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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 어느새 인간관계가 고장난 사람들에 관하여
맥스 디킨스 지음, 이경태 옮김 / 창비 / 2025년 1월
평점 :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라는 제목에 이끌렸던 건, “왜 친구가 없을까”가 아니라 “남자는”이라는 단어였을 것이다. 내가 남자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마도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 안에 무엇이 엉켜있는지 나도 잘 모르지만, 여하간 아버지라는 존재는 나에겐 아주 불쌍한 존재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좋았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타당한 이유는 있었다. 아버지랑 보낸 시간은 내 기억 속에 몇몇 단편적으로만 남아있고, 거의 모든 시간은 어머니와 함께 했다. 복잡한 가정사를 겪으며 내 안에 움튼 것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편을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아버지가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엄마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였다. 그때부터였을까. 남자라는 존재에 대해 궁금했던 것이.
거의 반쯤은 약 빨고 쓴 멘트들이 폭소를 터뜨리고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이 책의 서평의 시작이 너무 무거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뭐 어쩌겠는가. 솔직함밖에 방도는 없다. 여하간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은 그러했다. 내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아버지가 될 나이가 된 지금 나는 나의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 많은 여자들이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많은 남자들이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 한다). 프로이트는 말년에 여자들을 모르겠다고 선언했지만 20세기 초부터 여성 운동과 함께 이어진 수많은 여성에 관한 글과 이론들로 인해 여자들이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는 그 선언은 꽤 구체적으로 행동화되고 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남자들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고 느끼는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아니면 그런 선언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축구 보는 거랑 한잔하는 거랑 뭐가 달라?"
"축구 보는 건 목적이 있잖아. 그게 중요해. 근데 나는 만남의 이유가 없어. 그냥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이런 식으로는 연락 못하겠다고"
"왜 못해?"
"흠.. 그냥.."
"그냥, 뭐?"
"남자들의 방식이 아니거든." (p.44)
위의 이야기처럼 남자들의 방식이 명확하게 존재하는데, 이에 대해 바꿔야 한다는 외침이 있었던가? 혹은,
우리가 연락이 끊겼던 이유는 내가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이 만나자고 연락할 때면 내겐 항상 핑곗거리가 있었는데, 대개는 지어낸 것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무수한 생일 초대, 수백 번의 저녁이나 주말 외출 기회를 날려버렸다. 잔인한 진실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나의 결정이었고, 우정관계를 죽인 장본인이 바로 나라는 점이다. 나는 친구들에 대해 신경을 꺼버렸고,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p.55)
남자들이 관계에 대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던 주장이 있었던가? 무엇보다 아래 대목이 서글프다.
언젠가부터 나는 일이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도록 손놓고 지냈다. '경력'이라는 막연한 개념이 다른 거의 모든 것을 밀어내는 모습을 두고 봤다. 나는 항상 일했고, 에너지가 소진되어 생산성을 상실했을 때조차 일을 붙잡고 있었다. 일하지 않을 때에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터무니없게 들리겠지만 나는 자유시간을 갖는 법을 잊어버렸다. 내 삶은 오직 일 그리고 나오미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야망은 '내 자아'의 건강한 일부분이 아니었다. 데수치가 그 대화에서 사용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인간 그 자체라기보다는 '인간 행위'였다. (p56-57)
아버지는 항상 일했고, 집에 들어오면 항상 잤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식구들끼리 밥을 먹는 시간에도 아버지는 자면서 밥을 먹었다. 오래전부터 육아 휴직에 대한 사회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남자들의 육아 휴직은?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불쌍한 건, 아버지가 아이들과 보낼 시간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와 비슷한 수준의 큰 문제는 물론 표현 방식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부성애의 부재일까..?) 심지어 일을 마친 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 시간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쉰다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집에 들어가서 육아를 하는 게 벅찼고, 아이를 대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비슷하다. 사실 저자와 비슷하게도 나는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기나 강아지들과 놀아줄 때, 여자들이 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그런 말들을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오구오구, 그랬쪄, 아이 이뻐라 등..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어색하고 민망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말들까진 아니어도 아기들이나 강아지를 대할 때 조금씩 편해졌는데, 그건 아마도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법에 대해 배워서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텔이 내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을 복합성과 깊이를, 나오미에게는 보여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내 연기는, 다른 연기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또다른 연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의 남성성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내 머릿속엔 남자들은 서로를 더 부정적으로 만든다는 우울한 생각이 이어진다.(p.72)
그렇다, 남자들은 희한하게도 남자들끼리 있을 때는 죽어도 하지 못할 말과 행동을 여자와 있을 때는 한다. 정말 죽어도 하지 못할 그런 말과 행동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말과 행동이 나를 편안하게 할 때가 있다. 위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남성성이 내 안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 사이에 위치한 것이라는 통찰력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한 가지 떠올렸던 것은 나의 학창 시절인데, 남중 남고를 나온 나로서는 친구들을 첫 대면할 때는 항상 경계심이었던 것 같다. 그 경계심은 남학교의 서열 문화에서 온 것이 분명한데, 이는 벌써 15년이 지나도록 내 안에 자리매김하는 거 같다. 15년이 넘는 지금에서야 남자들과의 첫 만남에 경계심을 품지 않게 된 것도 같다.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 졸업 이후 군대를 제외하면 나는 남자인 친구와 여자인 친구들과 비슷한 시간을 보냈던 거 같고,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고 난 뒤부터는 남자와 보내는 시간이 상당히 줄었다. 이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난 친구가 인생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여하간 남자인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남자와 남자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내 안에서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눈에 띄는 점은 '유해한'남성성과 그 남성성의 '강하고 과묵한'전형성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말이 있다. 남자는 고통에 굴하지 않으며 항상 스스로를 통제한다. 여기서 '자기통제'는 '감정 없음'과 동의어다. 하지만 감정이 분노일 경우에는 예외다. 분노는 남자들이 표현하도록 문화적으로 교육된 유일한 감정이며, 다른 모든 감정이 모아지는 '깔때기'이자 방출 밸브와 같다.(p.104)
