있다는 걸 최초로 증명했다. (p.149)

 

나는 위 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이 책을 읽으면서 프로이트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많은 것들이 유아기에 결정된다고 믿었었고, 그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은 근거들을 살펴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장기들까지 유년기에 지배된다니!

 

예후다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후손이 성인이 되면 자신은 트라우마를 겪지 않았더라도 우울증, 불안,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등 정신질환을 겪을 위험이 크다는 획기적인 발견을 발표했다. 이후 몇몇 부가적 연구가 스트레스와 역경의 '세대간 전이'가 존재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9.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 건물에서 대피했던 사람들의 후손에 관한 연구나, 2차 세계대전 동안 네덜란드 기근으로 고통받았던 사람들의 후손에 관한 연구가 포함된다. (p.150)

 

더 놀라운 것은 위의 문단이었다. 우리의 어린 시절 가정 환경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걸까. 프로이트는 성인이 되었을 때 배우자마저 어린 시절에 결정된다고 믿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놀라운 것은 프로이트가 했던 주장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유년기에 결정된다는 게 밝혀지는 것이다. 위 문단은 후성 유전 문제인데, 경험이 유전에 기억되고 그 유전이 자식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난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것들이 대물림된다는 끔찍한 사실이다.


모체의 질내 미생물군은 태아의 장내 미생물군의 씨앗이 된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은 쥐들은 장에 유산균이 더 적은 새끼를 낳았다. 스트레스를 받은 어미 원숭이의 새끼가 장 속 유산균 수가 더 적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스트레스의 영향은 새끼의 장내 미생물 생태계와 뇌회로의 평생 지속될 구조가 형성되는 중대한 시기에 나타나므로 특히나 중요하다.

그러나 어미쥐의 스트레스는 새끼쥐의 장내 미생물에 영향을 미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새끼쥐의 뇌에도 영향을 미친다! 베일 연구팀은 새끼쥐의 장내 미생물이 생성하는 분자 혼합물을 분석했다. 그래서 새끼쥐의 뇌사 집중적으로 소비하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분자에 변화가 생겼으며, 빠르게 발달하는 뇌의 성장을 돕고 특정 뇌영역들 사이에 새로운 연결을 형성하는 아미노산 공급이 감소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p.159)

 

신생아의 장관에 질내 미생물군이 들어가야 아기가 건강한 삶을 시작할 수 있으므로, 과학자들은 제왕절개 분만이 아기의 미래 뇌 건강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지 연구하고 있다. 브라질이나 이탈리아 같은 일부 국가에서 자연분만보다 제왕절개술로 태어나는 아이들의 비율이 더 높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제왕절개술을 시행함으로써 질을 통해 정상적으로 장내 미생물 생태계를 아기에게 프로그래밍하는 것을 '건너뛰는'일이 뇌 발달에 미칠 장기적 영향은 아직 알지 못하지만, 지금은 제왕절개술로 태어난 아기의 장에는 어머니의 질내 미생물이 아니라 어머니의 피부, 산파, 의사, 간호사, 그리고 분만실의 다른 아기의 미생물이 서식한다는 사실과, 비피두스균 같은 중요 유익균이 장에 정착하는 데는 자연분만으로 태어난 아기보다 오래 걸린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 과학자들은 제왕절개술로 태어난 아이들은 뇌-장 축 변화와 자폐증을 포함한 심각한 뇌질환에 더 취약하다고 의심하고 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한 몇 가지 연구가 진행 중이다. (p.163)

 

이 책의 한계일 수 있는 지점은 연구가 아직 진행되지 않은 부분들을 추측한다는 것이다. 한계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실험들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제왕절개술을 시행함으로써 아기의 뇌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많은 어머니들은 고통받을 수도 있다.

