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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과학의 우위. 이 고전주의적 천칭이 점점 반대편으로 기울더니 최근엔 역관계가 완전히 전도된 듯하다.
요즘은 예술이 정신을 지도하는 듯하다. 하긴 포스트모던은 학과 예술, 윤리학과 미학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 우리 지식인들 사이에서 부쩍 예술가가 늘어난 것은 이때문이다. 좋은 일이다. 한 가지만 지적하자.
합리적 논증을 할 자리에서 예술가가 되어 마구 상상력을 펼치는 이론가들. 이들은 포스트모던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존재미학이다. 근대적인 인식론적 미학이 아니다.
이 시대에 부활시켜야 할 감각과 상상력이란 얄팍한 딜레탕트 취향이 아니다. 포스트모던의 감성과 상상력은 무엇보다도
시대의 고통을 예민하게 찾아내는 창조적 상상력이어야 한다. 예술? 아, 그것은 잿빛 이론에 싫증난 게으른 지식인들의 해방구가 아니다.
부르주아적 삶을 치장하는 한 조각의 시도 아니고, 향유라는 이름의 소비의 대상도 아니다. 예술은 우리의 삶 자체를 예술적으로
조직하도록 이끌어주는 영감의 원천이어야 한다. 미메시스. 예술작품과의 존재론적 닮기. 이것이 포스트모던의 정신이다.

진중권, 앙겔루스노부스, pp.188~189




예술은 누추한 존재를 고상하게 치자하는 장식품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작품에 관한 딜레탕트적 담론의 놀이로 자신을
다른 그룹의 인간들과 구별하고자 하는 자들이 벌이는 하릴없는 사회적 상징작용의 기호로 소모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아름답게 형상화하는 데에 필요한 창조적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예술을 닮아야 한다. 예술은 인간이 자기를 닮기를 원한다. 예술은 한갓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존재론적
닮기를 하는 대화의 상대가 되어야 한다. 근대의 인식론적 미학은 이제 서서히 탈근대의 존재미학으로 바뀌어야 한다.

pp.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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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1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장미의 이름>은 아드소라는 수사가 어린 시절 그의 스승과 함께 겪었던 일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드소의 스승인 윌리엄 수사는 대단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매우 경험주의적이며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데, 이걸로 보아 아마 중세의 유명론자였던 윌리엄 오컴(William Ockham, 1285?~1349?)을 실제 모델로
한 것 같다. 오컴은 중세의 형이상학적 신학자들이 쓸데없는 사변을 일삼는 데 반발하여, 불필요한 사변적 개념들을
철학에서 도려낼 것을 주장했다(오컴의 면도날). 어쨌든 소설 속에서 윌리엄 수사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그는 사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다).
한편 윌리엄과 대립하는 호르헤 수사는 광신적인 믿음을 대표하는데, 굳이 그 역사적 모델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중세 수도승의 일반적 유형이었을테니까. 하지만 아델모 수사의 우스꽝스런 그림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에서,
호르헤는 12세기의 수도승 성 베르나르를 연상시킨다.


