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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비문(廣開土太王碑文) 쟁점에 대한 완전 해석 - 광개토왕비와 장군총과 태왕릉을 파괴하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 개정증보판
홍재덕 지음 / 지식과감성# / 2025년 6월
평점 :

우리가 긍지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문화적 유산이지만
중국에 있기에 쉽게 볼 수 없기에 책을 통해서 제대로 내용을 알고 싶어
서평단을 통해 좋은 기회를 얻었네요.

일본의 조작으로 인해 많은 논란을 야기시킨 광개토왕비문에 대해
130년이나 한,중,일 3국의 석학들이 풀지 못한 난재들을 모두 다 명쾌하게
해석하였다는 것에 열정이 대단하신거 같고 조작을 할만큼
자신감도 없고 속좁은 모습이 원래 가진게 없는것들이
그러려니 하면서 충분히 이해가 되네요.





내용이 내용인 만큼 목차가 엄청 나네요. 책은 1장 ~ 9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네요.

제1장 광개토왕비문의 진실
시작은 광개토왕능의 설치와 비의 건립인데 비문에
"갑인년(414) 9월 29일 을유천취산릉어시입비"라고 명기되어 있으나
현재까지 왕의 능을 특정하지 못하고 있는게 안타깝네요.
고구려가 패망한 이후에는 돌보는 이 없이 이국땅에 외로이 홀로 서 있고
봉금제로 200년이나 인적이 끈ㄹ기 황무직 속에 은둔해 있다
봉금이 해제된 후 1878년에 이르러 재발견이 되었다고 하네요.

제2장 초기의 탁본
관월산이 광개토왕릉비를 최초로 재발견한 인물이라는 설에는 이견이 없다고
하면서 이유에 대해 그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비를 보아 왔지만
누구의 비석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말하고 있네요.
1300년에 태조 이성계 장군이 북벌 중에 발견하였지만 광개토왕릉비라는
사실을 모르고 금나라 황제비로 오해하였다는것에 전쟁을 위한 것이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없다고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건 어쩔 수 없네요.

제3장 광개토왕비문에 대하여
광개토왕비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록한 거으로
그의 아들 장수왕이 2년(서기 414년)에 세운 세계 최대의 비석이라고
하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네요.
비는 동남쪽 방향으로 세워져 있고 비의 규모는 높이가
22척, 폭은 대략 1.5~2m라고 하고 무게가 37t이라고 하니 어마 어마 한거 같네요.
장수왕이 부왕의 공적을 돌에 새겨 자손 만대에 전하고자
300여 인의 수묘인으로 하여금 수요에 종사하게 한 것만 보더라고
고구려의 원대한 기상과 강성했던 국력을 짐작 할 수 있게 하네요.

제4장 비문변조와 참모본주
일본이 1868년 명치유신을 단행하고 군국주의를 표방, 팽창주의를 지향하여
조선을 삼키고 중국까지 삼키려는 야심 찬 꿈을 꾸고 있었고
청국을 안심시킨 연후에 어학연수생, 주재무관이라는 허울뿐인 이름으로
비밀정보원인 밀정들을 한국과 중국에 대량으로 파견하여
결국 밀정들이 광개토왕비의 탁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하니
지금으로선 너무 안타까운 현실이었었네요.

제5장 비문변조설
비문변조설을 최초로 제기한 것은 1972년에 이진희 씨로 알려지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보다 50년이나 앞선 때 이미 제기가 되었다고 하네요.
1920년에 신채호 씨가 집안현 통구의 태왕비 앞에서 중국인 영자평 씨와
나눈 필담에서 이미 제기된 것이라고 하고 대화 중 비문의 많은 부분의 글자가
삭제, 변조 되었다는 것과 이때에 일본인이 비석에 발판을 가설하고 탁본 작업을
독차지하고 탁본을 만들어 비석 앞에 전을 벌이고 판매하셨다는 것을
1929년에 발행된 [조선상고사] 191쪽에 모두 기록하였다고 하네요.

제6장 비문에 대한 논쟁
비문에 대한 논쟁의 핵심은 "비문변조설"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신묘년조에 대한 논쟁을 다룬다고 하면서
시비곡직을 가리기 위한 논쟁이라고 하기보다 오늘날까지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어 이에 ㅐ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비문에는 1지 1구도 오류나 왜곡이 없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작성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문의 문의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야기되는 논쟁으로 8개 항목으로 군분이 된다면서 이어지네요.

제7장 왕건군 씨의 주장에 대하여
왕건군 씨는 중국의 길럼성 문물고고연구소 교수로 광개토왕비문에 남다른
관심과 연구서를 많이 내어 광개토태왕비문의 난해한 문제들에 대하여
명쾌한 해석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고
왕 선생의 역자 [호태왕비 연구] 54쪽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더욱 기대가 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실망이 컸다고 하네요.

제8장 고구려 왕릉의 고증
고구려가 패망한 지 700년이 지난 1369년에 주원장이 남경에서 봉기하여
북경에 있던 원나라 순제가 북경에서 쫓겨나 바이칼호로 도망치고 이성계 장군이
분발하여 동북의 6진을 회복하고자 길림성 간도 지방에 진출하여
두만강 북쪽 700리의 선춘령까지 점령 후
진안현을 탈환하고 철령까지 점령하고 봉천, 요양, 해성, 개평성을 점령
했다고 하네요.
1370년 8월에 이성계 장군이 동녕부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하는 길에 비를
바라보면서도 금황제의 비로 오인하여 [용비어천가]에도
대금 황제성으로 기록하였고 1486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랑]
강계도호부조에도 "황성평 거만포30리 금숙소도황제묘"라고
기록하였다고 하는걸 보여주네요.

제9장 비문 연구의 140년사
광개토왕은 373년에 태어나 18세(391년)에 즉위하여 22년간 재위하면서 남정
북벌로 국토를 넓히고 국정을 강화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군주로 추앙되고 있는 왕이라고 하는데 공감이 되네요.
412년에 승하하시고 414년에 집안시 국내성 동강에 능묘를 설치하고
훈적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고 하는데 훈적비가 세워진 지 1600년이
지났지만 봉금제 시행으로 200년이나 방치되다가 1877년에
봉금제 해제로 비의 존재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지만
일본에서 출판된 [회여록] 2가지 논쟁이 야기되고
필자가 논쟁의 종식에 관한 4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네요.

결론
비문에 왜곡이나 오류가 있어서가 아니고 변조되고 조작된
4대 악서를 발표함이 원인이고 서평자들의 왜곡된 서평으로 인한
혼란이 더 가중되고 있다고 하면서
130년간 5개국 학자들도 문제를 풀지 못하고 논란만 벌이는
국제적 난제를 80이 넘는 나이에 홀로 나서 논쟁의 핵심 문제들을
모두 밝혀 논쟁의 종식을 기할 수 있게 된 것을 필생의 큰 보람으로
책을 마무리 하는데
이것을 혼자서 모든걸 받쳐 완전 해석을 했다는 것에 큰 감명과 함께
우리 모두가 긍지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네요.