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대로 산다고들
하지요. 잎사귀에서 딴 이름 '잎싹'을 혼자 가진 난용종 암탉은, 이 의미대로 자신의 삶을 펼쳐갑니다. 그렇게 알을 품어 병아리의 탄생을 보고
싶어하더니, 제 알은 아니지만 온 몸으로 품은 새끼를 가지게되고, 죽을 때 조차 거름처럼 다음 세대의 양분이 되는것을 알고 숭고하게 생을
마감했으니까요. 꽃처럼 피어날 그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잎싹이 폐계로 여겨진
뒤 닭장에서 나왔다는걸 눈으로 읽었으면서도 다른 이의 알을 품고 초록머리를 훌륭하게 키워낸 것이 건강한 암탉이라 가능한 것이라 여기고
있었나봅니다. 알을 낳지 않으면 존재가치가 사라지는 듯 여긴 상황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낯선 세계로 나아간 잎싹. 이번에 다시 보면서 잎싹의
용기를 보게되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나아가도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 그 소망이 있었기에 다른 것이 부족해도 살아갈 힘을 가질 수 있었겠다
싶었지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게되는 것이 달라지는 걸까요. 마당을 나온 암탉을 처음 접했을 때는 잎싹의 '모성애'라는 것이 와닿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길러낸
초록머리, 그리고 자신의 몸을 족제비 새끼의 먹이로 내주는 모습에서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이번에 다시 보면서
등장인물 캐릭터 하나하나에 마음이 갔습니다.
먼저는 잎싹.
엄마로서의 삶 이전에 '잎싹' 그녀의 온전한 삶을 머릿속으로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알을 낳토록 정해진 삶.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 알을 품고
병아리를 키워보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아무도 장담하지 않았지요. 자신이 낳는 알이 무정란이란 것도 몰랐었고, 닭장을 나올 때의
그녀의 몰골은 병들고 죽어가는 폐계로 버려지는 쪽에 속했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소망이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살 소망이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잡았지요. 텃새로 인해 늘 바라보았던 마당에서 살 수 는 없었지만 마당을 벗어난 그녀에게는 그토록 바라던 알을 만났습니다. 자신이 알을
품는 것이 자신의 꿈이기도 했지만, 누군가의 슬픈 현실을 위로해주는 것이라는 걸, 그녀만이 그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자신도
몰랐지만요.
나그네 청둥오리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잎싹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강렬한 소망뿐 아니라 돕는 이들의 힘, 그 선두에 있었던 것이 바로 나그네
청둥오리였습니다. 그가 마당으로 잎싹을 초대하지 않았다면, 또 잎싹이 자신의 알을 품을 때 묵묵히 그녀를 돕지 않았다면, 족제비가 배고파질 때
자신의 몸을 먼저 내어주지 않았다면 이후의 잎싹과 초록머리의 이야기가 펼쳐질 수 없었겠지요. 나그네는 잎싹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알려주는
전략가였고 가시고기의 부성을 가진 이였습니다. 이후 잎싹이 족제비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것도 어쩌면 이 나그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