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작가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저자가 이 책 속에서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인물들을 풀어낼 때야
그제야 기억 깊숙한데서 읽어본 이야기였는데 하고 떠올렸다.
고전이라서, 또 교양으로 접했던 러시아 문학이라 책은 들고 봤었지만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 철저히 글 속 세상과 나를 분리해놓고 봤었나보다. 글을 읽는 건 그런게 아니라는 것 이제는 어렴풋이 느끼지만. 그때의
나는 그 책들을 의미없이 보았기에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던거다.
퇴사를 하고 저자의 손에서 읽혀진 도스토옙스키,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의 저작을 읽기 시작하고 그 속에서 지금 상황을
만나고,
또 감정을 이입하고 책 속 인물들의 모습속에서 그와 닮은 이들이 내
주변에 있다는 것도 보며 위로를 얻고,
앞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기도하는 그런
이야기가
속 시원하게 적힌 글이 이 책이다.
이제껏 고전을 소개하고 인용하는 글들은 현학적이거나 그 책들이
쓰여진 그 상황가운데 책 속 이야기를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머리를 쥐어짜게하는 것들이었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주인공들의 이름으로 안그래도
헷갈리는 인물관계속에 스토리라도 이해하기에 급급, 거기에 담긴 주제라도 생각할손이면 스스로 대견하다 여겼었다.
그러나 그 글은 읽어봐야하는 숙제로 여겨질 뿐.
삶의 통찰이 없이 인생이 담긴 책을 이해하기는 그때의 나는 너무도
풋내기였다.
지금의 나도 인생에 대해 통달했는가 묻는다면 할말이
없지만,
그나마
저자의 삶으로 풀어내는 도스토옙스키를 읽어가면서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일정도는 되었다.
까라마조프 씨네 막내아들 알렉세이 처럼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고 날
비난하지 않는 사람,
<미성년>에 나오는 돌고루끼처럼 꼬일대로 꼬인
관계속일지라도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상황에서 자신을 존중하는 능력'을 갖추고
'진정한 품위'를 갖추는 것,
스스로를 비하하지않는 '나 자신과의 화해'라는 문구를 곱씹게 했던
<백야>의 한 장면,
자신을 잘 알고,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솔직함의 대상을 자기로
둔 <백치> 속 미쉬낀 공작
나이가 들어가는 나의 모습을 <노름꾼>에 나오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그려보는 것까지
자신의 퇴사와 인간관계속에서 겪은 이야기를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들려주면서
어떻게 그 이야기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속에 다 들어 있는지, 또
두 도작가(도제희, 도스토옙스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로 여겨지지
않는건 왜인지.
술술 읽히면서도 문득문득 멈춰서게하는 글이었다.
삶의 부조리함과 인생의 꽃길이 아닌 온갖 형편없는 상황이 드러난
글이 고전으로 남은 것은
그것이 내 삶보다 더 큰 분노와 좌절과 절망을 품고 있어서, 내
삶과 닮아있는 그것이 위로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좋은 선택이었다.
작가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쓰면서 한 말에 나도
동의.
두 도작가님의 글 덕분에 고전을 읽는 맛을 저도 조금 알게
되었어요. 감사해요. - 말하고 싶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고 싶지만 어렵게만 느껴지는
분들이라면,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분들께
이 책 한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은 책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