 

알다시피 모든 스트레스가 나쁜 건 아니다. 만성적이거나 재발하는 스트레스와 달리 급성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각성상태는 시험을 치르거나 강연을 하는 등 어려운 과제를 수행할 때는 도움이 된다. 또한 장관감염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여 장 건강에 도움이 된다. 예컨대 스트레스 관련 뇌신호에 반응해서 위산 생성을 늘려 음식을 통해 침입한 미생물이 장에 도달하기 전에 사멸될 가능성을 높인다. 또한 장에 신호를 보내 체액 분비를 늘리고 병원균이 든 내용물을 배출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디펜신이라는 항균성 펩타이드 분비를 증가시킨다. 이 모든 반응이 위험할 수 있는 침입자로부터 위장관을 방어하고 감염 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것이다. (...) 급성 스트레스가 장과 장내 미생물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더라도 너무 자주 반복되면 골칫거리가 된다. 만성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다. (p.189)

 

장내 미생물 오케스트라는 노련한 음악가들로 꽉 차있고,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연주할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가 어떤 식단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뿐만 아니라 연주 실력도 결정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 교향곡의 지휘자다. (p.269)

 

저자는 유년기에 자리 잡은 미생물 생태계 시스템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 장에 자리 잡은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태계를 오케스트라로 비유했을 때, 우리는 지휘자가 되어 어떤 음악가들이 연주를 하게 할지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미생물 군들 중에서도 좋은 미생물들이 활동할 수 있게 우리가 우리의 생태계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방법으로 몇 가지를 제안한다.

 

장내 미생물의 다양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연 발효식품과 프로바이오틱스를 정기적으로 최대한 섭취하는 것.

동물성 지방을 줄이고, 가능하면 가공식품보다 유기농 식품을 선택하라. 이를 통해 장내 미생물이 염증을 일으킬 가능성을 낮춰라.

식사량을 줄여라. 특히 식사에서 고지방 식품을 제한하자.

태아의 영양상태에 주의를 기울이자.

스트레스를 줄이고, 내 몸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도록 훈련하자. (명상 등)

스트레스를 받거나 화가 났을 때, 슬플 때 음식을 먹지 말자.

음식의 은밀한 즐거움과 사람들과 함께 먹는 즐거움을 누리자.

자신의 직감에 귀를 기울이는 전문가가 되자.

 

결국 장은 제2의 뇌이며, 우리는 이 장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뇌에게 다양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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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 어느새 인간관계가 고장난 사람들에 관하여
맥스 디킨스 지음, 이경태 옮김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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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라는 제목에 이끌렸던 건, “왜 친구가 없을까가 아니라 남자는이라는 단어였을 것이다. 내가 남자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마도 아버지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 안에 무엇이 엉켜있는지 나도 잘 모르지만, 여하간 아버지라는 존재는 나에겐 아주 불쌍한 존재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좋았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타당한 이유는 있었다. 아버지랑 보낸 시간은 내 기억 속에 몇몇 단편적으로만 남아있고, 거의 모든 시간은 어머니와 함께 했다. 복잡한 가정사를 겪으며 내 안에 움튼 것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편을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아버지가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엄마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였다. 그때부터였을까. 남자라는 존재에 대해 궁금했던 것이.

 

거의 반쯤은 약 빨고 쓴 멘트들이 폭소를 터뜨리고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이 책의 서평의 시작이 너무 무거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뭐 어쩌겠는가. 솔직함밖에 방도는 없다. 여하간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은 그러했다. 내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아버지가 될 나이가 된 지금 나는 나의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 많은 여자들이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많은 남자들이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 한다). 프로이트는 말년에 여자들을 모르겠다고 선언했지만 20세기 초부터 여성 운동과 함께 이어진 수많은 여성에 관한 글과 이론들로 인해 여자들이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는 그 선언은 꽤 구체적으로 행동화되고 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남자들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고 느끼는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아니면 그런 선언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축구 보는 거랑 한잔하는 거랑 뭐가 달라?"

