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유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매혹적인 것은 공백의 주석, 주석의 공백, 주석의 영도(零度)입니다.
(≠`주석이 없음`, `문자`) 이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말할 게 없다`와 반대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입니다.
거기에 마음에 드는 지대가 하나 있을 뿐입니다. 바로 가벼운 스침의 에로틱한 지대입니다. 다음 두 가지 사이의 스침입니다.
금욕 작업, 생략 작업, 그리고 군더더기의 부재(발레리는 `사물들의 본질적인 날씬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를 동반하는 하나의 형식,
하나의 문장과 하나의 지시체(방, 조그마한 배) 사이의 스침입니다. 이 스침을 `환기`로, `비전`으로, 다시 말해 기호로
즉각적으로 다듬어진 지시체로 이해합시다. → 스침, 관능적인 애무. 감각적인 평화와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하이쿠는 비의지적인 개인적 기억(노력하거나 체계적인 기억 되살리기가 아닙니다.)의 번뜩임에 의해서도 가능할 듯합니다.
하이쿠는 기대하지 않았던, 총체적인, 빛나는, 행복한 추억을 묘사합니다. 독자에게는 당연히 이 하이쿠를 짓게 했던 것과
같은 추억을 불러일으킵니다. 물론 이것이 프루스트의 비의지적 기억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들렌에 의해
알레고리화된 주제.) 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하이쿠는 작은 사토리에 가깝습니다. 깨우침은 의도를 만들어 냅니다.
(그로부터 하이쿠 형식의 극단적인 단순함이 나옵니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경우에는 깨우침(마들렌)이 확장을 가져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체는 마들렌에서 나왔습니다. 마치 물에 닿으면 활짝 펴지는 일본 종이꽃처럼 말입니다.
전개, 연장, 무한한 펼침입니다. 하이쿠에서는 꽃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물이 없는 일본 종이꽃입니다. 꽃봉오리로 남아 있습니다.
단어(하이쿠의 홀로그램), 물 속의 돌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줄곧 물결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퐁당 소리)를 듣습니다. 그뿐입니다.



시는 `인권`의 일부여야 합니다. 시는 `퇴폐적`이지 않습니다. 시는 전복적입니다. 전복적이고 생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뉘앙스는 차이(디아포라)입니다. 블랑쇼가 제시하는 (핵심적인) 표현을 통해 이 뉘앙스의 개념 속으로 나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예술가는 (우리가 탐구하는 것이 바로 이 예술의 실천입니다.) 그 자신이 특별한 내면적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어떤
실수와 연계되어 있다. 모든 예술은 어떤 예외적인 결점을 그 근원으로 삼는다. 모든 예술 작품은 이런 근원적 결점의 작품화인 것이다.
이 결점으로부터 우리에게 충만함의 위협을 받는 접근과 새로운 빛이 온다. 실제로 통념적(endoxal)인 관점에서 보면,
뉘앙스는 실패한 것입니다.(이른바 상식의 관점, 정통성의 관점, 초보적이지만 옳은 관점에서 보면 그러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
신뢰를 주는 것이 다음과 같은 비유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는 너무 구워졌거나 덜 구워져 비교할 수 없는 기묘한 색깔을
내는 도자기, 예상 외의 관능적인 흔적이 새겨진 도자기라는 비유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뉘앙스는 빛을 발산하는 것,
그것을 확산하는 것, 그것을 길게 늘이는 것(하늘의 구름처럼)입니다. 그런데 이 빛의 발산과 공허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습니다.
뉘앙스에는 공허한 고단함 같은 것이 있습니다.(그로 인해 실증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이 뉘앙스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하이쿠가 프루스트식 글쓰기 행위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비의지적 기억이라는 주된 행위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그 이후, 사후적으로(코르크로 덮은 방에 갇혀) `되찾기` 위한 목적의 글쓰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이쿠는 곧장, 즉석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되찾는 것이 아니라)입니다. 시간은 곧장 구해집니다. 즉 메모(글쓰기)와 감흥이
공존합니다. 감각적인 것과 글쓰기의 즉각적인 열매 따기입니다. 하이쿠 형식 덕택으로(`문장 덕택으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글쓰기는 감각적인 것의 기쁨을 향유합니다. 따라서 하이쿠는 순간의 글쓰기(철학)입니다. 예컨대 순간에 대한 절대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죠.

하이쿠, 즉 새롭고도 역설적인 범주. 마치 노타시오(메모하는 행위)가 즉석에서 기억되는 것을 가능케 해 주는 것처럼,
`즉각적인 기억`(프루스트이 비의지적 기억과 달리 즉각적 기억은 확산되지 않습니다. 환유적이 아닙니다)입니다. 내 생각에 이것은
어느 정도 시의 기능에 해당합니다. 물론 하이쿠는 이와 같은 기능이 있는 시의 극단적인 형식이고 (모든 일본적인 것,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 본토이지, 파리의 오페라 광장에서 느낄 수 있는 일본이 아닙니다.) 섬세함과 극단, 극단적인 뉘앙스입니다.
이런 의미로 ㅡ사건의 기억으로의 변화, 또한 이런 기억의 즉석에서의 소비라는 의미ㅡ 에드거 포의 다음과 같은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바슐라르)
˝지금, 운명은 다가오고, 시간이 숨을 죽이는 동안, 시간의 모래알이 금 알갱이로 변하고.˝
하이쿠, 이것은 다른 형태였더라면(글쓰기가 없었다면) 시간의 모래알에 불과한 금 알갱이였을 겁니다.





롤랑바르트, 변광배 역, 마지막 강의, 민음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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