이렇게 보면 윌리엄과 호르헤의 대립은 두 가지 상이한 미학의 대립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중세를 지배했던 건
호르헤의 미학이었다. 중세는 웃음이 없는 시대였다. 물론 이 숨막히는 시대에도 통풍구는 있었다. 그건 카니발이라는
축제인데, 여기서만큼은 음탕한 행위와 우스꽝스런 언동이 허락되었다. 하지만 이 며칠을 제외하면 사회는
늘 엄숙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교회는 종말론을 유포하여, 사람들을 늘 종교적 흥분 상태 속에 붙잡아놓으려
했다. 종말이 온다는데 웃을 기분이 나겠는가?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원이 사회주의 국가를 가리킨다는 걸 알 거다.
착취 없는 유토피아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늘 정치적 흥분 상태에 몰아넣었던 그 현대의 수도원. 지금 그 수도원을
폐허가 되어버렸다. `트리에르 지방에서 발생한 묵시론의 일파(마르크스주의)`는 처참한 꼴로 종말을 고했다.
왜 그랬을까? 웃음을 거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를 살아하는 사람의 사명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웃도록, 진리가 웃도록 만드는 게 있는거야.
유일한 진리는 진리에 대한 광적인 정열에서 우리가 해방되는 길을 배우는 데 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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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파괴적인 작품과 행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풍모를 보자면 네오다다에서 가장 `반예술`적 인물이었던 시노하라 우시오는
`전위로 가는 길`(`미술수첩` 1966년 6월호)이라는 자전적인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예술이라는 말을 듣고 돌아온 미술평론가 도노 요시아키는 제12회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시회장에 난무하는 요란한 작품을
놓고서 `반회화·반조각`이라는 명사를 갖다 붙였다. 우리는 그의 태도가 불만이었다. 전위예술을 어디까지나 기성예술에 대한
안티테제로만 다뤄야 했을까? 우리는 기성 권위, 기성 사상에 대해 아무런 반발을 느끼지 못한다. 노여운 심정으로 뒤돌아본다면
그 노여움은 동세대의 타인에게, 경쟁상대에게, 연인에게 향할 것이다. 예술 존재 자체에 대한 불신, 우리가 노력해도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전시회장 예술로는 다 끌어안을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해답이나 대명사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발언이 일본의 전위를 대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일본의 전위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인물의 내면에서
기성 권위, 기성 사상에 대한 반발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 구절을 읽으면 분명해지듯이 그가 반발을 느낀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주변의 `현대`이며 그 `현대`에 얽매여 있는 바로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또한 ˝우리가 노력해도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전시회장 예술로는 다 끌어안을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해답이나 대명사를 원했다˝는 구절을 보면 그들이 원한 것은 오히려
서구의 기성 권위나 기성 사상에 맞먹는 어떠한 확실함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실함이 `우리가 노력해도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이라면 거기에 `전시회장 예술`이라는 근대의 제도로는 `다 끌어안을 수 없는`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서의 `전근대성`이 노스탤지어처럼
계속 붙어있었다고 해도 그 나름대로 이해가 된다. 그것이 바로 노스탤지어와 전위라고 할까.
이와 같은 `해답`이나 `대명사`에 대한 초조감이 전근대적이고 행복한 공동성을 상실한 탓에 기인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확인해볼 일이다.
그와 반대로 근대는 그러한 `해답`에 대한 초조감, 본연의 자신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은 처음부터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없는 초조감이다. 원래 이유 없는 초조감이나 존재의 불안만큼
근대적인 것이 달리 있을까.

pp.64~65





1920년대부터 1930년, 1955년부터 1960년대에 나타난 일본의 전위 미술운동이 남긴 흔적이 왠지 옴진리교 활동이나
그 상상력과 비슷한 데가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러한 모든 것이 `도시`를 향해 조준이 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말할 것도 없이 시라카와는 여기서 다이쇼기 신흥예술과 구타이에서 반예술로 이어진 흐름을 가리킨다(다이쇼기 신흥예술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던 마보가 간토 대지진 이후 바라크 장식사 활동을 하였는데, 우연히도 1990년대 한신 대지진
재해 때의 상황과 기묘한 대응관계를 보인다). 시라카와는 침체되어 래디컬리즘을 상실한 `일본의 전위` 미술 대신에
불행하게도 그와 같은 `전위` 반복의 거점이 되어버린 것이 옴진리교가 아닐까라고 말한다.

pp.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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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유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매혹적인 것은 공백의 주석, 주석의 공백, 주석의 영도(零度)입니다.
(≠`주석이 없음`, `문자`) 이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말할 게 없다`와 반대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입니다.
거기에 마음에 드는 지대가 하나 있을 뿐입니다. 바로 가벼운 스침의 에로틱한 지대입니다. 다음 두 가지 사이의 스침입니다.
금욕 작업, 생략 작업, 그리고 군더더기의 부재(발레리는 `사물들의 본질적인 날씬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를 동반하는 하나의 형식,
하나의 문장과 하나의 지시체(방, 조그마한 배) 사이의 스침입니다. 이 스침을 `환기`로, `비전`으로, 다시 말해 기호로
즉각적으로 다듬어진 지시체로 이해합시다. → 스침, 관능적인 애무. 감각적인 평화와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하이쿠는 비의지적인 개인적 기억(노력하거나 체계적인 기억 되살리기가 아닙니다.)의 번뜩임에 의해서도 가능할 듯합니다.
하이쿠는 기대하지 않았던, 총체적인, 빛나는, 행복한 추억을 묘사합니다. 독자에게는 당연히 이 하이쿠를 짓게 했던 것과
같은 추억을 불러일으킵니다. 물론 이것이 프루스트의 비의지적 기억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들렌에 의해
알레고리화된 주제.) 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하이쿠는 작은 사토리에 가깝습니다. 깨우침은 의도를 만들어 냅니다.
(그로부터 하이쿠 형식의 극단적인 단순함이 나옵니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경우에는 깨우침(마들렌)이 확장을 가져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체는 마들렌에서 나왔습니다. 마치 물에 닿으면 활짝 펴지는 일본 종이꽃처럼 말입니다.
전개, 연장, 무한한 펼침입니다. 하이쿠에서는 꽃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물이 없는 일본 종이꽃입니다. 꽃봉오리로 남아 있습니다.
단어(하이쿠의 홀로그램), 물 속의 돌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줄곧 물결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퐁당 소리)를 듣습니다. 그뿐입니다.