"축구 보는 건 목적이 있잖아. 그게 중요해. 근데 나는 만남의 이유가 없어. 그냥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이런 식으로는 연락 못하겠다고"

"왜 못해?"

".. 그냥.."

"그냥, ?"

"남자들의 방식이 아니거든." (p.44)

 

위의 이야기처럼 남자들의 방식이 명확하게 존재하는데, 이에 대해 바꿔야 한다는 외침이 있었던가? 혹은,

 

우리가 연락이 끊겼던 이유는 내가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이 만나자고 연락할 때면 내겐 항상 핑곗거리가 있었는데, 대개는 지어낸 것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무수한 생일 초대, 수백 번의 저녁이나 주말 외출 기회를 날려버렸다. 잔인한 진실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나의 결정이었고, 우정관계를 죽인 장본인이 바로 나라는 점이다. 나는 친구들에 대해 신경을 꺼버렸고,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p.55)

 

남자들이 관계에 대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던 주장이 있었던가? 무엇보다 아래 대목이 서글프다.

 

언젠가부터 나는 일이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도록 손놓고 지냈다. '경력'이라는 막연한 개념이 다른 거의 모든 것을 밀어내는 모습을 두고 봤다. 나는 항상 일했고, 에너지가 소진되어 생산성을 상실했을 때조차 일을 붙잡고 있었다. 일하지 않을 때에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터무니없게 들리겠지만 나는 자유시간을 갖는 법을 잊어버렸다. 내 삶은 오직 일 그리고 나오미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야망은 '내 자아'의 건강한 일부분이 아니었다. 데수치가 그 대화에서 사용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인간 그 자체라기보다는 '인간 행위'였다. (p56-57)

 

아버지는 항상 일했고, 집에 들어오면 항상 잤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식구들끼리 밥을 먹는 시간에도 아버지는 자면서 밥을 먹었다. 오래전부터 육아 휴직에 대한 사회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남자들의 육아 휴직은?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불쌍한 건, 아버지가 아이들과 보낼 시간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와 비슷한 수준의 큰 문제는 물론 표현 방식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부성애의 부재일까..?) 심지어 일을 마친 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 시간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쉰다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집에 들어가서 육아를 하는 게 벅찼고, 아이를 대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비슷하다. 사실 저자와 비슷하게도 나는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기나 강아지들과 놀아줄 때, 여자들이 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그런 말들을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오구오구, 그랬쪄, 아이 이뻐라 등..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어색하고 민망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말들까진 아니어도 아기들이나 강아지를 대할 때 조금씩 편해졌는데, 그건 아마도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법에 대해 배워서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텔이 내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을 복합성과 깊이를, 나오미에게는 보여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내 연기는, 다른 연기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또다른 연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의 남성성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내 머릿속엔 남자들은 서로를 더 부정적으로 만든다는 우울한 생각이 이어진다.(p.72)

 

그렇다, 남자들은 희한하게도 남자들끼리 있을 때는 죽어도 하지 못할 말과 행동을 여자와 있을 때는 한다. 정말 죽어도 하지 못할 그런 말과 행동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말과 행동이 나를 편안하게 할 때가 있다. 위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남성성이 내 안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 사이에 위치한 것이라는 통찰력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한 가지 떠올렸던 것은 나의 학창 시절인데, 남중 남고를 나온 나로서는 친구들을 첫 대면할 때는 항상 경계심이었던 것 같다. 그 경계심은 남학교의 서열 문화에서 온 것이 분명한데, 이는 벌써 15년이 지나도록 내 안에 자리매김하는 거 같다. 15년이 넘는 지금에서야 남자들과의 첫 만남에 경계심을 품지 않게 된 것도 같다.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 졸업 이후 군대를 제외하면 나는 남자인 친구와 여자인 친구들과 비슷한 시간을 보냈던 거 같고,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고 난 뒤부터는 남자와 보내는 시간이 상당히 줄었다. 이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난 친구가 인생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여하간 남자인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남자와 남자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내 안에서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눈에 띄는 점은 '유해한'남성성과 그 남성성의 '강하고 과묵한'전형성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말이 있다. 남자는 고통에 굴하지 않으며 항상 스스로를 통제한다. 여기서 '자기통제''감정 없음'과 동의어다. 하지만 감정이 분노일 경우에는 예외다. 분노는 남자들이 표현하도록 문화적으로 교육된 유일한 감정이며, 다른 모든 감정이 모아지는 '깔때기'이자 방출 밸브와 같다.(p.104)

