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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책 ㅣ 베스트 세계 걸작 그림책 54
레미 쿠르종 지음, 이성엽 옮김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21년 6월
평점 :
아무것도 없는 책
레미 쿠르종 글, 그림 이성엽 옮김
주니어RHK

'아무것도 없는 책'이라...이 책 제목을 보면서 떠오른 책이 하나 있습니다. 학창시절, 친구가 준 책 하나. 'nothing book'
보신 분들도 많으실 것 같아요. 지금의 스마트폰보다 조금 큰 사이즈로 영어로 'nothing book'이라 적혀있고 안에는 흰 종이만 가득한 책이에요.
저는 그냥 그 책을 노트로 사용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알리시아의 할아버지가 알리시아에게 말 한 대로 책에 무엇인가 적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면, 제게도 그 책이 생각이 퐁퐁 솟아나는 마법의 책이 되었을 수 도 있었을텐데! (그 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말이죠^^)

책 제목과 달리, 이 책 안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책'에 대한 이야기지요.
이 책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조금 전, 손녀인 알리시아에게 선물로 준 책이랍니다.
할아버지의 서랍속에 고이 넣어져 있던 그 책은 이제 알리시아의 것이 됩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책을 둘도 없는 보물이라고 하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그냥 종이 뭉치로 볼 수 도 있지만 이 책에는 신비한 마법이 깃든 책이라 할아버지가 이야기해주시니 정말 그런 것 같았지요. 그것도 머릿속에 새로운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책!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리시아의 머릿속에 퐁퐁퐁 새로운 생각들이 솟아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책 제목을 '아무것도 없는 책'이 아니라 '생각이 가득한 책'이라고 지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하는 생각부터, 알리시아가 좋아하는 초콜릿 무스처럼, 기린처럼, 또 지퍼를 만든 것과 같은 또렷하고 새롭고 간단한 생각, 원래 머릿속에 있었던 생각같기도 한 그 생각들이 떠오를 거라고 알려주시지요.
단, 책에 뭐라도 묻으면 마법의 힘이 사라진다고, 책을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이야기해주시지요.
그 책을 전해주시고 그다음 주에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 그 책 덕분일까요? 알리시아는 할아버지가 관 속에 계신 것이 아니라, 생각들로 가득한 세상으로 떠나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빈 자리를 대신해주는 듯 이후 알리시아의 삶 속에는 이 책이 늘 함께하지요.

책에 무엇이 묻거나 더러워지면 안되기에 위험한 순간들도 종종 지나갔지만, '아무것도 없는 책'은 알리시아에게 무궁한 생각 주머니 역할을 해주었어요. 특히, 알리시아가 좋아하는 부엌에서 요리를 할 때 말이죠.
흰 종이에 낙서처럼 그려진 요리에 관한 상상 가득한 그림을 보면서 정말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걸까, 그림책 속에 남겨질 것이 아니라 실제 식당에서 만나보았으면 좋겠다 싶었지요.
알리시아가 요리를 할 때도,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람과 함께 할 때도, 작은 식당을 함께 꾸릴 때도 이 책은 그녀와 함께 했지요. 생각을 찾아내는 것이 몸에 배일 정도로요. 심지어 이 책이 화재로 한 줌의 재가 된 그 때에도, 알리시아의 생각은 끊이지 않았어요.
지금 이 책을 우리가 보고 있는 것도 그 생각의 연장선에서 이뤄진 것이니까요. (거기에 인쇄소 아저씨에게도 '아무것도 없는 책'의 마법이 통했는지, 아저씨의 생각 한스푼이 더해져서 그림책으로 나왔네요!)
마법은 마법을 믿는 사람에게 통한다고 하지요. 알리시아가 할아버지가 주신 책은 그저 평범한 무지 노트였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더해주신 이야기 한 스푼, 알리시아가 할아버지의 말을 신뢰하며 그 책을 들여다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 어느덧 습관으로 자리잡아가면서 그 '마법'의 힘이 증폭된 것이 아닐까요.
빽빽하게 지식이 적혀있는 책을 대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때, '아무것도 없는 책'을 보며 멍하니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그 시간이 우리 삶에 생각지 못한 마법이 시작되는 시간이 될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