시는 `인권`의 일부여야 합니다. 시는 `퇴폐적`이지 않습니다. 시는 전복적입니다. 전복적이고 생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뉘앙스는 차이(디아포라)입니다. 블랑쇼가 제시하는 (핵심적인) 표현을 통해 이 뉘앙스의 개념 속으로 나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예술가는 (우리가 탐구하는 것이 바로 이 예술의 실천입니다.) 그 자신이 특별한 내면적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어떤
실수와 연계되어 있다. 모든 예술은 어떤 예외적인 결점을 그 근원으로 삼는다. 모든 예술 작품은 이런 근원적 결점의 작품화인 것이다.
이 결점으로부터 우리에게 충만함의 위협을 받는 접근과 새로운 빛이 온다. 실제로 통념적(endoxal)인 관점에서 보면,
뉘앙스는 실패한 것입니다.(이른바 상식의 관점, 정통성의 관점, 초보적이지만 옳은 관점에서 보면 그러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
신뢰를 주는 것이 다음과 같은 비유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는 너무 구워졌거나 덜 구워져 비교할 수 없는 기묘한 색깔을
내는 도자기, 예상 외의 관능적인 흔적이 새겨진 도자기라는 비유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뉘앙스는 빛을 발산하는 것,
그것을 확산하는 것, 그것을 길게 늘이는 것(하늘의 구름처럼)입니다. 그런데 이 빛의 발산과 공허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습니다.
뉘앙스에는 공허한 고단함 같은 것이 있습니다.(그로 인해 실증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이 뉘앙스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하이쿠가 프루스트식 글쓰기 행위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비의지적 기억이라는 주된 행위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그 이후, 사후적으로(코르크로 덮은 방에 갇혀) `되찾기` 위한 목적의 글쓰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이쿠는 곧장, 즉석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되찾는 것이 아니라)입니다. 시간은 곧장 구해집니다. 즉 메모(글쓰기)와 감흥이
공존합니다. 감각적인 것과 글쓰기의 즉각적인 열매 따기입니다. 하이쿠 형식 덕택으로(`문장 덕택으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글쓰기는 감각적인 것의 기쁨을 향유합니다. 따라서 하이쿠는 순간의 글쓰기(철학)입니다. 예컨대 순간에 대한 절대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죠.

하이쿠, 즉 새롭고도 역설적인 범주. 마치 노타시오(메모하는 행위)가 즉석에서 기억되는 것을 가능케 해 주는 것처럼,
`즉각적인 기억`(프루스트이 비의지적 기억과 달리 즉각적 기억은 확산되지 않습니다. 환유적이 아닙니다)입니다. 내 생각에 이것은
어느 정도 시의 기능에 해당합니다. 물론 하이쿠는 이와 같은 기능이 있는 시의 극단적인 형식이고 (모든 일본적인 것,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 본토이지, 파리의 오페라 광장에서 느낄 수 있는 일본이 아닙니다.) 섬세함과 극단, 극단적인 뉘앙스입니다.
이런 의미로 ㅡ사건의 기억으로의 변화, 또한 이런 기억의 즉석에서의 소비라는 의미ㅡ 에드거 포의 다음과 같은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바슐라르)
˝지금, 운명은 다가오고, 시간이 숨을 죽이는 동안, 시간의 모래알이 금 알갱이로 변하고.˝
하이쿠, 이것은 다른 형태였더라면(글쓰기가 없었다면) 시간의 모래알에 불과한 금 알갱이였을 겁니다.





롤랑바르트, 변광배 역, 마지막 강의, 민음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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