 

"많은 남자들이 제게 같은 얘기를 해요. 그들은 애들이나 아내가 어떤 사건이나 뉴스 등을 접하며 감정표현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고는 '나도 그런 감정을 느끼면 좋겠다'고 바라죠.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남성들 자신에게도 슬픈 일이지만, 다른 이와의 관계에도 해가 돼요. 기쁨을 표현하고 좋은 소식을 공유하는 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중요한 요소거든요."(p.125)

 

우리는 어린 시절을 단편적으로 기억한다. 난 아직도 엄마의 몇몇 대사들을 명확하게 기억하는데, 그중 하나가 이 대사다. “나는 남자가 쫑알 쫑알대는 거 싫더라. 남자가 좀 과묵해야지.” 어떤 드라마를 보고 했던 말인데, 드라마는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초등학생 때로 기억하는데, 엄마의 이 대사를 듣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나는 좀 더 쫑알대는 남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좀 더 많은 연애를 하지 않았을까? 물론, 농담은 아니다. 그 과묵한 남성상이 내 안에 똬리를 튼 것일까. 나는 아홉 살 때도 엄마와 뽀뽀하지 않았다. 그것이 창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 이후로는 더욱더 심해졌다. 당시 버디버디 채팅하던 중 엄마가 내 채팅창을 본 뒤로 일주일 동안 엄마와 대화하지 않았다. 엄마는 담임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한 시간 동안 상담을 했다. 왜일까? 그게 너무 싫었다. 여자인 친구랑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창피하다고 느껴졌던 것 같다.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난 아직도 그때 내 채팅을 보고 싶어 하던 엄마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은 여자인 친구랑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치부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약간의 부끄러움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대화였고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여자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놀림거리가 될 수 있는 문제였다. 그건 어쩌면 남성 문화가 배척하는 무엇이지 않았을까?

 

"우리는 내가 혼자서도 충분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유지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한다. 어떤 이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존재라고 해도, 우리는 이 점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행동한다."(p.127)

 

그러면서 이어진 이미지는 고독함이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했기에 당연한 수순이었을까?

 

남성의 고립이 여성에게 더 많은 감정노동을 야기한다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여성들이 남친이나 남편과 동거하며 그들을 돌보는 심리치료사 같은 역할을 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자들에게는 함께 사는 여자 외에는 자신의 감정욕구를 충족시켜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p.154)

 

위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반문한다. 남자는 함께 사는 여자 외에는 자신의 감정 욕구를 충족시켜줄 사람이 없지만 여자는 무수히 많은 친구들의 감정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감정노동자가 되는 건 아닌가? 전반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바가 많았지만 친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 생각의 이면에는 무엇이 깔려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친구란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필요하다면 몇 명이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걸까? 사람의 성향마다 다를 텐데, 누군가는 한 명으로 충분할 것이고, 누군가는 열 명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같이 사는 여자 말고 친구가 필요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삶의 방식 중 하나는 온전히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많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그중 하나가 친구라고 생각한다. 친구가 있어야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문제를 논하려면 친구의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친구가 필수적이진 않다(고 생각 한다). 다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인맥이 필요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직장에서 좋은 친구를 사귄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앓고 있을 듯하다.(우정의 감정이 진심이라기보다는 선택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 생긴 유대감임을 의미-옮긴이) 이 말이 과장 같다면, 사람들이 퇴직한 뒤 얼마나 빨리 잊히는지 생각해보라. (p.274)

 

그렇기에 위 주장은 아주 적절하다. 다만 이 사회적 관계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 몇 명을 제외하고, 우리는 만남과 이별을 경험한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관계를 보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떠난 사람들은 기억 속에 머물게 하는 게 가장 아름답기도 하다. 그들을 다시 만나는 건 그들과의 기억 속 사진을 콜라주 하는 것과 같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땐 저자가 했던 일을 해야 하는 걸까?