"많은 남자들이 제게 같은 얘기를 해요. 그들은 애들이나 아내가 어떤 사건이나 뉴스 등을 접하며 감정표현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고는 '나도 그런 감정을 느끼면 좋겠다'고 바라죠.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남성들 자신에게도 슬픈 일이지만, 다른 이와의 관계에도 해가 돼요. 기쁨을 표현하고 좋은 소식을 공유하는 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중요한 요소거든요."(p.125)
우리는 어린 시절을 단편적으로 기억한다. 난 아직도 엄마의 몇몇 대사들을 명확하게 기억하는데, 그중 하나가 이 대사다. “나는 남자가 쫑알 쫑알대는 거 싫더라. 남자가 좀 과묵해야지.” 어떤 드라마를 보고 했던 말인데, 드라마는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초등학생 때로 기억하는데, 엄마의 이 대사를 듣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나는 좀 더 쫑알대는 남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좀 더 많은 연애를 하지 않았을까? 물론, 농담은 아니다. 그 과묵한 남성상이 내 안에 똬리를 튼 것일까. 나는 아홉 살 때도 엄마와 뽀뽀하지 않았다. 그것이 창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 이후로는 더욱더 심해졌다. 당시 버디버디 채팅하던 중 엄마가 내 채팅창을 본 뒤로 일주일 동안 엄마와 대화하지 않았다. 엄마는 담임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한 시간 동안 상담을 했다. 왜일까? 그게 너무 싫었다. 여자인 친구랑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창피하다고 느껴졌던 것 같다.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난 아직도 그때 내 채팅을 보고 싶어 하던 엄마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은 여자인 친구랑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치부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약간의 부끄러움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대화였고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여자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놀림거리가 될 수 있는 문제였다. 그건 어쩌면 남성 문화가 배척하는 무엇이지 않았을까?
"우리는 내가 혼자서도 충분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유지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한다. 어떤 이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존재라고 해도, 우리는 이 점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행동한다."(p.127)
그러면서 이어진 이미지는 고독함이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했기에 당연한 수순이었을까?
남성의 고립이 여성에게 더 많은 감정노동을 야기한다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여성들이 남친이나 남편과 동거하며 그들을 돌보는 심리치료사 같은 역할을 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자들에게는 함께 사는 여자 외에는 자신의 감정욕구를 충족시켜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p.154)
위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반문한다. 남자는 함께 사는 여자 외에는 자신의 감정 욕구를 충족시켜줄 사람이 없지만 여자는 무수히 많은 친구들의 감정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감정노동자가 되는 건 아닌가? 전반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바가 많았지만 친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 생각의 이면에는 무엇이 깔려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친구란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필요하다면 몇 명이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걸까? 사람의 성향마다 다를 텐데, 누군가는 한 명으로 충분할 것이고, 누군가는 열 명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같이 사는 여자 말고 친구가 필요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삶의 방식 중 하나는 온전히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많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그중 하나가 친구라고 생각한다. 친구가 있어야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문제를 논하려면 친구의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친구가 필수적이진 않다(고 생각 한다). 다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인맥이 필요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직장에서 좋은 친구를 사귄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앓고 있을 듯하다.(우정의 감정이 진심이라기보다는 선택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 생긴 유대감임을 의미-옮긴이) 이 말이 과장 같다면, 사람들이 퇴직한 뒤 얼마나 빨리 잊히는지 생각해보라. (p.274)
그렇기에 위 주장은 아주 적절하다. 다만 이 사회적 관계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 몇 명을 제외하고, 우리는 만남과 이별을 경험한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관계를 보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떠난 사람들은 기억 속에 머물게 하는 게 가장 아름답기도 하다. 그들을 다시 만나는 건 그들과의 기억 속 사진을 콜라주 하는 것과 같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땐 저자가 했던 일을 해야 하는 걸까?
모든 친구들의 스케줄이 공통으로 비어 있는 날을 기다리는 것은 하늘의 별들이 직선으로 정렬하는 기일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중년의 우정은 대부분 관리의 문제다. (p.409)
친구들과의 약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 그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이 책은 남자의 내면 깊숙하게 파고든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의 솔직함으로 표면적 현상들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어쩌면 그것만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문득 보관함에 넣어둔 벽돌 책 한 권을 읽어볼까 떠올려 본다. 90년대에 나온 남성들에 관해 아주 깊게 다룬 책이라던데..
이 재기 발랄한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는 커플들끼리 읽어보면 좋을 법하다. 아니다. 커플, 부부, 부녀 다 좋겠다. 물론 같이 읽을 때 남자들은 화끈거림을 감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화끈거림을 감수하고서라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난 MBTI는 사람의 성격을 분석하는데 적절한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MBTI가 유행처럼 번지고 난 다음 긍정적인 효과는 나와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도 그럴 것이다. 당신과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아주 유용한 시작이 될 것이 분명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