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파괴적인 작품과 행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풍모를 보자면 네오다다에서 가장 `반예술`적 인물이었던 시노하라 우시오는
`전위로 가는 길`(`미술수첩` 1966년 6월호)이라는 자전적인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예술이라는 말을 듣고 돌아온 미술평론가 도노 요시아키는 제12회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시회장에 난무하는 요란한 작품을
놓고서 `반회화·반조각`이라는 명사를 갖다 붙였다. 우리는 그의 태도가 불만이었다. 전위예술을 어디까지나 기성예술에 대한
안티테제로만 다뤄야 했을까? 우리는 기성 권위, 기성 사상에 대해 아무런 반발을 느끼지 못한다. 노여운 심정으로 뒤돌아본다면
그 노여움은 동세대의 타인에게, 경쟁상대에게, 연인에게 향할 것이다. 예술 존재 자체에 대한 불신, 우리가 노력해도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전시회장 예술로는 다 끌어안을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해답이나 대명사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발언이 일본의 전위를 대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일본의 전위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인물의 내면에서
기성 권위, 기성 사상에 대한 반발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 구절을 읽으면 분명해지듯이 그가 반발을 느낀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주변의 `현대`이며 그 `현대`에 얽매여 있는 바로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또한 ˝우리가 노력해도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전시회장 예술로는 다 끌어안을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해답이나 대명사를 원했다˝는 구절을 보면 그들이 원한 것은 오히려
서구의 기성 권위나 기성 사상에 맞먹는 어떠한 확실함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실함이 `우리가 노력해도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이라면 거기에 `전시회장 예술`이라는 근대의 제도로는 `다 끌어안을 수 없는`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서의 `전근대성`이 노스탤지어처럼
계속 붙어있었다고 해도 그 나름대로 이해가 된다. 그것이 바로 노스탤지어와 전위라고 할까.
이와 같은 `해답`이나 `대명사`에 대한 초조감이 전근대적이고 행복한 공동성을 상실한 탓에 기인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확인해볼 일이다.
그와 반대로 근대는 그러한 `해답`에 대한 초조감, 본연의 자신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은 처음부터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없는 초조감이다. 원래 이유 없는 초조감이나 존재의 불안만큼
근대적인 것이 달리 있을까.

pp.64~65





1920년대부터 1930년, 1955년부터 1960년대에 나타난 일본의 전위 미술운동이 남긴 흔적이 왠지 옴진리교 활동이나
그 상상력과 비슷한 데가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러한 모든 것이 `도시`를 향해 조준이 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말할 것도 없이 시라카와는 여기서 다이쇼기 신흥예술과 구타이에서 반예술로 이어진 흐름을 가리킨다(다이쇼기 신흥예술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던 마보가 간토 대지진 이후 바라크 장식사 활동을 하였는데, 우연히도 1990년대 한신 대지진
재해 때의 상황과 기묘한 대응관계를 보인다). 시라카와는 침체되어 래디컬리즘을 상실한 `일본의 전위` 미술 대신에
불행하게도 그와 같은 `전위` 반복의 거점이 되어버린 것이 옴진리교가 아닐까라고 말한다.

pp.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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