 

모든 친구들의 스케줄이 공통으로 비어 있는 날을 기다리는 것은 하늘의 별들이 직선으로 정렬하는 기일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중년의 우정은 대부분 관리의 문제다. (p.409)

 

친구들과의 약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 그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이 책은 남자의 내면 깊숙하게 파고든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의 솔직함으로 표면적 현상들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어쩌면 그것만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문득 보관함에 넣어둔 벽돌 책 한 권을 읽어볼까 떠올려 본다. 90년대에 나온 남성들에 관해 아주 깊게 다룬 책이라던데..

 

이 재기 발랄한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는 커플들끼리 읽어보면 좋을 법하다. 아니다. 커플, 부부, 부녀 다 좋겠다. 물론 같이 읽을 때 남자들은 화끈거림을 감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화끈거림을 감수하고서라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MBTI는 사람의 성격을 분석하는데 적절한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MBTI가 유행처럼 번지고 난 다음 긍정적인 효과는 나와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도 그럴 것이다. 당신과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아주 유용한 시작이 될 것이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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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불평등 - 시간의 자유는 어떻게 특권이 되었나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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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우리는 나무늘보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속도가 나의 속도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따라 사고가 형성되고 습관이 심어진다. 밥도 빨리 먹어야 하고, 잠도 덜 자야 한다. 더 많이 움직여야 하고, 그게 무엇이든 더 많이 생산해 내야 한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생산물까지 더 많이.

 

또한 하층계급이 노동을 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것은 유랑 혹은 게으른 방랑으로 비난받았고, 1531년의 최초의 방랑법통과로 이어졌다. 이 법률은 게으름만악의 어머니로 서술하고, 바랑죄를 지은 사람은 채찍질을 당하고 노동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그 이후의 방랑법들은 더욱 보복적이었다. 가장 가혹한 것은 1547년에 통과된 것으로 첫 번째 위반을 하면 V자 낙인을 찍고 2년간 강제 노동에 처하며, 두 번째 위반을 하면 사형했다. 겨우 몇 년 사이에 10만명 이상이 교수형을 당했다. 인구의 대부분은 노동을 원하도록강요당했다. 노동을 원한다는 것은 분명 자연적인 인간의 충동은 아니었다. (p.63)

 

저자의 주장처럼, 우리는 세뇌당했다. 요즘은 누구를 만나더라도 퇴사를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일을 하지 않고 먹고살 수 있을지 고민한다. 나는 특별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는데 특별한 일은커녕 내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노예 상태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이런 생각을 이야기하면 한편에서는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들의 입장에선 노동이 숭고한 걸까. 아니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먹고살려면 일(책의 주장대로라면 노동)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일까. 그들은 정말 평생 사용자의 지시를 받아 혹은 스스로 사용자가 되어 노동을 하고 싶은 걸까.

 

노동이라는 마릐 기원은 노동이 피해야 할 어떤 것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노동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어 포노스는 고통과 노고를 의미했으며, 가난이라는 뜻의 페니아와 유사한 어원적 뿌리를 가졌다. 노동은 가난이라는 조건에서 수행되는 고통스럽고 힘든 활동을 의미했다. (p.24)

 

얼마 전에 노동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 그러면 노동을 할 시간이 주어지면 뭘 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 안에는 명백히 인간이 노동을 하지 않고 할 게 많은 건지 의문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 책을 읽은 덕분에 노동이 아니라 일을 하고 살 거라고 이야기했다.

