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 1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장미의 이름>은 아드소라는 수사가 어린 시절 그의 스승과 함께 겪었던 일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드소의 스승인 윌리엄 수사는 대단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매우 경험주의적이며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데, 이걸로 보아 아마 중세의 유명론자였던 윌리엄 오컴(William Ockham, 1285?~1349?)을 실제 모델로
한 것 같다. 오컴은 중세의 형이상학적 신학자들이 쓸데없는 사변을 일삼는 데 반발하여, 불필요한 사변적 개념들을
철학에서 도려낼 것을 주장했다(오컴의 면도날). 어쨌든 소설 속에서 윌리엄 수사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그는 사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다).
한편 윌리엄과 대립하는 호르헤 수사는 광신적인 믿음을 대표하는데, 굳이 그 역사적 모델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중세 수도승의 일반적 유형이었을테니까. 하지만 아델모 수사의 우스꽝스런 그림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에서,
호르헤는 12세기의 수도승 성 베르나르를 연상시킨다.


이렇게 보면 윌리엄과 호르헤의 대립은 두 가지 상이한 미학의 대립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중세를 지배했던 건
호르헤의 미학이었다. 중세는 웃음이 없는 시대였다. 물론 이 숨막히는 시대에도 통풍구는 있었다. 그건 카니발이라는
축제인데, 여기서만큼은 음탕한 행위와 우스꽝스런 언동이 허락되었다. 하지만 이 며칠을 제외하면 사회는
늘 엄숙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교회는 종말론을 유포하여, 사람들을 늘 종교적 흥분 상태 속에 붙잡아놓으려
했다. 종말이 온다는데 웃을 기분이 나겠는가?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원이 사회주의 국가를 가리킨다는 걸 알 거다.
착취 없는 유토피아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늘 정치적 흥분 상태에 몰아넣었던 그 현대의 수도원. 지금 그 수도원을
폐허가 되어버렸다. `트리에르 지방에서 발생한 묵시론의 일파(마르크스주의)`는 처참한 꼴로 종말을 고했다.
왜 그랬을까? 웃음을 거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를 살아하는 사람의 사명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웃도록, 진리가 웃도록 만드는 게 있는거야.
유일한 진리는 진리에 대한 광적인 정열에서 우리가 해방되는 길을 배우는 데 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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