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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0
이창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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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물고기나 박하사탕, 그리고 오아시스에 이르는 영화를 우선 접하고 이창동을 알았는데,

8,90년대를 교조적이고 도식적인 의식 속에서 빠져살던 내게 뭔가 충격을 주기도 했었다.

영화를 만들기전 80년대에 쓴 그의 소설집 "소지"는 오랜만에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 전 그의 단편 몇편을 보면서, 그 소설의 주인공들은 정식화된 전형들이 아니라, 그 전형들의 의도된 삶 속에서 빗나가거나 빗겨서있거나 피해를 보거나 또는 비겁하거나 명분 또는 대의를 헌신짝처럼 내버리지만 현실의 무게를 모두 지고 가야하는 사람들....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제일 약자인 자들이 그의 소설의 주인공이었다는 생각을 했었다.

민중이나 계급을 들먹이지만 실제로는 삶으로부터는 괴리되어 목소리와 명분은 있되 현실은 뒷전이었던 과거의 운동의 폐혜 속에서 그의 소설은  뒤죽박죽인 현실에서부터 출발하고, 그 현실이 답이라고 말하는듯 어떤 환상 또는 꿈을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그것이 그 현실이 다시 출발점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 하다.

어쨌든 그의 글이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살아있는 것은, 그 현실에 충실했던 그의 눈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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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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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페이지씩 여러날에 거쳐 읽으면서, 카프카의 영혼을 본것 같아 무척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프카의 '변신'이나 '성' '아메리카'등에 대해서 참 뭔가 리어리틱한 묘사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고 몽롱한 그 무엇이었는데 싶었는데, 이 짧은 글을 읽으면서 이해될 듯도 하고... 그러므로 카프카의 소설들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카프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자기 삶의 힘은 자기를 억누르는 그 실체에 대한 저항, 그의 아버지에 대한 열등감이었다. 죽을 때까지 그걸 극복해보려고 노력도 하고, 포기도 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과정에 여지 없었다. '당연히 그렇게 사는 사람'-정말로 소수의 풍요로운 삶 속에 던져져 모든것이 풍성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그 풍요롭고 인정받는 사회의 그 부류에 기어들기하는 괒ㅇ이 삶의 존재 이유가 된다.

카프카처럼 더욱더 깊이 그 속에 빠져들어 진흙 속에 진주를 건져 올리는 것조차 특별한 행운일뿐. 그는, 카프카 그는 나보다도 훨씬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이었다. 城에 다가서기 위해서 權力에 인정받기 위해, 법의 테두리를 이해하기 위해... 그런 그의 끊임업는 시도는 더 상처를 키우고, 그러나 그런만큼 구체적인 상처를 알수 있는 것이었다.

나의 경우는, 그보다는 차라리 뻔뻔스런 편이다. 난 내가 다가설 수 없는 城은 전복해야할 城일뿐이다. 무시해야할 城일뿐이다. 그 권력을 일부분 나도 갖기 위해 기를 쓸 필요 없이 나로부터 출발하는 권력만을 인정할뿐이다. 내가 포함되지 않는 法은 내法이 아닐뿐이다. 써놓고 보니, 정말 그런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그에게 아버지는 더욱더 완고하고 온전한 지배력을 뻗는 무시를 할수조차 없이 숨통을 죄어오는 현실권력이었겠지.... 다시한번, 인간의 다양성은, 다양한 내적 외적 요인과의 충돌로인해 펼쳐지는 것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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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단편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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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단편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데 다음부터는 소재의 신선함이 독자를 압도한다. 그의 등에 붙어다니는 가난한 아줌마 얘기, 빵가게를 습격했는데 바그너 음악을 같이 들어줄 조건으로 빵을 가져가라는 늙은 빵가게 주인등.. 전편에 거쳐 나타난 소재 자체는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는 신선함이 있고, 작가적 상상력이 도처에 베어있다.

그런데 사실 혼동스럽다.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그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음식들이 먹고 싶고, 그가 듣는 음악을 듣고 싶다... 광고... 그래. 그의 글은 긴 광고 같다. 그가 실제 광고회사에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소설은 긴 광고처럼 자극적이고, 당장에는 재미 있지만, 별로 진한 의미는 없는, 그러나 보면 먹고 싶고 따라하고 싶은....

하루키는 바그너를 비롯하여 누군지도 모르는 음악을 나열하고, 음식을 나열하고, 메이커나 구두창의 이름을 낯설게 쓴다. 그에게야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도시인들들의 삶에서 어쩌면 소비태도로서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못내 씁쓸하다. 그의 취향으로 이해하고 말면 그뿐인가 싶기도 하면서, 그러나, 문화의 소비 구조가 양산하는 취향인것에 대한 자각은 없는듯도 하다.