 

노동시간이 주 40시간으로 주어지는 현재와 어떻게든 아득바득 프리랜서로 먹고살던 주 20시간 내외의 최근 몇 년 동안 나의 삶에서 중요한 건 일이었다. 나에겐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되는대로 일에 내 시간을 투자한다. 오죽하면 시간 확보를 위해 졸업 당시 취업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겠는가. 아직도 마찬가지다. 현재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기회만 주어진다면 회사를 퇴사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

 

일자리를 갖는 것이 심지어 자유와 같은 것이 되었는데, 이는 노벨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 취한 입장이기도 하다. 일자리를 갖지 못한 것은 존엄성의 부정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이코노미스트바틀비는 말한다. “궂은일이라는 생각은 일자리를 갖는 게 존엄성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흐린다.” 그러나 부유한 논평가들이 하는 주장, 즉 불쾌한 일일지라도 일자리가 존엄성을 부여한다는 주장은 역겹다. (p.208)

 

그래서 이 책이 반가웠다. 시간 불평등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느끼던 중요한 논점이다. 물론 책의 원제는 시간 정치라고 하지만. 자본의 불평등보다 시간 불평등이 훨씬 나에겐 중요한 문제다. 물론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구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졸업 작품을 준비할 때 누구는 해외여행을 가고 졸업작품 비용도 부모가 지원해 준다. 그래놓고는 앞에서 졸작을 위해 힘들었다고 말한다. 가소로웠다. 가난을 전시하고자 하는 욕망일지언정 그 정도 말은 이 불평등한 사회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걸 시기나 혹은 질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불평등을 공고히 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짓눌리는 사회를 만드는 데 조력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분노. 이 분노는 어쩌면 내 삶의 방향성을 정해준 어떤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전환적 정치에는 공동의 적대자에 대한 계급 기반의 분노, 가치 있는 어떤 것의 상실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 더 나은 미래의 전망에 관한 명확한 표현 등의 조합이 필요하다. 분노는 불의와 부당한 불평등에 대한 지각에서 나온다. 그러한 의식이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지려면 명확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일부 불의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알게 되면 대중의 불만으로 이어진다. (p.369)

 

자본주의 시대의 불평등을 야기하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 시스템을 많이 이야기했다. 아직 우리나라는 그곳에 서있다. 아니, 어쩌면 윤석열로 인해 50년을 후퇴한 민주주의처럼 우리 경제는 고꾸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건 두고 봐야 할 문제지만 여하간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던 그 시절로부터 아직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52시간이 도입된 지 벌써 6년 남짓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착취의 시스템이다.

 

휴가는 에너지를 보충하고, 개인적 관계와 가족관계를 강화하고 노동으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회복하고, 더 넓은 사회적 전망을 줄 가능성이 있다. 휴가의 축소는 건강을 악화한다. 미국 질명통제예방센터는 휴가가 거의 없는 여성은 관동맥성 심장병이 생길 가능성이나 심장마비가 올 가능성이 매년 최소한 두차례 휴가를 가는 사람보다 8배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위험의 심장질환이 있는 12천명 이상의 남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언례 휴가를 가지 않는 사람은 언례 휴가를 가는 사람에 비해 모든 종류의 원인에 따른 사망 위험이 21퍼센트 더 높고, 심장마비로 사망할 위험이 32퍼센트 더 높다. (p.214)

 

나도 휴가를 가지 않았었다. 간단했다. 프리랜서는 그런 휴가란 항상 불안요소였으니까. 혹시라도 일이 끊길 수도 있었고, 휴가를 가게 될 경우 일당은 끊겼다. 우리 사회는 휴가에 관해 논할 수 있는 사회일까. 아직 거기까지 못 가지 않았을까. 이 책에서는 영국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역시 선진국이라고 해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재택근무와 주 4일제를 거쳐서 기본소득을 논하고 있는 장에 들어섰을 때는 부러움이 밀려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 기본소득을 주장하던 이재명 대표는 기본소득 철회를 논의하고 있다. 분하고 억울하다. 만약 기본소득이 있는 사회라면 어쩌면 내 삶도 더 열정적이고 즐거움이 넘쳐나지 않았을까. 물론 그 또한 알 수는 없다.

 

프레카리아트화된 정신은 또한 청원자가 된다는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대부분이 프레카리아트로 구성된 예술가 공동체에서 심한데, 프로젝트를 위해 자금 제공 기관에 지원하는 데 의존하기 때문이다. 지원 및 전체 과정이 예술가들을 청원자로 바꾸고, 일시적인 꿈과 희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문화 관련 관료들에게 청원을 한다. 이 꿈과 희망은 많은 경우 예술가 내부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라 관료들에게 팔기 위한 것이다. (p.237)

 

이 책을 읽다 보면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나름 진보적인 나조차도 반성하게 만드는 주장들. 위 문단이 그러하다.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서류 작업을 하면서 매번 생각한다. 심사하는 사람들이 항상 좋은 작품을 선보인 것도 아니고, 그들의 자질을 의심할 때도 많다. 무엇보다 시간을 엄청나게 쏟아야 하는 서류들이다. 그 정도 지원을 받으려면 당연히 서류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매번 불만이었다. 작품은 작품으로만 봐야지 적어 낼 게 너무나도 많다. 도대체 부가 서류들은 왜 내는 걸까.

 

이건 저자가 주장하는 다른 국가 지원 사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업급여를 받거나 취업지원을 받을 때 너무 많은 시간을 쏟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돈을 받으려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는데 내가 안일한 것이었다. 이 또한 불평등하다는 걸 저자가 일깨워 줬다.

 

일자리 보장 정책은 가부장주의적일 것이다. (중략) 그리고 일자리 보장 지지자들은 훈련도 받지 않고 십중팔구 보장된 일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급여를 상실하게 되어 분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나이 든 친척이 사회적 돌봄을 받는 것을 진짜로 원하는가? (p.344)

 

그들은 수백만명이 가질 것이라고 예상되는 일자리에서 자신이나 친구들이 일하기를 바라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좋은 급료와 좋은 노동조건의 괜찮은 일자리를 갖길 바란다고 그들이 응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일자리가 생래적으로 시시하고 따분하며 따분하게 만들고, 그런 일을 수행하도록 밀어 넣어지거나 유도된 사람들의 시간을 잡아먹고, 그런 다음 물질적 궁핍의 공포로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p.358)

 

결국 우리 사회의 윤리다. 나와 남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내가 싫은 건 남도 싫다는 걸 인식하기. 차별하지 않는 것. 자본주의 논리는 차별과 혐오를 지속적으로 생산한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은 젊었을 때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노년을 보내는 거라는 역겨운 말들. 그들이 베트남 참전 용사였는지, 공부를 잘했는지, 혹은 어떻게 삶을 살았는지 알고 그런 말을 내뱉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한 가지를 지적한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가 잠도 자지 않고 하루 24시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대한민국 TOP10에 들 수 있는 부자가 될 수 있는가.

 

2001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포르투갈, 에스파냐에서 이루어진 유고브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분의 2가 기본소득을 지지했으며, 모든 나라에서 다수였다. 응답자가 생각하기에 기본소득이 어떤 이점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공통된 대부분의 대답은 분노를 줄인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본소득 혹은 보장소득이 분노와 정신적 불건강을 줄인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준 실험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p.404)

 

희망. 누구나 부자가 되진 않아도 누구나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가 올 수 있다는 희망. 어쩌면 이 책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에서 시작되어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반성을 부여했고, 공감과 연대를 지나쳐서 희망을 건넸다.

 

나는 해방이라는 위대한 고전적 담론을 버리는 것을 거부한다. - 자크 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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