그러나, 흡입력과 상상력, 그리고 구조의 짜임새. 문장... 참으로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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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가난한 사람들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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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도 그렇고, 가난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손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매력은 뭘까..
가난한 자의 소심함과 자격지심을 리얼하게 드러내는데, 구태의연하거나 그냥 그런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에게 혼과 사상을 불어넣었기 때문인가? 사상이라기보다는 정신? 정말 사사로운 일상의 나열인 듯 싶지만, 그들의 사색은 현실에 확실하게 뿌리박고 있다. 그 현실의 가난, 그 가난 속에서의 인간의 자존심. 그 자존심이 뭉개지는 현실 괴리에 대한 고민과 또 행동들...

그래서 서간체 소설임에도 지루하지 앟고 다양한 군상들이 등장하고, 주인공의 내면과 현실의 접전지점을 잘 드러내므로 주인공들은 살아있다.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주인공들은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이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고뇌와 인간적 갈등, 치열함이 낯설지 않고 포근하다. 그들에게는 현실이 있다.

'분신'은 순간의 선택이란 것, 우연이란 것이... 그것이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 우연은 한번 발생하고 잊으면 그뿐이거나, 그 시간만 지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우연 자체가, 작은 선택 하나 자체가 삶이라는 것인데, 다시말해서, 난 내 삶과 내 지향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크다. 예를 들면 내가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에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대강 산다. 그렇다고 그 이후 나의 이상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어쩜 그냥 소풍이나 왔던 것 정도로 현실의 삶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뭔가 내가 내 삶이라고 명명할 그 무엇인가가 이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할 거라는 기대, 지금 이 순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지금의 삶은 뭔가 충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골냐드킨는 자신의 한번의 실수,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집에 초대받지 않았는데도, 바보같은 몰골을 하고 남들(상류계층 사람들)의 놀림감이 될수 밖에 없는 조건에서도, 자신의 판단과 감정에 충실하게 그 집에 쳐들어갔었던 사건에서부터 그의 삶은 꼬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분신을 만나고 그가 정신병원으로 우송될 수 밖에 없는 과정 까지 가는데.... 골랴트킨에게는 그 행위가 결코 우연이거나 순간의 실수 일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골랴트킨의 삶을 삶으로 본다면, 코메디 같지만, 그 순간의 진정성이란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분신'은 엑서사이즈 문제를 풀듯이 순간의 선택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대강 결정해내는 내 삶의 태도에 반성의 꺼리를 주었다. 삶은 순간 순간일뿐이다. 그 미래란 또는 희망이란 그야말로 '관념' 일뿐이다.

진정한 골랴트킨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그의 정신병원행은 단절의 극대화를 드러낸다. 그러나 나도 어느새, 골랴트킨을 병원에 쳐넣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가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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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딸들
D. H. 로렌스 지음, 백낙청 옮김 / 창비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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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의 단편소설, 전에 '챠탈레부인의 사랑'을 읽으며 매료되었던 터라, 기대감에 부풀에 읽었다. 역시나 너무 반갑다. 그의 출신이 광부의 아들이어서 그랬을까. 그의 소설은 계급적인고 물적인 토대를 비껴가지 않고 벗어나지 않는다.

하층 계급의 자의식을 가진 자와, 상층 계급의 하층계급에 대한 계급적 적대감이 현실에서 부딪치는 것이 그의 소설의 주요 동력이다. 그는 출신 계급으로부터 출발하는 의식을 쉬이 무마시키거나 덮어두지 않는다. 소설은 그 계급적,신분적 차이에서부터 출발하고, 그 계급적 차이를 쉽게 화해하지 않는다.차라리 상층이 하층에 동화되어 가는 것으로 귀결되기도 하는 듯하다.

그는 노동자 계급의 건전성을 옹호한다. 그것은 성적인 우월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건강한 노동의 육체미로 형상화되거나 미회되기도 한다. 그가 그리는 상층계급은 위선적이고 무기력하다. 뭔가 기운을 가지고 있는상층의 여자는 상층계급사회의 그런 위선과 무기력을 수긍하고, 하층의 자의시 강하고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남자에게 매료되는 것이 주요 모트브이다. 그런 줄거리로 빚어내는 그의 문체는, 문체 자체가 그 둘 사이의 차이와 대결인듯이 느껴진다.

목사와 딸들은, 한 문장을 읽는 것 만으로도, 그 한 문장에 작가의 온 시선과 주제의식이 담겨있어서 행복하다. 그러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현실의 삶의 지향을, 소설가가 어떻게 문장으로 드러낼수 있는가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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